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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아닌 나라, 도처가 최전선

종파 간 대리전이자 국제전인 시리아 내전 발발 4년5개월… 반군과 정부군이 밀려가고 오면 주민들에게 어김없이 보복공격, 인구 절반이 난민 전락, 지구촌 최악의 난민 사태
등록 2015-09-17 17:16 수정 2020-05-03 04:28
2014년 10월26일 터키의 국경도시 수루츠 변두리에서 84살 시리아 쿠르드족 난민 모하마드 하산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2014년 10월26일 터키의 국경도시 수루츠 변두리에서 84살 시리아 쿠르드족 난민 모하마드 하산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AP 연합뉴스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보자. 사건은 2010년 12월17일 한낮에 벌어졌다. 북아프리카 튀니지 중부 소도시 시디부지드에서다. 청과 노점상을 하며 여덟 식구를 먹여살리던 스물여섯 억척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가 제 몸을 불살랐다. 그날 아침 들이닥친 노점 단속반은 부아지지가 팔던 채소며 과일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저항하던 청년은 뭇매를 맞았다. 단속반은 가족의 목숨줄인 저울과 손수레마저 빼앗아갔다. 항의하러 달려간 시청사엔 들어가지도 못했다. 분을 참지 못한 청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게다.

우연에 가까운 격발 “의사 선생, 당신 차례야!”

무도한 권력에 대한 분노가 삽시간에 온 나라를 집어삼켰다. “우리 모두 부아지지다!” 성난 외침이 메아리로 울려퍼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사건은, 불과 며칠 새 정권의 목줄을 죄어왔다.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부아지지는 분신 18일 만인 2011년 1월4일 끝내 숨을 거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벤 알리의 독재가 무너진 것은 그로부터 꼭 10일 뒤다. ‘아랍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얼어붙었던 열사의 땅에 봄기운이 퍼졌다. 그해 1월25일 이집트 수도 카이로의 심장부 타흐리르 광장에서도 민주주의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철옹성만 같던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끝장내는 데는 단 18일이면 족했다. ‘왕 중의 왕’을 자임했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리비아가 그다음 차례였다. 2011년 2월15일 벵가지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카다피의 42년 철권통치를 뿌리부터 흔들었다.

카다피는 군홧발을 앞세웠다. 그해 2월이 가기 전 리비아 시민들은 국민과도위원회를 구성하고, 스스로 무장에 나섰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내전으로 번져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미국이 반군을 공중에서 지원했다. 결국 그해 8월23일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하면서, 카다피는 권좌에서 축출됐다. 그는 두 달 남짓 뒤인 그해 10월20일 북부 시르테에서 반군에 붙잡혀 무참히 살해됐다.

리비아에서 반정부 시위가 불을 뿜기 시작할 무렵, 시리아에서도 여론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페즈 아사드-바샤르 아사드 부자의 41년 세습독재를 피해 외국에 망명 중이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그해 2월3일 ‘분노의 날’이 선포됐다. 꽁꽁 언 민심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지만, 정세의 휘발성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격발은, 사실 우연에 가까웠다.

시리아 남서부 고대도시 다라의 빈민가인 발라드에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됐다. 위성방송을 통해 바깥세상 소식을 접한 10대 몇 명이 동네 학교 담벼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를 했다. “의사 선생, 다음은 당신 차례야!”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00년 7월 집권한 안과의사 출신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을 가리킨 게다. 헌병과 정보요원들이 동네로 몰려들었다. 하나둘, 아이들이 붙잡혀갔다. 구금된 아이들은 뭇매를 얻어맞고, 손톱을 뽑는 고문을 당했다. 붙들려간 아이가 15명으로 늘었다.

반군+사우디+미국 vs 아사드+헤즈볼라+시리아
2011년 3월25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바샤르 아사드 정부의 유혈 진압을 규탄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AP 연합뉴스

2011년 3월25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바샤르 아사드 정부의 유혈 진압을 규탄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AP 연합뉴스

그해 3월6일 부모들이 아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다라에서 시작된 시위는 빠르게 북쪽으로 번져갔다. 라타키아와 바니야스, 홈스와 하마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3월15일, ‘분노의 날’이 다시 선포됐다. 수도 다마스쿠스와 최대 도시 알레포에서도 마침내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썩은 권력은 총질로 맞섰다. 소용없었다. 사흘 뒤인 3월18일 금요성일은 ‘존엄의 날’로 불렸다. 더 많은 이들이 정권의 총탄에 스러졌다. 분노한 이들이, 너나없이 총을 들기 시작했다. 그해 7월29일 망명객과 군 이탈 장교를 중심으로 ‘자유시리아군’(FSA)이 결성됐다. ‘아랍의 봄’은, 그렇게 시리아에서 전쟁으로 번져갔다.

