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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배신한 밀양 三代

‘배일의 거두’로 지목됐지만 독립유공자 서훈도 거부당한 구영필, 4·3항쟁 참상 전하다 구속된 구수만,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하는 손녀 구미현
등록 2015-08-12 14:30 수정 2020-05-03 04:28
해방 70년이다. 태양만 바라보면 주변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 독립운동사도 그러하다. 몇몇 특정 인물을 영웅으로 신화화하면 할수록, 동시대 함께 피를 흘린 이들은 왜곡되고 수축된다. 태양은 개기일식 때에야 주변 별을 허락한다. 가장 어두웠기에 더욱 빛을 갈구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대한 조명도 그러하다. 영웅의 그늘을 보면 또 다른 진실이 보인다. 특정 인물을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다만 일제 핍박과 수탈이 엄혹한 상황에서, 북만주 거친 벌판에서 동족끼리 모반하고 암살한 ‘슬픈 진실’을 직시했을 뿐이다. 만주 항일운동의 착잡한 세력 다툼에서 희생된 일우(一友) 구영필(1891~1926)의 진실과 명예를 조금이나마 밝히려고 했을 뿐이다. 국가보훈처의 적극적인 진실 발굴을 기대한다. 영화 을 통해 친일파 청산 과제를 70년째 완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는 평론, 역사에서 현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의 인터뷰도 담았다.
기사를 마무리한 직후 서울 하늘에 천둥 울고 소나기 쏟아졌다. 누구의 울음, 누구의 눈물인가.
취재 전진식 기자, 편집 구둘래 기자, 디자인 장광석
1920년대 초반 구영필(왼쪽 위). 아들 구수만 또한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이었다(맨 아래). 경남 밀양 송전탑 투쟁에 앞장선 손녀 구미현씨(오른쪽 위). 구영필 후손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정용일 기자

1920년대 초반 구영필(왼쪽 위). 아들 구수만 또한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이었다(맨 아래). 경남 밀양 송전탑 투쟁에 앞장선 손녀 구미현씨(오른쪽 위). 구영필 후손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정용일 기자

목단강 강바람이 스산했다. 고향 밀양강이 그리웠다. 옆구리가 쓰렸다. 1926년 9월, 중국 길림성 영안현 영고탑. 청년은 추석을 앞두고 장으로 향했다. 나라 잃은 지 16년, 해가 떠도 세상은 흐렸다. 한인 청년들이 다가왔다. 순간, 칼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으윽, 청년이 쓰러졌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사흘 뒤 청년은 마지막 가쁜 숨을 쉬었다. 굳은 혀는 말을 만들지 못했다. 팔을 들어 뜻을 전한 뒤 절명했다. ‘민족을 위해 진력하라’. 청년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중국 길림성 영고탑에서 상회 공제호를 설립하고 이주동포를 지도하던 구영필씨는 9월11일 오전 7시 영고탑 동채시에서 어떤 악한에게 칼을 맞아 복부로 피를 많이 흘리고 사흘이 지난 14일 오후 4시30분경 굳은 혀로 말은 못하고 바른팔을 들어 동지들에게 민족을 위하여 진력하라는 뜻을 보이고 35세를 일기로 최후의 길을 떠났는데, 씨는 경상남도 출신으로 조국을 광복하기 위하여 무한한 수고를 당하며 여러 방면으로 일을 하다가 갖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더라.”( 1926년 11월18일치 기사. 맞춤법 수정)

구영필은 ‘일제 밀정’이라는 모함에 시달렸다. 날마다 잠자리를 옮겨다녀야 할 만큼 위협은 멈추지 않았다. 다급했다. “우리가 요구한 돈을 음력 8월×일까지 내놓지 않으면 크게 피를 볼 것이다. 만약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는 다가올 추석은 거꾸로 쇠게 될 것을 경고한다”는 협박까지 받았다. 얼마 뒤 암살로 숨진 그의 장례식이 열린 날은 추석이었다.

앞서 그해 5월 구영필은 북경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는 동갑내기 친구 김대지(1891~1942·건국훈장 독립장)가 있었다. 김대지는 구영필과 같은 경남 밀양 출신이고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둘은 1919년 의열단을 창설하는 데 밑돌을 놓은 주역들이었다.

