그러나 6월 항쟁을 반쪽짜리 혁명이라고 쓰는 것은 옳지 않다. 1987년 6월은 한국 민주주의의 참된 시작이었다. 6월 항쟁으로 비로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가 민망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 6월 정신은 우리 삶의 현장 곳곳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의 요구를 낳으며 마침내 지난겨울 촛불을 일궈냈다. 6월 항쟁 30주년, 당시 숨은 주역 3명의 인터뷰를 싣는 것은 2016~2017년 촛불의 전사(前史)인 1987년 6월을 통해 민주주의의 본뜻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_편집자
여름에 가까워진 날이었다. 그날 연세대 1학년 김상호(당시 19살)씨는 교정에 있었다. 1987년 6월9일이었다.
“다음날 있을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를 위한 예비집회였어요. 같은 날 예정된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지명 전당대회 규탄의 성격도 있었죠. 오후 2시께 중앙도서관 앞에서 집회를 시작했어요.” 이제는 국회의원이 된 우상호 총학생회장(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이 마이크를 잡았다. “내일은 민주주의가 사느냐, 독재정권을 연장하느냐 결정하는 중요한 궐기일입니다. 내일 시청 앞에서 만납시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청년이잖아요”
오후 4시께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진출했다. 연세대 정문에서 50m 떨어진 굴다리 앞에는 전투경찰과 사복 체포조 ‘백골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지랄탄과 최루탄을 난사했어요. 우리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응수했죠. 집회 뒤 도서관 광장에 모여 정리집회를 하는데 경영학과 86학번인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당시 전경들이 수평으로 최루탄을 쏘곤 했는데 그게 뒷머리를 때린 거죠.”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는 이 사건이 대한민국 현대사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날부터 학생들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한열이를 살려내라!”로 바뀌었다. 이에 앞서 4월13일 전두환은 전년부터 일기 시작한 대통령직선제 개헌 논의를 거부하고 현행 제5공화국 헌법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내용의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범국민대회가 열린 6월10일 오후 6시, 연세대·이화여대·서강대 등 서울 서부지역 대학생들의 집결지는 명동 롯데백화점 앞이었습니다. 백화점 앞 인도에 서 있던 수백 명의 학생들이 오후 6시 정각이 되자 도로를 점거하고 명동 입구 쪽으로 행진을 시작했죠. 10분 정도 지났을까, 명동 입구 쪽에서 전경들 수십 명이 사과탄을 던지며 달려왔어요.”
휴대용 최루탄인 사과탄이 터지면서 명동 앞 도로는 아수라장이 됐다. 마스크를 두 개씩 썼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면서 앞을 볼 수조차 없었다. 가져온 휴지도 물도 다 떨어졌다.
그때였다. “와아!” 학생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명동 하늘에서 두루마리 휴지와 휴대용 휴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빌딩 위에서 시위대를 지켜보던 직장인들이 창문을 열어 휴지를 던져준 것이다. “정말 감동이었어요. 국민들이 우리를 지지해준다는 그 경험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그날 을지로 한국은행 앞엔 학생과 시민 2만 명이 운집했다. 경찰의 저지선이 뚫렸고 일부 병력은 시위대에 포위됐다. 시위대는 전경 1개 소대의 전투복을 벗긴 뒤 그들을 분수대로 데려가 씻겼다. 모두 앳된 얼굴의 젊은이였다. 전경과 시위대는 함께 노래 을 불렀다. “전경과 시위대로 또다시 만나겠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청년이잖아요.” 거리시위를 마친 시위대는 이한열이 입원해 있던 세브란스병원 중환자병동으로 이동해 병원 앞에서 밤샘농성에 들어갔다. “혹시 모를 경찰의 침탈에 대비하고 의식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엄마 처지에선 다 내 자식 같았어요”
학생들이 시위대와 대치하던 6월10일 낮, 강영주(세례명 수산나·당시 48살)씨는 여느 날처럼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 옆 공터를 지키고 있었다. 3개월째 명동성당에서 천막농성을 하는 상계동 철거민(78가구)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참이었다. 일하러 나간 부모들 대신 멸치볶음·연근조림을 해 아이들을 먹이고, 무료해하는 주민들의 말동무도 됐다.
오후 4시께,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흐릿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학생과 시민들이 성당 입구로 뛰어들었다. 큰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한 강씨도 다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빨리 들어와, 성당에선 안 잡혀가!” 성당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비참한 행색이었다. 옷과 안경이 찢기고 깨졌고, 몸에 난 상처엔 피와 최루탄 가루 범벅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6·10 국민대회’에 참여해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이다 후퇴한 시위대였다. 밤이 되자 성당으로 피신한 시위대는 1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20일간 이어진 6월 항쟁의 성지가 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의 시작이었다.
