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복벽주의자들의 “아 옛날이여”

1989년 국정교과서 헌법소원 냈던 남기정 교사 “어떻게 역사에 중립적인 게 있을 수 있나”
등록 2015-10-20 21:35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정용일 기자

제사상 대 책상. 일인을 위한 제사상 대 만인을 위한 책상.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제사상에 제물이 또 하나 오르게 됐다. ‘2017년판 국정 국사 교과서’. 1974년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가 검정 체제에서 국정으로 바뀐 ‘유신 교과서’의 2판이다.

남기정(56) 서울 창덕여고 국어교사는 1974년 고교에 입학했다. 개학날 자신의 책상에 놓인 국사 교과서가 바로 ‘유신 교과서’였다. 그리고 15년 뒤 그는 헌법재판소에 국정교과서 제도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냈다. 교과서 국정화를 두고 헌재에서 위헌인지를 심리하고 결정한 유일한 사례다.

남 교사는 헌법소원을 내고 넉 달 뒤 전국교직원노동조합(당시 교원노조 추진위원회) 활동을 탄압한 노태우 정권에 의해 해직됐다가 5년 만에 복직하기도 했다. 10월15일 창덕여고에서 남 교사를 만났다. 그는 1989년 5월 헌법소원을 낼 당시의 국정교과서들이 ‘반민족적·반민중적·반통일적’이었다고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김지하·박노해 실은 교재 펴낸 뒤</font></font>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헌법이 개정되고 대통령 직선제가 이뤄졌지만 헌법소원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전국적으로 모임을 만들어서 자료나 정보를 교환하면 의미가 있겠다는 뜻에서 처음 등장한 게 ‘국어 교육을 위한 교사 모임’이었다. 당시 교사들 사이에 국정교과서가 문제 있다는 인식이 많았다. 지나치게 분단을 고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고, 반노동자 정서도 들어 있었다. 문학작품의 경우 민족문학을 편협하게 바라보고 분단에 비판적이거나 리얼리즘(사실주의)적인 것은 배제돼 있었다. 그래서 반민족적·반민중적·반통일적인 교과서라고 결론 내렸다. 여러 선생님들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수업 시간에 교과서를 대체할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를 포함해 몇몇 선생님들이 모여 집필해 출판했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김지하·박노해 시인의 시도 싣고 학생이 쓴 작품도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정부 쪽에서 내사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들리기에 나름대로 대비를 하다가 헌법소원을 통해 교과서 제도 자체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보자 해서 헌법소원을 냈다.”

정권에서 어떤 압박이 있었나.

“검찰이 국가보안법으로 엮으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사가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가서 당시 검찰총장 결재만을 남겨뒀다는 말도 있었다(당시 검찰총장은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실제로 기소가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내사를 하면서 캐보았는데 아무것도 안 나오니 접은 게 아닌가 싶다. 당시 교재를 집필한 교사들이 대학 시절 운동권이 전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전과가 없었다. 과거가 깨끗하니까 털어봐도 나올 게 없다고 본 거 아닌가 싶다.”

남 교사가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국어교사모임에서는 1989년에 책 2권을 펴냈다. 과 이다. 1988년 3월 창립한 국어교사모임은 이후 잇따라 조직된 여러 교과목 교사모임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규모도 1200명을 넘길 만큼 컸다. 이 때문에 정원식 문교부 장관은 관련 교사들을 징계하겠다고 부르댔다. 교원노조 추진위에서는 이에 맞서 정부에 공개질의서를 보내기도 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위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font></font>

당시 요구사항은 이러했다. “헌법에 명시된 교육의 전문성과 자주성, 정치적 중립성 수호를 위한 공청회 개최. 전체주의 체제의 산물인 국정교과서 제도 폐지와 대안 모색을 위해 교사들과 협력. 국정·검인정 교과서 제도의 비밀주의 철폐.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 폐지.” 현 정부가 밀어붙이는 국사 국정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과 놀랍게 일치하는 대목이다.

당시 교단 분위기는 어떠했나.

“거의 병영문화였다. 공문을 통해서 교사들의 복장까지 통제할 만큼 획일적이었다. 여름엔 넥타이를 안 매도 되고 와이셔츠는 흰빛으로 입으라는 식이었다. 지금의 국정교과서 추진도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국정이라고 하는 게 가르치는 사람의 전문성과 창의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창의성 없고 자주성 없으면 배우는 아이들도 그렇게 자랄 것 아닌가.”

헌법소원 결정이 1992년에 났다. 기각 결정을 받았는데.

“솔직히 말해서 기대를 거의 안 했다. 당시로서는 어찌됐든 간에 학교 현장의 분위기가 뜨거웠고 선생님들의 참여 열기가 상당히 고양됐다. 교과서 문제가 제도적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 돌아보니 교과서가 국정이냐 검정이냐가 상당히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일종의 대체 교재를 만들면서 조사·연구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선진국 사례들을 참조했다. 그 나라들에도 교과서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지만, 교과서 또한 여러 교재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더라. 그래서 교사 개인이 양심과 전문성에 따라 만들어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현실에서는 교사들의 업무가 너무 많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지향점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1989년 국정교과서의 내용은 끔찍했다. 무당 얘기가 나오고 거기서 민족정신을 찾으려는 식이었다. 순수예술주의적인 것들, 재미없고 한심한 작품이 많았다.”

