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그들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싸움을 전투가 아닌 축제로 규정하는 청년들. 즐겁게 노래하며 가늘고 긴 싸움을 이어나가겠다고 한다. 그 거리엔 교복 입고 피켓을 든 중고생들도 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거리에 쏟아낸다. 훼손된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청춘들은 광장 다음을 고민했다. “11월12일 축제의 밤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이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상상할 수 없다면 정말 슬프고 허탈할 거예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1월7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 모인 청년 100여 명에게 청년 허승규씨가 질문을 던졌다.
이날 정치 스타트업 ‘와글’이 주최한 ‘국민의 뜻이 우주의 뜻이다-뭐라도 하고 싶은 청년들의 시국 돌파 대잔치’(이하 ‘국민의 뜻’)에 모인 청년들은 굵고 짧은 싸움보다 가늘고 긴 싸움을 이어나가기로 다짐했다.
2017, 희망과 약속의 구호다가올 2017년은 희망을 품은 청년들의 구호가 되었다. “2017년은 87년 민주화항쟁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의 실천강령을 상상해봤습니다.” 허씨가 2017년을 주제로 4행시를 만들어서 외쳤다. 사람들이 환호하며 운을 띄웠다.
“이! 이런 기회를 자주 갖자. 이기자! 일단 여러분 자주 만나야 합니다. 직장 동료, 아버지랑 대화를 나누는 거예요. 집회 나가서 경찰 방패 뜯는 것보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진짜 싸움입니다.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거예요.
공! 공동체 활동을 해야 합니다. 혼자서 세상 못 바꿉니다. 페이스북에서 욕하지 말고 제발. 커뮤니티를 만들어봅시다. 정치의 기본은 조직!
일! 1년만 해봅시다. 꾸준히 해봅시다. 집회 한두 번 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려가면 그건 이상한 나라인 겁니다.
칠! 럭키 세븐, 오늘이 7일입니다. 오늘부터 해봅시다!”
이날 모인 청년들은 곳곳에 블랙홀이 도사리는 현실에서 혼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고민하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의 시위 △여혐(여성혐오) 없이 시국 비판 △정치인이 아닌 우리도 하는 정치 △또 다른 박근혜와 최순실을 맞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할 일 △87년 체제와 박근혜 이후의 대안 체제 △분노의 해석과 진상 규명 △퇴진과 개헌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민주주의 등의 주제를 두고 토론했다.
민주화 이후 세대인 청년들은, 앞으로 우리가 해나갈 싸움을 전투가 아닌 축제로 규정했다. 어차피 오래갈 싸움이라면 지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합류하도록 끌어들이는 힘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의 집회와 시위를 고민한 명왕성팀은 ‘병맛 집회’ ‘재밌는 집회’를 제안했다. 주제를 제안한 최원영씨는 이렇게 제안했다.
“여러분도 많이 느끼시겠지만 집회에 가면 좀 단조롭지 않아요? 뭔가 보태고 싶어 가긴 하지만, 주변에 ‘나 민중총궐기 정말 가고 싶어. 집회 간다고? 아, 부럽다.’ 이런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집회도 축제처럼 즐겁게 할 수 없을까요? 스페인 토마토 축제, 브라질 삼바 축제처럼 대한민국 비리 축제, 이런 것? 최순실이 지금 킹왕짱이라 모든 뉴스를 내리 눌러서 그렇지 우리가 따라가야 할 엄청 큰 뉴스가 많아요. 즐기는 사람을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공자의 말도 있잖아요. 싸움도 즐기면서 했으면 좋겠어요.”
민중가요 대신 대중가요 부르며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낯선 청년들을 위해 ‘2016년 11월12일 아무개씨를 위한 광화문 안내서’를 만든 청년도 있었다. 문지혜씨는 주변 친구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만든 안내서를 ‘국민의 뜻’ 오픈 채팅방에 공개했다. 망설이지 말고 나와서 함께하자는 안내서는 친절하고 섬세하다. 두툼한 외투와 혈액순환이 잘되는 바지, 휴대전화 보조배터리를 챙기라는 당부가 깨알 같다.
안내서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통령 퇴진을 언급하는 단어는 단 한 글자도 없다. 여기서 말하는 구호에 가까운 것은 “모두를 위한 약속- 다치지 않기, 싸우지 않기, 쓰레기 꼭 치우기, 이후에도 지속적인 관심 갖기”다. 이런 평범한 시민 윤리가 이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저들과 싸우는 유일한 방도라고 말하는 것 같다.
행진할 때 함께 듣기 좋은 노래로 추천하는 배경음악도 집회 현장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민중가요가 아닌 청년들에게 친근한 곡이다. 그가 추천하는 행진 노래는 영화 사운드트랙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윤상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SES의 , 이승환의 , 이효리의 , 전인권·이효리·이승환 등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11월11일 발표하고 무료 배포한 등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우리에게 준 유일한 희망이라면, 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주목받은 ‘순실길’을 제안한 박상재(27), 유선미(26), 민보연(29)씨는 과 만난 11월9일 서울 서초동의 한 카페에 모여 하루 종일 토론하고 있었다.
이런 웅성거림이 사람들을 광장으로 밀어낸다. 순실길은 집회의 일상적 참여를 유도한다. 서울 시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7개 길(건국대 앞, 청량리, 노원역, 대학로, 신촌역, 안국역, 강남역)을 중심으로 시위에 낯선 사람들을 위한 안내를 자처한다. 각 장소에서 이번 사태를 알리는 발언을 하고, 대통령 얼굴이 그려진 스탬프를 찍어주며 시민들의 관심을 독려한다. 데이트를 하다, 산책을 하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말하는 곳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보연씨는 “세월호 이전에는 대통령이 누군지도 몰랐다”고 자신을 소개했고, 상재씨는 “비즈니스를 통한 사회 혁신에 관심이 더 많다”고 말했다. 선미씨는 “같이 나가 외칠 수는 있지만, 정치에 관심 있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이번 사안만큼은 “너무 시급해서 나와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청년 9명이 더 모여 총 12명의 청년이 순실길을 짰다.
“긍께 좀 내려와요!”
청년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거리로 쏟아져나오는 동안 온라인 공간 또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독려’하며 여전히 와글댔다. 이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hankyoreh21)에서 공모한 시민들의 구호 모집에 많은 누리꾼이 아이디어를 남겼다.
“하야도 과분하다! 그저 국민 앞에 엎드리소서.”(이종필) “긍께 좀 내려와요!”(이동훈) “퇴진하라 하니 퇴근하네. 그네, 말길을 못 알아듣네, 답답하네, 환장하네.”(이태기) “박근혜 퇴진은 대박이다.”(황인철) “이름하야 최순실 게이트로 퇴근혜.”(송경은) “퇴그네.”(김나윤) “그러려고 대통령 했나.”(윤은영) “부끄럽다 퇴진하라.”(이재원)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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