뒤늦게 피 흘리는 이한열의 얼굴을 신문 기사에서 본 강씨도 몸을 떨었다. 22살, 21살, 16살이던 세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 처지에선 다 내 자식 같았어요. 도저히 울분을 참을 수 없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강씨는 평범한 중산층 주부였다. 무역회사 사장인 남편 덕에 단독주택에 살면서 가사도우미도 있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도시 빈민을 돕고 공해 반대 운동을 했지만, 민주화 투쟁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명동성당에 들어온 아들딸들 모습에서 자꾸만 이한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강씨는 그들을 지켜주기 위해 ‘시위대 조력자’가 되기로 했다.
매일 아침 7시 명동성당으로 출근해 자정이 넘도록 시위대를 먹이고 입혔다. 천주교 도시빈민회에서 함께 활동하는 주부 2명과 상계동 철거민들이 힘을 보탰다. 더운 날씨에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시위대의 옷을 하루 종일 빨았다. 빳빳한 청바지의 물기를 짜는 일이 가장 고됐다. 경찰 몰래 반입한 쌀로 밥을 짓고 라면도 끓여 먹였다. 인근 계성여고 학생들은 “많은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하다”는 쪽지와 함께 철제문 사이로 도시락을 넣어줬다.
전열을 가다듬은 시위대는 6월11일, 미국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전두환·노태우의 허수아비에 불을 붙였다. 흥분한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최루탄을 난사하며 성당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김병도 주임신부의 강력한 항의로 경찰이 마지못해 철수했지만, 팽팽한 긴장감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빌미를 주지 마라” “제발 돌은 던지지 마라” 엄마들은 시위대에 빌고 또 빌었다.
강씨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도왔다. 다른 엄마들과 함께 신세계백화점 쇼핑봉투에 전단지 등을 담아 전달하는 방식으로 시위대와 외부의 연결고리를 자청했다. 엄마들은 경찰이 자신의 몸과 소지품은 수색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꼭 성당 밖으로 나가야 하는 대학생은 자신의 아들인 것처럼 팔짱을 끼고 함께 바리케이드를 통과했다.
가족은 애가 탔다. 저녁이면 남편과 세 아이가 TV 앞에 모여 앉아 경찰에 단속되는 시위대 모습에서 엄마를 찾았다. 중학생이던 아들은 “다른 집 엄마들은 자식이 데모할까봐 단속하는데 우리 집은 거꾸로”라며 엄마를 걱정했다. 남편도 “돌아다니는 건 좋은데 (내가) 면회 가게 하지는 말라”고 거들었다.
걱정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국민 여론과 천주교의 눈치를 본 전두환 정권은 명동성당의 강제 진압을 포기한다. 대신 사제들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결국 정권은 시위대 해산 뒤 안전 귀가, 전원 불구속, 구속자 전원 석방 등 3개의 농성 해제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경찰 직격탄… 우리도 재무장하자”
농성 엿새 만인 6월15일 오후 4시, 강씨는 울면서 시위대가 탄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시위대와 한 명씩 악수를 나눴고, 성당 입구부터 코스모스백화점까지 늘어선 시민 2만여 명도 환호로 배웅했다. “한 사람도 안 다치고 감옥도 안 가니까 말도 못하게 좋았다”고 강씨는 말했다.
학생과 시민들이 움직이기 전부터 거리엔 노동자들이 있었다. 6월9일 연대생들이 교정에 있던 시각, 청계피복노동조합 부위원장 김한영(당시 29살)씨는 노조 사무실이 있던 동대문 거리로 나섰다. 역시 6·10 국민대회 참여의 결의를 다지는 자리였다.
유난히 심장이 뛰었다. 10년간의 노조 활동을 거치며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6·10 국민대회가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줄 것이라 직감했다. 보름 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의 탄생을 계기로 전국의 종교·노동·농민·학생 조직이 무섭게 응집하던 터였다. 경찰과의 싸움에 이골이 난 조합원들과도 의지를 새로 다졌다. 그날 저녁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이한열의 참혹한 상황을 함께 목격한 뒤였다. 김씨는 “경찰이 직격탄까지 쏘고 있으니 우리도 재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국본 사람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어디로 가라”며 다음 행선지를 알려줬다. 전화번호는 자주 바뀌었고, 조합원 중 조장만 알고 있었다. 시위대 동선을 경찰에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김씨는 전국 단위 대회나 노동조직의 소규모 시위에 매일같이 참여했다. 명동성당 외곽 투쟁, 최루탄 추방 대회(6월18일), 가리봉 오거리 거리시위(6월20일), 영등포 로터리 거리시위(6월24일) 등 크고 작은 집회가 일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시가전이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뿌려댔고, 노동자는 화염병과 돌을 투척했다.