구영필의 편지를 받을 당시 김대지는 권총 3자루를 은밀히 사들인 뒤였다. 의열단 단원 나석주(1890~1926·건국훈장 대통령장)에게 건넬 총이었다. 나석주는 그해 12월28일 일제 가렴주구의 상징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인 여럿을 사살했다. 편지를 받은 김대지는 곧장 구영필이 있는 영고탑으로 달려갔다.

“편지의 사연인즉슨, 할아버지더러 영안에 대한 책을 써달라는 것과 자신이 지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딱한 처지에 있으니 할아버지가 직접 영고탑에 와서 자신의 문제를 해명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가운데 김대지 손녀 김주영의 증언)
1. 영고탑의 ‘배일 거두’
구영필이 영고탑에서 설립한 영안의원(맨 왼쪽). 최계화(구영필의 중국 이름)를 ‘배일의 거두’로 적시한 일제 기밀문서(가운데). 구영필 후손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구영필이 영고탑에서 설립한 영안의원(맨 왼쪽). 최계화(구영필의 중국 이름)를 ‘배일의 거두’로 적시한 일제 기밀문서(가운데). 구영필 후손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칼의 주인은 누구인가. 1925년 11월 김좌진의 신민부 대원 문우천 등이 중국 관헌에 돌연 체포됐다. 밀고자로 구영필이 지목됐다. 그를 지목한 건 신민부 대원들이었다. 신민부는 왜 구영필을 밀고자로 단정했을까. 의심의 뿌리에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그늘이 있다.

구영필은 한-일 강제병합 뒤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대지 등과 의기투합해 일합사(一合社)라는 비밀결사단체를 만들었다. 군자금 확보를 위해 만주와 한반도를 오가다 일제에 검거돼 1918년 6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뒤 그는 1919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의정원 재무부 위원으로 추천된 뒤 만주 봉천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펼쳤다. 그의 아버지가 보부상 영남총책이었고 외삼촌(한춘옥)이 영남 일대의 이름난 거부였던 까닭에 독립운동 자금 마련의 적임자였다. 그해 말 중국 길림에서 의형제 김대지·황상규, 밀양 후배 김원봉, 외사촌 한봉근·한봉인 등과 함께 의열단 조직에 관여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이후 그는 1920년 영고탑에 여명의숙을 세웠다. 한국어·산수·중국어·독립사상을 가르치는 민족교육기관이었고 직접 교장을 맡았다. 1921년에는 ‘영안현 입적간민호회’를 설립했다. 중국에서 귀화한 한인들의 정착을 위한 단체이며, 입법·사법·행정권을 가진 한인 자치기관이었다.

같은 해 경남 밀양에 있던 가족들도 전 재산을 처분해 모두 이주한 뒤 정착촌 건설에 쏟아부었다. 1923년에는 대동학원중학교를 설립해 한인 교육을 이끌었다. 병원과 정미소 등도 세웠다. 1924년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항일단체인 학우단 단장을 맡았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 일대 독립군 양성 학교로, 우당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이 교장이었다. 구영필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추정된다. 학우단 본부 또한 영고탑에 있었다. 교통의 요지였던 영고탑 일대로 모인 한인 수는 당시 5천 명을 훌쩍 넘었다.

영고탑에서 구영필의 명성은 매우 높았다. 일제는 영고탑의 유력 한인으로 구영필을 첫손에 꼽았다. 해방 뒤 공개된 일제 기밀문서를 보면, 일제는 구영필을 ‘배일(排日)의 거두’로 지목하고 그에 대한 정보보고를 지속적으로 작성했다. 기밀문서에는 구영필이 일제의 한국 통치에 반발해 만주 봉천으로 망명한 뒤 오로지 배일 고취와 독립 절규, 군자금 마련에 분주한 사실이 명시돼 있다. 구영필이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강조한 말도 고스란히 기록에 담겼다.

