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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 살균제? 농약용이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들의 고군분투… 진정한 사과 없는 옥시, 독극물을 덴마크산 원료라 광고했던 1인 기업, 뒤늦은 수습 나선 정치권 모두 공범
등록 2016-05-18 06:11 수정 2020-05-02 19:28
지난 4월28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 등이 ‘옥시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하며 옥시 제품을 발로 밟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지난 4월28일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 등이 ‘옥시 제품 불매운동’을 선언하며 옥시 제품을 발로 밟고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검찰은 왜 영국과 덴마크에 수사관을 파견하지 않죠? 엔지오(NGO)와 피해자들이 직접 발로 뛰어다닌 결과,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는 검찰이 해야 할 차례입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조금 지쳐 있었다. 5월12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에서 열린 기자회견. 가습기 살균제 ‘세퓨’의 원료물질을 공급했다고 알려진 덴마크 회사를 현지에서 조사한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였다.

최 소장은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2009년 아들을 잃은 김덕종씨와 함께 5월4~11일 영국과 덴마크를 항의방문하고 돌아왔다. 최 소장은 5월11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연속 사흘 동안 기자회견 강행군을 이어갔다. 11일에는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귀국 보고 기자회견을 열어 옥시레킷벤키저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를 비판했고, 13일에도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2013년 정부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윤성규 환경부 장관의 사퇴를 촉구했다.

“중국에서 수입했을 것”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지금과 같은 대형 사회 의제로 만들어낸 ‘숨은 조력자’는 환경보건시민센터다. 정부가 책임지지 않은 피해 사례 신고와 피해자 조사 등을 도맡았다. 2010년 환경보건시민센터를 설립한 이후 요즘이 가장 정신없이 바쁘다. 센터 상근자는 최예용 소장과 임흥규 팀장 단 2명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면서, 하루에도 수백 통씩 기자들의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이들에게 쏟아진다.

이번 항의방문 때 최 소장은 ‘수사’까지 자청했다. 최 소장은 덴마크에 가서 ‘세퓨’의 원료물질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던 회사를 수소문했다. 회사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구글맵에서 주소만 입력하면 됐다. 세퓨는 오아무개 버터플라이이펙트 대표가 2008년 덴마크에서 수입한 친환경 원료를 사용한다고 홍보해 인터넷 카페 등에서 공동구매 방식 등으로 많이 팔렸던 가습기 살균제다. 2008년 5월~2011년 11월 판매된 세퓨 때문에 숨진 피해자는 현재까지 확인된 수만 14명이다.

그런데 ‘케톡스’라는 회사를 운영했던 프레데 담고르 대표는 전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케톡스는 2년 전 파산해 회사 문을 닫은 상태다. 최 소장은 5월8일 만난 담고르 대표와의 대화가 담긴 동영상을 12일 공개했다.


“한국에 PGH 샘플을 보낸 적 있나?” (최예용 소장)
“2007년 40ℓ가 채 안 되는 적은 양만 농업용 살균제로 보낸 적이 있다.” (프레데 담고르 대표)
“당신이 보낸 샘플을 갖고 세퓨라는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팔아, 14명이 숨졌다. 어떻게 된 건가?” (최예용 소장)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덴마크가 아니라 중국에서 PHMG를 수입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국 생산업자한테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했다’고 들었다.” (프레데 담고르 대표)

지금까지 정부 조사로 드러났던 것과는 다른 사실이다.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됐다고 알려진 독성 화학물질은 크게 3종류다. ‘옥시싹싹’ 등에 주로 쓰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세퓨의 주원료인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 그리고 애경산업 ‘가습기메이트’의 주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과 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이다.

CMIT와 MIT는 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실험 때마다 폐섬유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현재 검찰 수사 대상에서는 제외돼 있다. 하지만 인체 내 면역세포를 파괴하는 식으로 폐 손상을 일으킨다는 연구논문이 보고되는 등 PHMG, PGH와 마찬가지로 위험한 독성물질이다. 현재로선 CMIT·MIT 계열 피해자들은 피해를 인정받을 수 없다.

아무 제어장치도 없었다

세퓨 피해자들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오아무개가 대표로 있었던 1인 제조사에서 만든 제품인데,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보상받을 길이 없다. 오 대표는 여러 논문 정보 등을 짜깁기해 콩나물 재배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은 “오 대표가 2008년 제조 초기에는 덴마크에서 수입한 원료를 쓰다가 PGH 대량 수입이 어려워지자 2010년부터 PHMG를 임의로 섞어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었다고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살균제 원료 수입, 제품 제조 판매 과정에서 아무런 제어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세퓨는 오히려 ‘유럽연합 승인을 받은 최고급 친환경 살균제’라는 홍보 문구를 달고 버젓이 친환경 매장에서 팔렸다. 제품 뒷면에는 ‘흡입시에도 안전하다’는 문구까지 쓰여 있었다.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 등으로 오 대표를 5월13일 구속했다.

강찬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대표의 딸 나래도 세퓨 피해자다. 9살 나래는 폐 한쪽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강 대표는 12일 “더 이상 정부 발표 내용을 못 믿겠다. 덴마크에 수사관을 파견하고, 피해자 가족도 참관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아들을 잃은 김덕종씨는 5월5일 영국 런던에서 옥시레킷벤키저의 모회사인 레킷벤키저 최고경영자(CEO) 라케시 카푸르 대표를 만나자마자 아들 얼굴이 담긴 사진을 내밀었다. 김씨 아들 승준이는 2004년 응급실에 실려간 지 나흘 만에 폐질환으로 숨졌다. 36개월 아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뒤 김씨는 팔에 ‘My son seungjun’(나의 아들 승준)이라는 문신을 새겼다. 하지만 카푸르 대표는 김씨가 건넨 사진을 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그대로 내려놨다.

최예용 소장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카푸르 대표는 ‘유감이다’ ‘개인적으로 미안하다’라는 표현을 써서 말했고, 기업 CEO로서 공식 사과는 하지 않았다고 최 소장은 설명했다. 이날 열린 주주총회장에서도 ‘사과’ 언급은 없었다고 한다. 환경보건시민센터는 해외 환경운동단체들과 손잡고 전세계적인 ‘레킷벤키저 불매운동’을 벌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너무 늦은 사과

뒤늦게 검찰과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피해자와 가족들이 서 있는 자리는 그대로다. 국회에서 피해자 구제 등 관련 법안 처리가 무산됐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강찬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 모임’ 대표는 “옥시가 50억원 기부금 내놨다고 생색내면서 뒤늦은 사과를 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제조사 사장들이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한다. 정부 역시 그동안 책임 방기했던 것을 사과하고 국회는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 제정, 국정조사, 국회청문회 등을 이제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  일지


1994년 11월  SK케미칼(옛 유공), 가습기 살균제 최초 개발·판매 시작
2001년  ‘옥시싹싹’ 판매 시작
2006년  소아 급성 간질성폐렴 유행
              대한소아과학회, 관련 논문 발표(2008~2009년)
2011년 4월  중증폐렴 임산부 환자 입원 증가, 질병관리본부 조사
2011년 8월  보건복지부 역학조사 결과 발표, 제품 사용 자제 권고
2012년 8월  피해자 1차 형사고발(2013년 기소중지 결정)
2015년 5월  옥시 영국 본사 항의방문
2016년 1월  서울중앙지검, 가습기 살균제 특별수사팀 구성
2016년 5월  옥시 영국 본사 2차 항의방문
*자료: 환경보건시민센터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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