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인과 아랍인 등 이주민이 주로 모여 사는 독일 베를린 모아비트 지역.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큰길가 보이셀슈트라세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여느 카페 같아 보이는 입구를 들어서면 대화의 열기가 후끈하다. 매주 수~금요일 저녁 6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열리는 독일어 공부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 참이다.
갓 독일에 발을 디딘 난민들과 동네 주민들이 친분을 맺는 만남, ‘새 이웃’(Neue Nachbarschaft·노이에나흐바르샤프트)의 현장이다. 독일어 교습 자원봉사자와 난민들이 1 대 1 혹은 2 대 1로 짝지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난민에게 가장 절실한 건 사회적 관계다. 우리 모토는 ‘난민 돕기’가 아니라 ‘서로 나누기’다.” 마리나 나푸르쉬키나(33)는 강조한다. 벨라루스 출신 화가 마리나가 ‘새 이웃’ 모임을 만든 건 2년 전 이 동네에 난민긴급수용시설이 생기면서다. 처음엔 난민 어린이 미술교실로 시작했다. 어느새 이곳을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200여 명이 되었다. 공간이 좁아 지난 8월엔 이사도 했다. ‘새 이웃’은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난민들과 독일 주민들이 ‘새 이웃’에서 친구를 사귀고 도움을 주고받는다.
잔드라(20)는 7개월 전부터 난민 친구에게 독일어를 가르치고 대신 아랍어를 배운다. “이곳에 오면서 독일 국적을 가진 게 굉장한 특권임을 알게 됐다”고 잔드라는 말했다. “내가 독일인인 것은 내가 선택해서 얻은 게 아니지 않나. 이곳에 와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졌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과 직접 접촉한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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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 발걸음한 난민도 꽤 된다. 집 구하기 등 관청 문제에 대한 실질적 도움을 얻는다. ‘새 이웃’을 꾸준히 찾는 레바논 출신의 빌랄(28)은 원래 영어 교사였다. 난민 지위를 인정받느라 마음고생이 심한 그는 ‘새 이웃’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사람들도 사귀면서 위안을 얻는다.
늦은 오후 모아비트 투름슈트라세에 자리한 보건사회청(LaGe So) 마당 앞의 또 다른 풍경. 베를린에 도착한 난민들이 난민 신청을 하는 첫 관문이다. 전광판을 바라보며 차례를 기다리는 난민들이 건물 마당에 서 있거나 자리를 깔고 앉아 있다.
무하메드(47·가명)는 14살 아들과 함께 시리아를 출발해 사흘 전 베를린에 도착하는 데 한 달이 걸렸다. 딸과 아내를 시리아에 두고 온 탓에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난민 브로커를 통해 터키·그리스·마케도니아·헝가리를 거쳐 독일에 오기까지 한 사람당 4천유로가 들었다. 현재 무하메드는 18년 전 베를린에 정착한 친형 집에서 지내고 있다. 이날 아침 6시에 줄을 선 그는 오후 5시가 지난 시각까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선 난민 300여 명이 여전히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
자발적 구호단체, 베를린에만 30개 이상한켠에선 옷과 신발 등을 나눠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바빴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자원봉사자들이 과일과 샌드위치 상자를 들고 다니며 배급을 기다리는 난민들에게 나눠줬다. 사흘 전부터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클라우스 체러(45)는 작가였다. “친구들을 통해 ‘모아비트가 돕는다’(Moabit hilft)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3천유로를 모았다. 이곳을 찾아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뒤 바나나·면도기 등을 사서 기부했다.”
보건사회청 건물 뒤편 주차장에는 ‘모아비트가 돕는다’의 천막 본부가 설치돼 있다. 2년 전 설립된 이 단체의 회원 수는 1만 명에 이른다. 단체의 조직을 맡고 있는 라슬로 후베르트(57)는 “한 달 전부터 일이 20배는 늘었다”고 했다. 매일 5천 명분의 음식을 조달하고, 난민들의 주거와 법률·행정 문제 등을 돕고 있다.
독일에선 민관이 합심해 올해만 8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난민 사태’에 대처하고 있다. 자발적 난민 구호 시민단체가 베를린에만 30개 이상이다. 기부물품과 기부금이 단체들에 답지하고 있다.
지난 9월6일 하루에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억류됐던 난민 2만 명이 뮌헨에 도착했다. 난민들에게 초콜릿·물·곰인형을 나눠주며 박수로 환영하는 뮌헨 시민들의 모습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난민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독일 특유의 환영문화(Willkommenskultur·빌코멘스쿨투어)는 이제 세계인의 머리 속에 각인되었다.
‘뮌헨이 빛난다’라는 타이틀로 세계로 퍼져나간 장면들에 힘입어 독일 정부는 난민 대책 합의에 박차를 가했다. 지난 9월7일 사회민주당,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당이 만났다. 연방정부는 2016년까지 “난민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30억유로를 지출하기로 하고, 지방정부에도 30억유로를 더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난민 임시수용시설을 증축하고 독일 전역의 중앙정부 소속 건물을 임대료 없이 내주는 방안도 논의했다. 특히 사민당의 요구로 발칸 지역 ‘경제 난민들’의 합법적 이주의 길을 열었다. 노동계약서나 직업교육계약서가 있으면 독일에 머물 수 있게 된다. 반면 기독교사회민주연합 주도로 난민 신청 기간이 최대 6개월에서 3개월로 단축됐다. 난민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도 줄었다.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독일인의 여론은 어떨까. 공영방송 (ZDF)의 여론조사기관 폴리트바로메터가 지난 8월20일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60%가 ‘독일이 난민 문제를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극복이 어렵다’는 대답은 37%였다. 엠니트의 여론조사에선 독일인 70%가 ‘난민들이 독일인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것’으로 평가했다. 65%는 ‘독일 사회의 평균연령을 낮춰줄 것’이라고 보았다.
우려와 경계심도 물론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복지 경비 추가 부담(66%), 원주민과 이주민의 갈등(66%), 대도시 주택난(55%) 등을 걱정했다. 뮌헨에서 난민을 향한 감동적인 움직임이 있던 날 밤새 극우 폭력으로 추정되는 방화사건이 2건이나 벌어졌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연방의회 연설에서 “극우세력은 모두 함께 단호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난민들에게 일자리 제공하는 기업들경제계도 난민 통합에 가세했다. 독일철도청장 뤼디거 그루베는 “우리 회사는 독일 사회 통합에 큰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독일 철도청은 이미 100여 개국 출신들을 고용하고 있다. 화학기업 에보니크는 100만유로를 구호 프로젝트에 기부하고 화학 전공자를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젊은 난민 중 15명을 선발해 지원하기로 했다. 지멘스도 숙련된 난민들을 고용하고 통합할 의사를 밝혔다. 지멘스는 시범적으로 난민들에게 인턴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난민들의 독일어 실력이 문제다. 독일숙련기술자중앙협회 총서기는 “독일 정부가 난민들의 직업 준비 언어 코스를 더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복잡한 이주 관련법도 복병이다. 기껏 직업훈련을 받은 연수생들이 자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이주민 고용을 위해 더 투명하고 통일된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몇 주 뒤 이주민 통합 문제를 두고 독일경제협회와 경제부 장관, 노동조합이 만날 계획이다.
9월9일 연방의회 연설에서 메르켈 총리는 “독일에 오는 난민을 통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룬 지 25주년이 되는 해다. 난민 위기를 맞은 독일은 더 높은 차원의 통일의 길을 열 수 있을까.
베를린(독일)=글·사진 한주연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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