“우리들 한국민족은 일본의 압박정치를 배격하고 마땅히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을 결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동지를 규합하고 먼저 지반으로 할 토지를 얻어 생활의 안정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이 성공한 후에야 비로소 문화적 독립 수단을 강구할 수 있다. 합리적 문화독립은 자연의 이치이며 각국 식자도 우리들에게 성원을 줄 것이나 무력적 독립은 불합리이며 시세에 맞지 않다. 그러면 우리는 여하히 하여 그 목적을 달성할 것인가 왈, 식산흥업 왈, 지식계발에 있다.”(일본군 참모부 보고서)2. 김좌진 부대와의 악연

1920년대 들어 영고탑 일대로 각지의 민족주의·사회주의 계열 등 수많은 반일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주도권을 둘러싼 반목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안정적인 항일운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세력들 간의 다툼은 밀고와 배신, 암살로 이어졌다. 거리에는 상대를 ‘일본 특무, 주구, 친일파’로 성토하는 전단이 가득했다. 특히 김좌진 부대와 구영필 쪽의 갈등은 영고탑 일대 반일 세력의 양대 축이었다는 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고 말았다.

김좌진·김규식·박두희 등이 이끌던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중국 관헌에 무장해제를 당했다. 이후 이들은 구영필이 터를 잡고 있던 영고탑에 모여들었다. 이곳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1925년 3월 영고탑에서 신민부를 창설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이끌며 이름을 날린 김좌진이 북만주 일대의 반일 세력을 규합한 조직이다. 이들은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지역 한인들에게 의무금을 수시로 거둬들였다. 일본군에 맞서기 위한 무기 구입과 군사들의 식량 마련 등에 쓰인 돈이 의무금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인들과 빈번하게 갈등이 빚어졌다. 당시 만주 동쪽이나 남쪽에서 살길이 없어 북만주로 이주한 한인들 다수는 처참한 빈농이었다.

신민부의 의무금 요구는 항일운동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한인들에겐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1928년 11월에는 신민부 무장대가 의무금을 모집하다 이에 반발하는 주민들 여러 명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한인들은 당시 김좌진을 ‘동족 학살의 괴수, 혁명전선의 교란자, 매족적 주구’ 등으로 비방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5년 신민부의 문우천 등이 중국 관헌에 체포돼 감옥에 갇히면서 신민부와 구영필의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굶주린 한인들을 위해 대출을 받아 아홉 화차 분량의 좁쌀을 구매한 일을 두고도 일제와 내통했다는 오해를 받았다.

1926년에 들어 구영필은 친일 밀정이라는 신민부의 배척에 몰려 완전히 고립됐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구영필은 동지 김대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구영필 암살 뒤 3년 남짓 지난 1930년 1월 김좌진 또한 한인에 의해 암살된다. 연이은 역사의 비극이다.

후일 병석에 누운 김대지는 동지들에게 “조선 사람들은 단합하기가 왜 이다지 힘든가”라고 탄식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좌진·구영필 등 목숨을 나눠 항일투쟁을 함께했던 동지들이 일제가 아닌 한인 손에 숨지는 참극 앞에서 김대지는 땅을 쳤다.

구영필의 장례식 사진. 구영필 후손 제공

구영필의 장례식 사진. 구영필 후손 제공

3. 의열단 역사에서도 사라진 흔적“의열단은 그 가운데서 유독 그 표방하는 파괴, 흉포 행위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 곳이다. 게다가 목표로 하는 바는 오로지 조선 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일본도 목표권 내에 두고, 그 수단이야말로 정교한 폭탄과 권총이다. 이에 더하여 실행 담임자와 동지 간의 비밀을 지키는 것도 엄중해서 도저히 다른 실없는 껍데기 단체의 추종을 허용치 않는 점이 있어 조선 내 민심에 충격을 주는 점이 실로 생각하는 것보다 크다.”(일제 )

일제마저 그 위력에 공포를 느낄 만큼 의열단은 1920년대 강력한 암살·폭파 조직이었다. 의열단 단원들 다수는 구영필과 같은 밀양 출신이다. 밀양은 의열단의 산실이다. 단장 김원봉을 비롯해 구영필과 김대지, 구영필의 외사촌 한봉근·한봉인 모두 한 고향이다. 1919년 의열단 창설 뒤 첫 행동이 이듬해 5월 밀양 폭탄 거사 계획이었다. 구영필은 김원봉에게 폭탄 구입비를 건넸다.