1992년 헌재는 남 교사가 낸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문제의 국정교과서 제도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헌재 1기 재판관들은 결정문에서 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을 다섯 가지 들고 조목조목 비판했다.

1) 학생들의 창의력 개발이 활성화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저해되거나 둔화될 우려가 있다.

2) 상황 변화에 능동적·탄력적으로 대처하기 어렵고, 특히 교과서에 대하여 행정부가 필요 이상의 강력한 통제권과 감독권을 갖고 있어 고위 관료나 정치가들의 견해나 영향이 강하게 작용된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3)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이념과 모순되거나 역행하는 것이다.

4) 교사와 학생의 교재 선택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그 결과 교과용 도서의 개발이 지연되거나 침체될 우려가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교과서의 상징적 의미, 허위의식</font></font><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size="4"><i><font color="#991900">헌재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관한 한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이지, 국정교과서 제도 전체를 용인한 것이 아니었다. 헌재는 국정보다는 검인정, 검인정보다는 자유발행제가 헌법에 부합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font></i></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이를 바탕으로 헌재는 “교과용 도서의 국정제도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의 보장 규정에 비추어 위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제도가 교육이념과 교육현실에 비추어볼 때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제도냐 하는 문제는 별개의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관한 한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이지, 국정교과서 제도 전체를 용인한 것이 아니었다. 헌재는 국정보다는 검인정, 검인정보다는 자유발행제가 헌법에 부합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특히 지금 문제되고 있는 국사 교과서의 경우를 예로 들기도 했다. “국사의 경우 어떤 학설이 옳다고 확정할 수 없고 다양한 견해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것이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은 10월15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고등학교 학생한테는 사건과 사실의 정확성만 얘기해주면 되는 거고, 교과서에다 다양성을 어떻게 집어넣습니까? 그건 안 됩니다.” 헌재 판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위헌적 발언이다.

당시 헌재 재판관 9명 가운데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낸 변정수 재판관은 교과서 국정화 자체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초·중·고 교과서를 정부가 독점하는 것을 두고 “정부로 하여금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독점적으로 교화하여 청소년을 편협하고 보수적으로 의식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은 변 전 재판관을 만나기 위해 10월14일 서울 용산구 그의 자택을 찾았다. 올해 85살인 그는 기자와 만나 “법률책을 놓은 지 오래됐으며 건강도 안 좋아 머리가 잘 안 돌아간다”며 인터뷰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교육에서 교과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교과서가 우리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나쁘게 말하면 허위의식이다. 혈통의 순수성이랄까. 교과서도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사람들은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대부분 의심 없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역사에 중립적인 게 있을 수 있나. 있지도 않은 것을 마치 있는 것처럼 착시하게 만드는 게 교과서다.”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을까.

“대안 또는 대체 교과서를 쓴다면 그런 이데올로기를 깨는 내용이 들어가야 한다고 본다. 지금 나오는 교과서는 이런 면에서 많이 부족하다. 쟁점이 별로 없다. 어떤 문제를 주고 해결하는 능력만을 요구한다. 문제를 생산하는 능력은 필요하지 않게 되는 거다. 문제를 생산하는 주체는 따로 있다고 학생들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제일 두려워해야 한다. 문제를 상상하는 인문학적 능력을 키워주는 교과서가 있어야 한다.”

교과서를 아예 국정화하려는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나.

“교과서를 국정으로 돌리려는 사람들은 복벽주의자들이다(‘복벽’: 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 잃어버린 기득권을 되찾으려는 거다. 국정교과서 시절은 완전히 신디케이트(독점)되어 있었다. 삽화 하나도 마음대로 그려넣지 못했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거다. 유신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건데, 낙관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겠나. 권력이 역사를 장악하려고 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다 실패하지 않았나. 조선시대 연산군이 대표적이다. 권력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거다. 지금도 비슷하다. 이런 관점에서 교과서 문제에 접근하는 거다. 가당찮은 일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서비스업이 되어버린 교사</font></font>학교 현장의 분위기는 어떠한가.

“학생들은 관심 없는 것 같다. 사실 고등학교에서는 교과서가 어떠해야 하느냐 생각하기엔 너무 대학입시에 치우쳐 있다. 현실감이 없는 거다. 국정이든 검정이든 도긴개긴이다. 김영삼 정부 이후 교사가 서비스업이 돼버렸다. 정해진 카테고리 안에서 정해진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이다. 정말 기능적인 역할만 하게 된다. 1989년 헌법소원 낼 때만 해도 교사모임을 통해 이런 것 가르쳐보자 하고 사례 발표도 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은 오히려 그때보다 퇴보했다.”

1988년 7월28~29일 경기도 양평군 언론연수원에서 ‘교육과 출판’을 주제로 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스물아홉 청년이었던 남 교사는 주제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입시 위주의 교육현실 속에서 교과서는 ‘오류 없는 경전’으로서 교사와 학생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을 정치 이데올로기 통제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는 현행 국정교과서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27년 뒤 정권은 다시 ‘지배’를 획책하고 있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