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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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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 바람에 흔들리는 '창'

등록 2002-01-16 00:00 수정 2020-05-02 04:22

TK·비주류 중진·소장개혁파 총공세…당권·대권 분리 목소리 높아간다

정치는 생물이라 했던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요즘 그 의미를 실감할 법하다. 지난해 10·25 재보선 이후 그는 당 안팎에서 ‘넥스트 프레지던트’로 불렸다. 측근들은 대통령을 ‘떼논 당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겨우 70여일, 봄날은 갔다. 지난 1월7일 민주당이 국민참여경선제라는 승부수를 던진 뒤 한나라당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주일, 비주류 중진과 소장개혁파는 물론 우군인 대구·경북(TK)세력까지도 이 총재를 마구 흔들고 있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기세도 심상찮다.

차기를 노리는 ‘TK목장의 반란’

1월13일. 이부영·박근혜·김덕룡 의원 등 이른바 ‘비주류 중진 3인방’은 ‘한나라당 쇄신에 대한 입장’을 전격 발표했다. “먼저 당 쇄신을 한 뒤 전당대회를 개최해야 한다. 당권·대권 분리를 위해 양대 경선에 중복출마를 금지해야 한다. 당 민주화를 위해 1인이 전권을 행사하는 총재직을 폐지,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3인방의 요구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당권·대권 분리’는 이들의 단골 메뉴였다. 내심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불만 세력들은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동조하지 않았다. 이 총재가 확실한 대세였기 때문. 영남지역 보수파 의원 모임을 주도하는 등 영남의 반창정서를 결집하던 최병렬 부총재마저 지난해 10·25 재보선 이후에는 몸을 잔뜩 사렸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급변했다. 우군으로 분류됐던 TK의원들은 “TK에 차기를 보장하라”며 이 총재를 압박하고 있다. 정책위의장 출신 김만제 의원(대구 수성갑)이 가장 노골적이다. 그는 “TK는 이미 10년 공백이 있고 이번에 5년의 공백이 생기는 것인 만큼 당권·대권 분리같은 것을 약속하지 않으면 표를 몰아주기 어렵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 총재의 ‘후계자 낙점’을 기대하며 조신하게 처신해온 강재섭 의원(대구 서구). 그도 “막연하게 이 총재를 지지하기보다는 TK 정치인들이 구심점을 갖고 밀어줘야 한다”며 TK 가슴에 불을 지르고 있다. 확실히 차기를 보장해줘야만 이 총재를 밀 수 있다는 것이다. 정창화(경북 군위·의성), 이상배(경북 상주) 의원 등 동조자들이 계속 늘고 있다. 바야흐로 ‘TK목장의 반란’이 본격화됐다. TK의원들 사이에는 “강재섭 의원을 차기주자로 키우자는 밀약이 이뤄졌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

침묵하던 최병렬, 손학규 의원도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이 총재에게 도전하고 있다. 최 의원은 최근 TK와 PK의원의 불만해소를 내세우며 다시 세규합에 나섰다. 손 의원은 “대선정국의 화두는 ‘제왕적 대통령’, ‘제왕적 총재’의 극복이다. 대권·당권 분리를 사전에 제도화해야 한다”며 아예 비주류 3인방의 손을 들어줬다.

당 밖에서는 국민참여경선제를 통한 바람몰이가 한창이고, 안에서는 비주류와 개혁소장파, 보수성향 TK까지 이 총재를 협공하는 형국이다. 단합된 힘으로 대세론을 굳히려던 이 총재에게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들 모두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제를 지렛대 삼아 이 총재를 압박하고 있다. 이 총재의 한 측근은 “대선이라는 절체절명의 승부를 앞둔 이 총재를 앞박해 자기 몫을 선점하려는 칼날은 숨긴 채, 당 쇄신과 민주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면서 “조정과 설득이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변신 때문에 “대권 줄 테니, 당권은 내놓으라”며 달려드는 이들을 달랠 명분이 약해졌다는 설명이다.

