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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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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에 뺨맞고 여성한테 화풀이

강남역 사건에서도 여성혐오 발언과 퍼포먼스 일삼는 ‘일베’ 등 온라인 여성혐오의 내적 논리
등록 2016-06-01 15:07 수정 2020-05-02 04:28
서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벌어진 사회적 반응은 ‘혐오’ 문제의 현재성을 묻는다. 여성단체들은 추모 참여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공동 대응하겠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서울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벌어진 사회적 반응은 ‘혐오’ 문제의 현재성을 묻는다. 여성단체들은 추모 참여자에 대한 인권침해에 공동 대응하겠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김정효 기자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반응들 역시 별도의 분석이 필요하다.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유저 몇몇이 사건 현장에 나와 추모객들과 충돌하면서 다시 일베가 언론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살인사건 가해자가 평소 일베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지금 여성혐오에 분노하는 여성 중에서 일베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온라인에서 여성혐오 담론을 주도해온 커뮤니티가 바로 일베였기 때문이다. 사태는 복합적이다. 예전부터 존재하던 전통적 여성혐오 위에 일베류 여성혐오까지 ‘얹어지면서’ 여성들의 분노가 임계점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때 이번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온라인 극우·극단주의 현상을 관찰하고 글을 써오면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이것이다. “일베 말이에요, 그 미친놈들은 도대체 왜 그런답니까?” 일베에 대한 ‘보통 사람’의 감각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이 ‘미친놈’이며 ‘루저’라는 것. 물론 그들은 ‘미친놈’이며 ‘루저’일 수 있다. 그런데 죽 지켜봐온 결과 이들은 결코 ‘미친놈’이 아니며 전부 ‘루저’인 것도 아니다. 이들은 이른바 ‘확신범’이며 나름의 내적 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 논리를 우리가 굳이 분석하고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무시하거나 때려잡아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들의 논리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들 역시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증상’이며, 무엇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이들의 혐오담론이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일베의 혐오 논리는 일베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덜 극단적인 형태로 순화돼 온 사회에 퍼져 있다.

‘김치녀’의 기원

일베는 툭하면 ‘팩트’를 내세운다. 어떨 때는 기자들보다 팩트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팩트주의’ 반대편에는 ‘감성팔이’ ‘떼쓰기’가 있다. 일베는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감정에 호소하거나 억지를 쓰는 게 ‘진보’와 ‘꼴페미’의 특기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일베야말로 팩트 날조와 왜곡의 명수라는 점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단어가 그렇다. 많은 여성들이 이 말을 일베의 대표적 여성혐오어로 꼽으며 비판했다. 그러자 일베는 이 말이 원래 ‘김치맨’이라는 말에서 비롯했고 한국 여성들이 외국 남성에 빗대 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데 대한 저항 내지 반박으로 만들어진 말이라고 강변했다. 이른바 ‘김치녀 네이트 판 기원설’이다.

2011년 포털 사이트 네이트 판 게시판에서 어느 여성이 잘생긴 백인 남성 사진을 올리고 그 밑에 이런 글을 적었다. “길거리에 흔한 유럽 남자. 내 옆에는 왜 김치맨인가.” 어떤 남자가 이를 패러디해 “길거리에 흔한 해외 여자. 난 왜 김치녀인가”라는 게시물을 남겼고, 그것이 ‘김치녀’라는 말이 탄생하게 된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 ‘김치녀’의 기원은 온라인에서 정설처럼 유통되고 있다. 과연 ‘팩트’일까? 그렇지 않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고민 Q&A’ 난에 올라온 글을 한번 보자. ‘자기 주제를 알고 나댔으면 좋겠어요’라는 글에서 작성자 ‘Rescue’는 친구의 애인이 초면에 자신의 연봉, 차종, 자택 평수를 물었던 일에 대한 불쾌감을 토로한다. 이에 대해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은 ‘친정오라버니’라는 아이디가 남긴 글이다. “그래서 된장녀, 김치녀 소리가 나오고, 말이 생긴 것입니다. (중략) 돈에 환장한 여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자들이 그런 여자를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질문은 2009년 7월9일 아침 6시56분에 올라왔고 답변은 같은 날 아침 8시54분에 올라왔다. 어찌된 일인가. ‘정설’에 따르면 ‘김치녀’라는 단어는 2011년에 만들어졌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사례는 이미 2009년에 ‘김치녀’라는 말이 지금 통용되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듯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일베가 주장한 ‘김치녀의 기원’이 날조된 것임이 드러난다. 찾아보면 이런 사례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왜 날조하고 과장하면서까지 여성혐오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온라인 여혐의 ‘퍼스트 임팩트’
수년간 ‘일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셌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다. 혐오표현은 여전히 공공연하고, 혐오를 받아들이는 기준은 낮아졌다. 온라인에 머물던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사건’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고 있다.

수년간 ‘일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거셌지만, 별로 달라진 건 없다. 혐오표현은 여전히 공공연하고, 혐오를 받아들이는 기준은 낮아졌다. 온라인에 머물던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활동을 시작했지만 ’사건’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고 있다.

