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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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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상 규명 외치며 목숨 끊은 열사들

기억해야 할 이름들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김종태·홍기일·김의기·최덕수…
등록 2017-05-23 17:52 수정 2020-05-03 04:28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가 1980년 조선대에서 연설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가 1980년 조선대에서 연설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1980년 6월2일치 1면에는 당시 전남고 교사인 김준태 시인의 시가 실렸다.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사전 검열로 100행이 넘는 시의 3분의 2가 잘려나갔다. 시인은 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은 폐간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시와 신문은 찢겨도 광주 정신은 남았다. 시인의 말처럼 ‘밥그릇조차’ 대할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는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계엄사령부(계엄사)는 광주를 무력으로 포위했고, 언론에는 보도지침을 내렸다. 5월31일 계엄사의 발표문에는 ‘무장폭도에 의한 살상·파괴·방화·약탈’ ‘북괴의 고첩(고정간첩)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위해분자들의 책동 흔적’ 등의 관변 ‘유언비어’가 실렸다.

하지만 광주 정신은 결코 고립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끝내 광주를 기억해냈고,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에서 박관현·표정두·조성만·박래전 열사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 열사는 1980년 5월16일 옛 전남도청 앞에 마련된 무대에 올랐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 성회를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자는 것이요,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모아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광주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민주주의를 향한 열기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광주가 봉쇄되면 계엄사의 주요 타깃이 될 게 분명했다. 5월18일 새벽 광주를 빠져나와 전남 여수로 몸을 피했다. 이후 서울의 공장에서 일하다 1982년 4월 체포됐다. 혐의는 내란중요임무종사였다. 박관현은 모진 고문과 동료의 거짓 자백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살아 남은 박관현은 감옥에서 투쟁의 길을 택했다. 그는 5·18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며 총 40일이 넘는 단식 끝에 급성심근경색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표정두 열사는 광주 대동고등학교에 재학 중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학을 당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홀로 공부해 1983년 호남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그 뒤 용접공 등으로 일하다 1987년 3월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등유를 몸에 끼얹었다. 몸에 불을 그은 뒤 미국 대사관을 향해 80m가량 달렸다.

“내각제 개헌 반대” “장기 집권 음모 분쇄” “박종철을 살려내라” “광주 사태 책임지라”. 근처에 있던 교통경찰 2명이 소화기로 불을 껐다. 하지만 표정두 열사는 이틀 뒤인 3월8일 끝내 숨을 거뒀다.

5·18 알리려 목숨 건 이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정 원내대표는 이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사진공동취재단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참석했다. 정 원내대표는 이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다물었다. 사진공동취재단

5·18 민주화운동 8주년이 다가오던 1988년 5월15일,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선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때 명동성당 4층에 한 젊은이가 올랐다. 서울대학생이던 조성만 열사는 핸드마이크를 들고 “양심수 가둬놓고 민주화가 웬 말이냐” 등의 구호를 외친 뒤 유서를 뿌리며 뛰어내렸다. 그는 유서에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미국의 등장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을 동반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외쳤던 제주도민의 학살인 4·3, 한국전에서 보여준 미국이 우리 민족에 가했던 살상. 5·16의 지원, 저 잊을 수 없는 80년 광주 학살 등”이라고 적었다.

1988년 6월4일에는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박래전 열사가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 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다. 그는 유서에 “진정 자주, 민주, 통일은 몇몇 소수의 염원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며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 바쳐가며 투쟁하는 열사들의 모습이, 학살 원흉 처단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인가. 들리지 않는가. 광주 영령들의 울부짖음이”라고 적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름을 부른 이들 외에 많은 사람이 광주를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는 기념사 초안 마련에 참여한 신동호 청와대 연설기획비서관 내정자가 “광주에 대한 부채감을 갖고 1980년대 이후를 살아온 우리 모두가 광주의 자식들이란 점을 문 대통령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라며 “5·18과 관련해 목숨을 끊은 열사들을 셈해보니 12명이었다. 그분들 이름 모두를 불러드리지 못한 것을 대통령도 미안해하실 것”이라고 말했다고 5월18일 보도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1980년 5월30일에는 서강대 학생이던 김의기 열사가 광주 사태의 진상을 알리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면서 서울기독교회관 앞에 서 있던 무장한 장갑차 앞으로 떨어졌다. 그는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계엄령으로 숨죽이는 서울 시민들에게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고 절규한 것이다. 김의기 열사의 투신이 자의에 의한 것인지, 군경의 겁박에 의한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가 광주 정신을 계승한 열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광주, 광주 그리고 광주

