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SBS)의 결말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었다.
방송된 버전에서, 참사를 일으킨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하고 유통한 SG케미컬의 함태섭 대표는, 모든 것이 밝혀진 뒤에도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증거까지 준비해서, 거기다 시청자들을 향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SG그룹의 신뢰도와 저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려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현실이 곧 드라마거기서 정작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사람은, 이 사건으로 인해 아이를 유괴당하고 강제로 방송에 서야 했던 여배우 정혜인이다.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밝히려고 했던 남편을 말렸다는, 피해자들의 아픔에 무관심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방송팀이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는 방송을 시작하고, 이 방송을 지켜보는 시청자와 서울의 야경을 비추면서 드라마는 끝난다.
나는 가해자가 결코 책임지거나 사과하지 않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시청자에게 바통을 넘긴다는 심정으로 이 결말을 썼다. 내가 살펴본 반응으로 볼 때, 사람들이 이 결말을 좋아하는 이유와 싫어하는 이유는 같았다. ‘너무 현실적’이라는 것이었다.
써두기만 했던 다른 버전은 시청자가 현실에서 느끼지 못하는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왔다. 가습기살균제 문제를 밝히는 방송팀은 함태섭 대표가 폭주해 죄를 자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결국 그는 자기 입으로 잘못을 말한다.
그러나 이 결말 역시, 까발리고 응징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었지, 마땅히 있어야 할 결말은 아니다. 그는 뻔뻔스레 자신과 회사의 죄를 합리화하고, 애매한 말로 사과한다. 그의 자백이 증거로 쓰여 처벌 가능성이야 열리겠지만, 앞으로 그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내가 쓰지 못한 결말이 하나 더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혹은 개인의 각성에 의해 자발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정당한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결말. 그건 아무리 이 드라마가 허구라고 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슴이 덜컹한다. 말을 바꾸자면 불가능한 꿈 같았다고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청문회의 비극드라마가 종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문회가 열린다고 했다. 나는 수첩에 날짜를 메모했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본 사람들은, 순간의 다짐이라도 해준 고마운 사람들은, 이걸 챙겨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잊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자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자고 다짐해줬던 사람들은. 국민과 소비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걸 청문회를 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 이 사건에 대해 자세히 몰랐던 사람들은 청문회를 보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복잡한 정보를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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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계해주는 방송사가 없었다. 국회방송을 보거나 국회의사중계시스템 홈페이지를 통해 웹으로 봐야 했다. 원래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대하는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미디어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역할 중 하나가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이라고 할 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중요한 문제라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 때까지 꾸준히 다뤄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데도.
현재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접수된 피해 신고자 인원만 8월31일 기준 최종 집계까지 4486명, 이 가운데 사망자 919명. 대형 참사다. 잠재적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잠잠한 미디어의 태도는 이에 대한 청문회가 올림픽이나 연예인의 스캔들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어쨌든 청문회를 봤다. 레킷벤키저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핵심 증인들이 거의 다 참석하지 않았다. 위로는 하되 사과는 하지 않았다. 기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관여한 부분이 아니라고 했다.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다시 알아보겠다고 했다.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 놀랍지도 않았다. 예상이 가능했던 답변이다.
드라마 를 통해 나는 어렴풋한 문제 제기만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 책임을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 최근 몇 년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이런 구조가 쉽사리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그래도 바꾸기 위해, 더디더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이야기를, 간신히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실패를 하면 책임을 져야 하죠”8월29일 청문회 초반에,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은 아타 샤프달 옥시코리아 대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옥시코리아는 7월31일 1인당 최고 10억을 배상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런 일이 만약 영국에서 일어났다면, 그러면 매출액의 10%에 해당하는 1조8천억원의 벌금을 내야 하고, 만약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1명당 70억에서 100억원, 총액으로 최소 1조원 정도 보상해야 됩니다. 레킷벤키저는 피해자들을 보상에서도 차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문제 때문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사과하게 하는 방법은 단순히 개인적 각성이나 기업 윤리에 맡길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레킷벤키저가 피해자들을 보상에서 차별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해야 하는’ 제도, 즉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나 기업살인죄 같은 제도가 없는 것이, 이들이 사과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 돈을 효율적으로 벌기 위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기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돈’으로 처벌해야 애초에 사건을 방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은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적어도 책임을 지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내가 새삼스레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가해자가 제대로 책임지고 피해자가 제대로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제도를 제대로 구축해놓는 것밖에는 없다고. 우리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제도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으며 그것을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돈보다 생명과 인권이 더 가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현재 누구도 그것을 믿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정부 기관 관련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다. 계속해서 지켜볼 생각이다. 8월31일은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지 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더딘 일정에 아직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 수까지 헤아려 촛불을 켰다. 책임을 회피하는 답변들, 참석하지 않는 증인들, 방송 중계되지 않은 청문회. 이를 지켜보면서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앞서 나는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에 대해 불가능한 꿈이라는 말을 썼다. 내가 쓰지 못했던 장면이 나온 드라마가 하나 있다. 에런 소킨이 대본을 쓴 시즌1에는 전반적으로 9·11 테러에 대한 이야기가 깔려 있다. 시청률을 의식하던 앵커 윌 매커보이는 올바른 뉴스 프로그램을 새로 시작하면서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대테러위원회 위원장이던 리처드 클라크의 2004년 3월24일 의회 청문회 사과 연설을 인용한다.
“(이 청문회가) 왜 9·11 비극이 발생했는지, 어떻게 재발을 막을 수 있는지보다 나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환영합니다. 또한 이번 청문회를 통해 9·11 테러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린 분들게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분들과 TV를 보시는 시청자 여러분, 저희 정부가 국민을 실망시켰습니다. 국민을 지켜야 하는 저희가 실패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어지는 윌 매커보이의 말. “미국인들은 저 순간을 사랑했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성인은 자신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죠.”
아직은 불가능한 장면일지라도나는 저런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지금은 불가능한 꿈에 가깝다는 것을 재확인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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