아사드의 시리아는, NATO의 맹폭에 쉽게 무너져내린 카다피의 리비아와 달랐다. 초기 기세를 올리던 반군 진영은 정부군의 반격에 이내 수세로 몰렸다. 이슬람 시아파의 분파인 소수 알라위 종파를 기반으로 한 아사드 정권은 인구의 60%가 넘는 수니파에 총구를 집중했다. 거센 민주화 요구를 종파 분쟁으로 변질시키려는 의도다. 알카에다를 비롯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내전에 가담하게 되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정부군의 패배를 원하지 않을 것이란 노회한 셈법이었다. 아사드의 계산은, 대체로 들어맞았다.

이윽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 국가가 공공연히 반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미국도 반군에 무기와 자금을 측면 지원했다. 그러는 동안 주변 각국에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이 시리아로 속속 집결했다. 한편 아사드의 군대는 같은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 정치단체 헤즈볼라가 거들었다. 지중해에 연한 시리아 서부 타르투스에 해군기지를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도 아사드 정권의 든든한 우군이 됐다. 시리아 내전은 그렇게 종파 간 대리전이자 국제전으로 진화했다.

참상의 극한에서, 잠시 희망의 싹이 엿보인 때도 있었다. 2013년 8월 다마스쿠스 외곽으로 로켓 포탄이 날아들었다. 탄두에는 사린 신경가스가 채워져 있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국제사회는 격앙했다. 미국과 유럽은 아사드 정권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러시아는 반군을 비난하고 나섰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군사 개입을 입에 올렸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줄타기를 하듯 아슬한 협상을 이어갔다. 교전은 잠시 주춤했다. 아사드 정권은 보유 화학무기 전량을 폐기하기로 합의했다. 이 일로 화학무기금지기구(OPCW)는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거기까지였다. 시리아에,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6월29일 이슬람국가, 칼리프 국가 선포
시리아 북부도시 락까를 행진하고 있는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대원들. AP 연합뉴스

시리아 북부도시 락까를 행진하고 있는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대원들. AP 연합뉴스

2014년 들어서면서, 전황은 또 한 번 뒤틀렸다. 이미 2013년 가을께부터 조짐을 보이던 반군 진영의 내분이 격렬한 전투로 번졌다. 특히 알카에다의 시리아 지부 격인 ‘누스라 전선’과 신생 조직인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가 정면으로 맞붙으면서, 전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 무렵부터 락까 등 시리아~이라크 국경 일대를 장악해 들어간 이슬람국가는 그해 6월29일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를 수장으로 한 칼리프 국가를 선포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인명 피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유엔이 집계한 자료를 보면, 개전 첫해인 2012년 3월까지만 해도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9천 명 남짓에 그쳤다. 하지만 그해 여름 교전 사태가 불을 뿜기 시작하면서 이듬해인 2013년 1월엔 사망자가 6만 명까지 늘었다. 이후 인명 피해 규모는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같은 해 7월엔 10만 명을 넘어섰고, 2014년 8월엔 19만1천여 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월드비전이 9월4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금까지 시리아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25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어린이가 1만2천 명을 넘는다. 줄잡아 100만 명가량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영구적인 장애를 겪게 됐다.


<i>유니셰프는 8월25일 “최근 몇 주 사이, 알레포의 물값이 3000%나 폭등했다”고 전했다. 한여름 알레포의 평균기온은 섭씨 40℃를 웃돈다. 식수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오염된 물이라도 찾게 된다. </i>

전쟁이 길어지면서, 시리아인의 삶이 나락으로 곤두박질친 것은 당연했다. 유엔 인도주의업무지원국(OHCA)이 펴낸 자료를 보면, 지난 4년여의 전쟁으로 시리아의 ‘인도적 상황’은 40년 이상 후퇴한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수명은 13년가량 줄었고, 취학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경제 규모도 내전 이전에 견줘 40% 이상 줄었다. 인구 4명 가운데 3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현재 시리아 내부에서 인도적 지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는 모두 1220만 명, 이 가운데 약 560만 명이 어린이다.

시리아 내부의 극한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가 있다. 유니세프는 지난 8월25일 내놓은 자료에서 “최근 몇 주 사이, 알레포의 물값이 3천%나 폭등했다”고 전했다. 정부군도 반군도, 상대 진영의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술의 하나로 툭하면 물 공급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유니세프는 “올 들어 알레포 일대에서만 모두 18차례나 물 공급로가 끊겼다. 이로 인해 지역에 따라 짧게는 17일에서 길게는 한 달이 넘도록 식수가 공급되지 못했다”고 전했다.