이 총재는 오는 2월 중순께 국가혁신위에서 당과 정치에 대한 혁신방안을 발표해 올 대선에서 정치개혁 명분을 선점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민주당의 선제공격으로 이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대의명분은 제쳐두고 당 장악력과 권위마저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이 총재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류는 1월9일 서둘러 ‘선택 2002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전당대회 개최 방안을 빨리 확정해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공세에 맞불을 놓자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이 총재의 ‘말발’이 먹혀들지 않는다. 상당수 중진들이 민주당의 예를 들며 “당 개혁 먼저, 전당대회 준비는 그뒤”라고 반발한다. 이미 대권후보 경선 출마를 선언한 박근혜 부총재는 “상대방이 쇄신하고 있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변화없이 집권은 힘들다”고 수위를 계속 높이고 있다. 이 총재의 다른 한 측근은 “늦어도 지난해 말까지는 국가혁신위가 그럴듯한 결과를 내놓았어야 했다”면서 “너무 뜸만 들이다 화를 자초했다”고 말했다.

대권 줄께 당권 다오

늦었다고 무작정 손놓고 있을 수 없는 일. 대응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측근들 내부의 상황분석부터 엇갈린다. 다수는 최근 사태를 스치는 바람으로 깎아내린다. 당장 국민참여경선제의 파괴력을 수준 이하로 예상한다. “선거인단 매수사건 등 흠집이 나면서 바람은 빠질 것이고, 잘돼도 누구나 예상하는 이인제 상임고문이 당선될 게 뻔한 만큼 별볼일 없다”고 주장한다. 당내 도전세력도 이회창 이후를 선점하려는 ‘2인자 다툼’이나 ‘YS집권 초반 사정정국의 악몽을 기억하는 TK쪽 보수성향 의원들의 보험성 투쟁’으로 진단한다. 반면 몇몇 참모들은 적색경보를 울린다. 이들은 국민참여경선제가 언론의 관심을 독점하고, 노무현·정동영 등 뜻밖의 주자가 부상할 경우 싸움이 힘겨워진다고 주장한다. 특히 내부 도전세력들이 이런 분위기를 틈타 이 총재를 물어뜯으면 발목이 잡힐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적색경보를 울리는 쪽도 묘책이 없기는 마찬가지. 불만세력이 공통으로 요구하는 당권·대권 분리론의 핵심은 이 총재의 공천권 포기다. 당권을 포기하는 순간 의원들의 충성을 담보할 수단도 함께 잃는다. 이 총재의 장악력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권·대권 분리를 결심해도 누구에게 당권을 줘야 할지 고민이다. 김덕룡, 박근혜, 강재섭, 최병렬…. 노리는 사람은 많고 자리는 하나뿐. 처음부터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선택이다. 자칫 내분만 부추길 수 있다.

가장 위협적인 박근혜 부총재가 뭘 원하는지 분명치 않다는 점도 고민이다. 이 총재쪽 한 중진의원은 “이 총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 당내 2인자보다는 탈당수순을 밟는 것 같은 느낌”이라며 “요구를 알아야 담판하든 설득하든 할 게 아니냐”고 하소연했다. 탈당을 위한 명분쌓기라면 백약이 무효라는 고백이다.

97년의 악몽이 스멀스멀…

반란세력은 민주적인 경선을 요구하지만 이 또한 고민이다. 이 총재가 이미 당 안에서 대세를 장악한 상황에서 민주당처럼 전국을 돌며 경선을 치르기는 마뜩찮다. 돈만 쏟아붓고 ‘정치쇼’라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딱히 거부할 명분도 없다. 이래저래 고민이다.

이 총재는 당분간 국가혁신위 워크숍과 의원 및 지구당위원장 연찬회를 열어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반대세력을 달랠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현재 대통령 당선 뒤 적절한 시기에 당권·대권 분리를 약속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또 대선운동 동안 총재직을 이양하고 현재 1만2천명 수준인 대의원을 최대 4만명까지 늘려 경선과정서 불공정 시비를 최소화한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 불만세력을 달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5년을 절치부심해 다시 대권고지 앞에 선 이 총재. 그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다 된 밥’을 망쳤던 97년 대선의 악몽을 되풀이할 것인가. 절반은 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흥행성적표에 달렸다. 그 나머지는 고스란히 이 총재 몫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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