여성혐오 현상이 남녀 성비 불균형에서 기인한다는 식의 분석이 최근 나온 적이 있다. 시사주간지 의 기사 ‘여자들을 혐오한 남자들의 탄생’이 대표적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83년부터 자연성비를 추월해 남자가 많이 태어났고, 1990년에는 성비가 무려 116.5까지 치솟는다(여아가 ‘감별’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사는 제법 소상히 설명하고 있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런 이야기다. ‘저 시기에 태어난 남성들은 연애시장, 결혼시장에서 짝을 찾지 못할 확률이 높으며 그들 중 상당수가 오늘날 여성혐오자가 되었다.’ 적나라한 인구학적 설명이다. 이 주장은 타당할까? 만약 1983년 ‘이전’ 출생자들이 지금과 유사한 형태의 여혐 성향을 보였을 경우, 가설은 즉시 붕괴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바로 2001년 ‘월장 사태’다. 여자 후배에게 음담패설을 하고 술을 따르게 하는 등 대학 내 군사문화를 비판하는 칼럼이 부산대학교 여성주의 웹진 에 실렸는데, 글이 알려지자 전국 예비역들의 온라인 테러가 시작됐다. 물론 예비역이라고 모두 여성혐오 언설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라고 해도 그 수는 어마어마했다.

을 테러하던 복학생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출생한 남성이었다. 이들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욕설, 성폭행 협박, 성희롱은 기본이었고 전화를 걸어 폰섹스를 요구하거나 웹진 편집부원의 신상정보를 성인 사이트에 올렸다. 당시 치열하게 활동하던 페미니스트들과 소수의 남성 진보주의자 연합은 어마어마한 수의 예비역 남성들에 맞서 격렬한 ‘키보드 배틀’을 벌이기도 했다. 일베 여성혐오 담론의 원형이라 할 만한 주장이 그때 대부분 등장했다는 점에서, (온라인 여성혐오의) ‘퍼스트 임팩트’라 부를 만한 사건이다.

국민개병제가 시작된 이후 젊은 예비역들은 늘 존재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은 개개인이었다. 온라인 집단 정체성으로서 ‘성난 젊은 예비역’(The Angry Young Resevists)은 2000년대 이후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지역과 계급을 뛰어넘어 단지 젠더 이슈만으로 순식간에 결집하는 남성 코어 집단의 탄생이다. 취업 경쟁 등 사회적 압력이 급격히 고조되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라는 시점, 그리고 군 가산점제 위헌판결 직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은 단지 우연의 일치라 보기 어렵다.

‘마초-가부장’에서 ‘피해자-소비자’로

일베의 혐오담론을 세 종류로 나누면 크게 여성혐오, 호남혐오, 진보혐오다. 이 중 호남혐오와 진보혐오는 극우 성향 기성세대가 오래전부터 확대재생산해온 이데올로기다. 호남혐오와 진보혐오가 기성세대에서 청년세대로 확산됐다면(여기에 국가정보원이 적잖은 역할을 했을 게다), 여성혐오 논리는 청년세대로부터 점점 나이 든 세대로 확산됐다고 할 수 있다.

여성혐오는 한마디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사고방식’이다. 이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그러나 양상이 좀 달라졌다. 과거 여성혐오의 주체는 ‘마초-가부장’이었다.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하므로, 여성은 남성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남성이 여성과 어떤 분야에서건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쪽팔린 일’로 치부됐다.


‘일베’는 국가와 자본을 향해 항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상대가 너무 흉포하고 강대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 여성혐오’는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지적 능력이나 업무 능력을 실제 증명해 보임으로써 ‘마초-가부장’적 인식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해졌다. 심지어 요즘 들어서는 여자 어린이의 학업성취도가 남자 어린이보다 월등히 앞서면서 남자 어린이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될 정도다.

지금의 온라인 여성혐오는 전통적 여성혐오에서와 달리 여혐의 주체가 스스로를 ‘피해자’로 설정한다. 정확히 표현하면 ‘피해자-소비자’다. 그들은 ‘지불한 만큼 대우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내면화한 주체다. 이들의 뇌 속에서 여성은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덜 지불하는 존재’다. 남자가 군대에 간 시간 동안 여자들은 취업 준비를 해서 경쟁 우위에 선다. “그런데 국가는 남자들의 억울함을 알아주기는커녕 각종 여성 우대 정책만 늘리고 있다. 따라서 나의 혐오는 지극히 정당하다!”

‘피해자-소비자’로서의 억울함을 십분 이해한다 치자. 언뜻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점은 왜 그 억울함이 여성 등을 향한 공격으로 표출되는가라는 것이다. 이건 마치 식당에서 같은 돈을 내고 옆 테이블 손님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사람이 식당 주인에게 항의하는 대신, 옆 테이블 손님을 포크와 나이프로 마구 찌르는 광경 같다.

체제 순응 정당화하는 혐오

일베는 식당 주인에게, 그러니까 국가와 자본에 항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 상대가 너무 흉포하고 강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가와 자본이 자신의 능력과 자격을 인준해주는 최종 심판관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의 ‘혐오’는 체제에 대한 완전한 굴종과 체념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베가 강남역에서 천연덕스레 혐오발언을 일삼으며 ‘퍼포먼스’를 벌일 수 있는 진짜 이유다.

* 참고 문헌
박권일, ‘공백을 들여다보는 어떤 방식: 넷우익이라는 보편증상’, (2014)
박권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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