경찰의 폭력으로 온몸에서 피가 튀는 동료들을 곁에서 볼 때마다 김씨는 두려웠다. 그는 13살에 청계천의 ‘미싱 시다’가 되고 19살에 노조에 가입했다. 이후 경찰에게 숱하게 두들겨 맞았다. 그런데도 두려움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뜀박질을 못하는 탓에 시위대 맨 앞줄에 나서지 못하고 늘 둘째, 셋째 줄에 섰다.
그에겐 트라우마도 있었다.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을 하던 1984년 11월, 조합원들 사이의 약속에 따라 맨 앞에서 체포될 차례였다. 그러나 최루탄이 땅에 팍 튀는 소리가 무서워 그냥 내달렸다. 결국 그는 이후 2년간 수배자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김씨는 그날 시위 대오의 가장 앞으로 나섰다. 대학생과 시민보다 자신이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처음 느껴본 시민들과의 연대감이 그에게 용기를 줬다. 남대문시장 근처로 거리투쟁을 나갈 때면 상인들이 “고생한다!” “잘한다!”며 손에 음료수와 빵을 쥐어줬다. 어린 나이에 악착같이 노동운동을 해온 활동가들에게 붙어 있던 ‘무서운 사람들’ ‘소수의 투사’의 꼬리표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1987년까지 한국의 노동운동은 위축돼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피를 제물로 민주화 열기를 누른 전두환 정권은 노동운동을 다음 대상으로 삼았다. 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비롯한 160여 개 노조를 강제 해산시키고 지도부를 닥치는 대로 잡아넣었다. 1987년 6월 국면에는 국본에 결합할 수 있는 합법·반합법의 노동조직이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다.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받던 중 고문으로 사망
4월13일 전두환 정권, 직선제 개헌 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으로 정부 이양 등 내용 담은 ‘4·13 호헌 조치’ 발표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성명 발표. 경찰의 은폐 조작 폭로
5월27일 야당·종교계·재야단체 인사 주도해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발족
6월 9일 연세대학교 앞 시위 도중 이한열(21)씨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짐(7월5일 사망)
6월10일 국본, 6월 항쟁의 기폭제 된 범국민대회 개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학생·시민 약 24만 명 참여.
일부 시위대 서울 명동성당 점거
6월12일 연세대생들, 살인적 최루탄 난사에 대한 ‘범연세인 규탄대회’ 진행
6월15일 명동성당 점거농성 해산, 동시다발적 야간시위 및 철야농성으로 지속적인 투쟁
6월18일 국본, ‘최루탄 추방의 날’ 선포, 최루탄 추방 운동 대대적 전개.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150만 명 참여
6월26일 국본, ‘국민평화대행진’ 시위 강행. 전국 37개 시군에서 시민 130만여 명 참여, 3467명 연행
6월29일 전두환 정권,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 등 내용 담은 ‘6·29 선언’ 발표
1987년과 2016년 광장의 같은 사람들
6월 항쟁이 본격화될수록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노동자들이 투쟁 전면에 나섰다. ‘독재 타도’와 함께 ‘임금 인상’ ‘노동3권 쟁취’ 등의 구호가 터져나왔다.
열기는 7~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이어졌다. 6월 말~10월 말 전국에서 3311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김씨에게 내려졌던 수배가 풀렸고, 이듬해 청계피복노조는 합법 노조가 됐다. 6월 항쟁이 남긴 선물이었다.
승리의 환희는 오래가지 못했다. 6월 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은 쟁취했지만, 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이는 전두환의 후계자인 노태우였다. 분열된 야권은 3당 합당으로 보수대연합(1990년)을 허용하고 말았다. 시민들은 다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노태우 정권은 공안통치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강영주씨도 평범한 주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학생과 시민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절망했다. 1988년 5월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던 날, ‘양심수 석방’과 ‘조국 통일’을 외치며 건물 4층에서 투신한 서울대생 조성만(당시 24살)이 숨진 광경을 지켜봤다. 1991년 5월엔 주부 이정순(당시 39살)이 ‘노태우 정권 물러나라’며 연세대 철길 위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떨어지는 장면도 목격했다. 강씨는 땅에 주저앉았다.
그들 외에도 명지대생 강경대(당시 19살·4월26일 사망)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1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분신·투신했다. 그때마다 강씨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고 나면 한 명씩 죽었어요. 내 정신이 아니었어요. 무조건 (시위를) 해야만 했어요.”