1980년 6월9일 이화여대 앞 사거리에 노동자 김종태 열사가 섰다. 그는 부산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 때문에 국민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배워야 한다는 집념은 강했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전 과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1978년에는 스스로 야학을 만들어 근로기준법을 가르쳤고 같은 해 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을 지원해왔다. 1979년 ‘YH 사건’(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중 강제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한 사건)으로 야학 교사들이 연행됐고, 자신이 만든 야학이 강제 해산된 뒤 방위병으로 소집됐다.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참극을 전해들었다. 그는 분신하기 이틀 전인 6월7일 이해학 목사에게 ‘광주 시민,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글을 전했다.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김종태 열사는 그렇게 몸으로 광주를 기억했다.

1988년 5월17일 단국대 학생이던 최덕수 열사는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학교로 올라와 광주항쟁 계승투쟁에 참가했다. 5월18일에는 아침부터 핸드마이크를 들고 광주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다 오전 11시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분신 직전 “광주는 아직도 살아 있다. 끝까지 투쟁하라”고 외쳤다. 병원으로 옮겨진 뒤에도 “나는 괜찮다. 가서 투쟁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은 최덕수 열사가 ‘대동제(축제)에 학교에 주점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비관해서 자살했다’고 왜곡보도했다. 같은 날 단국대 총학생회는 “지금 최덕수 학우는 생명이 위험하다. 이 학우는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힘으로 소생시켜야 한다. 이 학우를 소생시키는 길은 오직 우리의 강고하고 처참한 투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우리의 꺾이지 않는 투쟁의 열기가 삼천리 강산을 뜨겁게 하고 노태우 일당과 미제의 무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때 최덕수 학우는 두 눈 부릅뜨고 우리의 투쟁 대열로 달려올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간절한 학생들의 염원에도 최덕수 열사는 5월26일 세상을 떠났다.

광주 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으로 참여해 다리에 총상을 입고 5년 뒤 세상을 떠난 홍기일 열사도 있다. 그는 1985년 8월1일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미장일을 하며 번 돈 62만원을 부모에게 전한 뒤 “마지막 효도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8월15일 전남도청 앞에 있는 한 식당 화장실에서 쥐약을 먹은 뒤 휘발유를 몸에 끼얹었다. 아직도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의 탄흔이 선명한 전일빌딩 앞에서 홍기일 열사는 “광주 시민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학원안정법 반대투쟁에 결사적으로 나서자” “뭉칩시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뿌리고 분신했다. 선언문에는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 그토록 울부짖으며 부르짖던 민주가 자유가 뜨거움의 아픔으로 5년이 흐른 이 시점에서 아픔이 아픔으로 느끼지 못하는 이 현실에 무등을 보기가 부끄러울 뿐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재야 인사들은 그를 지키기 위해 전남대 병원으로 갔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분신을 결심한 계기를 자신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전했다. “5·18 때 살았다는 것이 부끄럽고 5·18의 의미가 무엇인지 당시 잘은 모르는 상태에서 문제성을 자주 파보니까 우리의 현실에 커다란 문제점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오늘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경찰은 8월22일 새벽 홍기일 열사가 숨지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입관해 장의차에 실어 떠났다.

반복되는 계엄사의 망령

광주는 1980년 이후 벌어진 모든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고향이었다. 1987년 6월 거대한 민주항쟁의 발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광주를 광주로 묶어두려는 시도가 있다. 학살자로 처벌된 전두환과 계엄사의 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 정준길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5월18일 논평을 내어 “5·18 당시 북한군 개입 의혹 등 5·18 진상 규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까지도 함께 밝혀져야 한다”고 말했다. 1980년 5월31일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북괴의 고첩(고정간첩)과 이에 협력하는 불순위해분자들의 책동 흔적”이 있다고 말한 계엄사의 ‘유언비어’가 29년 뒤에도 여전히 우리 곁에 똬리를 틀고 있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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