한여름 알레포의 평균기온은 섭씨 40℃를 웃돈다. 식수를 구하지 못한 주민들은 오염된 물이라도 찾게 된다. 주민 절대다수가 설사와 복통은 물론 장티푸스와 간염 등의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는 얘기다. 유니세프는 △알레포 230만 명 △다마스쿠스 250만 명 △다라 25만 명 등 적어도 500만 명가량이 극심한 물 부족 사태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난민도 약 760만 명
2013년 1월 다마스쿠스에서 반군이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다.  REUTERS

2013년 1월 다마스쿠스에서 반군이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다. REUTERS

정부군-반군, 어느 한쪽도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다. 시리아는, 나라 아닌 나라가 돼버렸다. 반군이 장악한 지역을 정부군이 탈환하면, 어김없이 주민들에게 보복공격을 퍼부었다. 정부군이 장악한 지역을 탈환한 반군도 똑같은 짓을 했다. 정부군이 민간인 거주지역에 융단폭격을 퍼붓고 나면, 반군의 무차별 포탄이 여러 날 같은 곳을 유린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정부군-반군, 선악의 구분은 허망해졌다. 도처가 최전선이다. 어디라도 안전한 곳은 없게 됐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개전 초기인 2012년까지만 해도 10만 명 수준이던 시리아 출신 난민은 2013년 4월 80만 명까지 큰 폭으로 늘었다. 이후 넉 달여 만에 그 2배인 160만 명까지 폭증했다. 전황이 악화 일로로 치달으면서, 난민 증가세도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지난 9월6일 현재 유엔난민기구(UNHCR)에 공식 등록된 시리아 난민은 408만8099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18살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난민지원단체 ‘머시코어’가 9월2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주변국에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은 △터키 193만8999명 △레바논 117만2753명 △요르단 62만9245명 △이라크 24만9726명 △이집트 13만2375명에 이른다.


<i>2011년 초 시리아 인구는 약 2300만 명이었다. 전쟁 4년여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나라 안팎에서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지구촌이 경험하는 최악의 난민 사태다. </i>

천행으로 국경을 넘은 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유엔난민기구가 펴낸 자료를 보면, 현재 시리아 내부에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국내난민(IDPs)도 약 760만 명을 헤아린다.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0만 명은 구호단체의 지원이 미치지 못하는 교전지역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내전 발발 직전인 2011년 초를 기준으로 한 시리아 인구는 약 2300만 명이었다. 전쟁 4년여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이 나라 안팎에서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는 얘기다.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올 들어서도 지난 5월까지만 무려 70만 명가량의 신규 난민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43만 명은 국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유엔난민기구는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올해 말까지 시리아 난민은 427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 이후 지구촌이 경험하는 최악의 난민 사태다.

시리아 난민의 지속적 유입으로 주변 각국의 상황도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단적인 사례가 레바논이다. 2013년을 기준으로 인구가 450만 명 남짓인 레바논에 공식적으로 머물고 있는 시리아 난민은 줄잡아 120만 명에 이른다. 등록되지 않은 난민도 수십만 명 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레바논 정부 안팎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은 지난 9월4일치에서 “시리아 난민들은 귀향 가능성도, 경제적 전망도 없는 상태에서 장기간 주변국에 머물러왔다. 난민 지원단체마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최근 들어 상황이 더욱 나빠지면서, 북유럽으로 향하는 시리아 난민이 급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귀향했다 다시 국경 넘은 쿠르디 가족

이런 현실이 세계를 울린 아기 쿠르디의 비극적 죽음을 불렀다. 이슬람국가의 무한 폭력을 피해 국경을 넘은 쿠르디 가족은 터키에서 3년여를 머물렀다. 전황이 나아져 올 초 고향인 코바니로 돌아갔던 가족은, 이슬람국가가 다시 세력을 뻗어오면서 지난 6월 재차 국경을 넘어야 했다. 애초 원했던 캐나다행이 좌절된 뒤, 쿠르디 가족은 ‘북상’을 결심했다. 터키의 항구도시 보드룸에서 그리스의 코스섬까지, 줄잡아 30분 남짓이면 가닿을 수 있는 거리다. 그 짧은 여정을 버텨내지 못했다. 아기는 주검으로 귀국해 고향 땅에 묻혔다. 유엔난민기구는 올 연말까지 적어도 40만 명, 내년에도 45만 명가량의 시리아 난민이 지중해와 발칸반도를 거쳐 북유럽 각국으로 향할 것으로 내다봤다.

9월11일 현재, 시리아 내전은 4년5개월3주 하고도 5일째를 맞았다. 모두 일천육백사십구 번의 낮과 밤이 바뀌었다. 전쟁은 오늘도 계속된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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