강씨는 결국 거리를 떠나지 못했다. 최루탄 공격에 대비해 얼굴에 치약을 바르고 눈 밑은 랩으로 감쌌다. 엄마들은 대학생과 시민들을 패는 전경 앞을 막아섰다. 경찰이 “상관 말고 가시라”고 소리치면, “얘가 내 아들이다” 하고 맞받았다. 전경들은 엄마들까지 때리진 못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죽기 전에 이런 좋은 일도 있구나” 하고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곧 수구·보수 세력의 반격과 발악이 이어졌다. 2004년 3월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을 때 강씨는 다시 한번 거리에서 밤을 새웠다. 2008년 여름을 수놓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는 광장에서 시민들에게 커피를 나눠주며 힘을 보탰다.
지난해 겨울에도 강씨는 팔순의 나이에 주말마다 전철을 타고 경기도 안산과 서울 광화문을 오갔다. ‘무능한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추운지, 다리가 아픈지도 몰랐다. 집에 돌아가서야 한참을 끙끙 앓았다.
1987년의 뜨겁던 여름으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다. 그는 더워지는 이맘때면 ‘그날의 거리’를 떠올린다. “그 학생들이 뭐하고 사나 궁금해요. 잘 자라서 사회 곳곳에 득이 되는 일을 하고 있겠죠.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촛불집회 때도 애들 데리고 다 나왔을 거예요.”
시민의 힘으로 새 정권을 만들어내다
김씨의 바람대로 올해 쉰 살이 된 연대생 김상호씨도 지난해 겨울 광장을 지켰다. 스무 살 때 느꼈던 승리의 경험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그는 1995년 김대중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며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10년 넘게 국회 보좌관 생활을 하다 지난해 봄 고향인 경기도 하남으로 내려갔다. 지난해 12월에는 지역 시민단체인 하남행복공동체를 만들었다. “나를 비롯한 87학번들은 정치적 효능감을 일찍 맛봤어요. 그때 승리의 경험이 이후 삶의 원동력이 됐어요. 정치 민주화를 쟁취한 6월 항쟁은 앞으로 경제민주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김씨는 부동산 개발 붐으로 척박해진 하남에 사회적경제를 바탕으로 실험해보는 지역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노조 활동으로 젊은 날을 보낸 김한영씨는 오래전 현장을 떠났다. 1992년 결혼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먹고살기 바빴다. 그래도 2000년대 들어 지역의 기둥을 세우고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에 협동조합 운동을 거들었다. 2015년부터는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에서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 역시 지난해 겨울 촛불을 들었다. “꼭 내가 아니어도 되지만 한 자리라도 더 채우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30년 전과도 같았다. 광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전엔 싸우기 바빴는데 이젠 편하게 자리 깔고 앉아서 구호를 외치더라고요. 서로를 느끼기에 충분했어요.”
그들에게 2017년은 어느 때보다 뜻깊은 해다. 시민의 힘으로 새 정권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상상보다 더 잘하고 있어요. 큰 실수 없이 무난히 임기를 마치는 첫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어요.” 강영주씨는 말했다.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해낸 1987년의 광장과 박근혜 정권을 타도한 2016~2017년 광장을 메운 것은 결국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87년 여름’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6월 항쟁 내내 전두환은 계엄령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12·12와 5·17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그에게 계엄령 선포와 군부 동원은 가장 손쉬운 위기 극복 방안이었다. 그러나 계엄령은 선포되지 않았고 1980년 5월 광주와 같은 유혈 진압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1987년 6월19일.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을 만났다. 릴리 대사는 전두환에게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정치범 석방과 자유언론 신장을 권고하는 내용이었다. 전날인 18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최루탄 추방의 날’을 선포하고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150만 명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직후였다. 계엄령 선포는 시간문제였다.
릴리는 레이건의 구두 메시지를 전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미 동맹을 저해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재발할 수 있습니다.” 평소 대화를 독점하고 자기 말에 자기가 웃던 전두환은 이날 90분에 걸친 회동에서 줄곧 굳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 최광수 외무장관이 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엄을 선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릴리 대사가 쓴 회고록()에 담긴 일화다.
계엄령 선포는 미국이 막은 것일까? 한국 현대사의 권위자인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사학)는 (돌베개, 2011)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를 비롯한 여당 인사들이 쿠데타 가능성 때문에 군부의 개입을 꺼린 점 △이한기 국무총리 서리 등 내각의 온건파가 계엄령 선포에 반대한 점 △5·18의 기억과 광범위한 국민 참여 때문에 군 수뇌부도 개입을 반대한 점 △무엇보다 전두환 자신이 가진 군부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계엄령이란 선택에 이르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실제 6월28일 전두환은 6·29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담화문 작성과 관련해 김성익 연설문 담당 비서관을 불러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노태우도 회고록 상권에서 “동원된 군이 누구 편에 서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었다. 미국의 견제보다 쿠데타에 대한 우려가 더 컸던 셈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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