“1919년 음력 8월 중에는 윤(치형)이 구영필에게 독립운동비 및 폭탄구입비로 2000원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구는 이 가운데 300원을 폭탄구입비로 김원봉에게 주었던 것이다.”(일제 )

폭탄 거사 계획은 사전에 밀정의 밀고로 발각돼 단원들 다수가 일제에 체포됐다. 신민부 출신으로 김좌진 장례식에서 대변인을 맡기도 했던 이강훈(1903~2003·전 광복회장)은 해방 뒤 회고록에서 이 사건의 밀고자로 구영필을 지목했다. 사건에 가담해 옥고를 치렀던 윤치형 또한 1962년 구영필을 밀고자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조사기록을 보면, 친일 고등경찰 김태석에 대한 기소장에 “피고 김태석은 1920년 7월20일 밀정 김진규를 이용하여 밀양 폭탄 사건의 선동자인 이성우, 윤소룡을 체포하여 (…)”라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당시 일제는 사건 관계자로 24명을 들었는데 명단에 김원봉은 물론 구영필도 주모자로 포함돼 있다. 이강훈의 증언과 어긋나는 대목이다. 이강훈은 독립유공자 서훈 심사위원과 광복회장까지 지냈다.

김원봉은 구영필이 김대지와 함께 의형제를 맺은 황상규의 처조카였다. 의열단 부단장으로 불렸던 한봉근은 구영필의 외사촌이었다. 단원 이종암은 사건 뒤 1924년 각기병을 치료하기 위해 구영필이 있는 영고탑에 머물렀다. 구영필이 밀고자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게 후손들 설명이다.

김대지는 구영필을 의열단의 ‘배후’로까지 회고했다. 1926년 5월 의열단이 해체될 무렵 김대지는 구영필의 구명 편지를 받았던 것이고, 끝내 넉 달 뒤 김좌진의 부하 손에 암살됐다. 당시 김대지는 몇 달 동안 조사한 결과 구영필이 세력 다툼의 과녁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고탑은 의열단의 안전한 후방인 셈이었다. (…) 의열단 단원들과 할아버지(김대지)는 구영필의 신세를 많이 졌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의열단원들이 자유자재로 북경, 상해, 봉천을 드나들면서 의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구영필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구영필을 그리워하면서, 그가 없었다면 이 모든 게 불가능했노라고, 일우(구영필의 호)가 살았더라면 만주의 독립운동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통곡하셨다.”(김대지 손녀 김주영의 증언)

4. 판잣집 전전하던 1962년 삼일절

1962년 삼일절 아침. 구영필의 큰아들 구수만의 집으로 부산 구덕파출소 순경이 뛰어왔다.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됐으니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날 부산 공설운동장에서는 삼일절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었고 구영필이 서훈을 받기로 돼 있었다.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구영필의 비극적인 죽음 뒤 그의 후손 또한 가시밭길을 걸었다. 큰아들 구수만은 1926년 부친 구영필이 피살될 때 서울 배재고보 신입생이었다. 4년 뒤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번진 전국적인 항일시위에 나섰다 일제에 검거돼 퇴학 처분을 받았다.

구수만은 이후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동지들과 함께 청년동맹 활동을 이어가면서 조선공산당원으로 활동하다 또다시 일제에 검거된다. 제주 4·3항쟁 때는 참상을 전하는 전단을 돌리다 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해방 뒤 보험회사 총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부산 동아대에서 직원으로 근무도 했지만 가난과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구수만은 부인, 딸 넷과 부산의 산비탈 판잣집에서 지냈다. 그는 일제 때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병석에 자주 누웠다. 그나마 있던 재산도 병구완에 모두 털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구수만의 아내가 식당이나 과일 행상을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딸 넷은 모두 총명했지만 제때 진학하기도 버거웠다. 둘째딸은 중학교에 공납금을 내지 못해 졸업을 못하는 바람에 고교 진학을 미뤄야 했다. 큰딸은 사범대학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 만에 그만뒀다. 구수만은 1955년께 시력을 점점 잃다가 실명하고 말았다. 그는 1976년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후손은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했다. 근거 자료만 해도 2천 장을 넘는다. 그러나 번번이 거부됐다. 당시 행적에 흠결이 있다는 게 이유였다. 1926년 피살 당시 신민부 보안대원들이 그를 친일 밀정으로 추정한 것과, 1920년 밀양 폭탄 거사 계획이 무산된 이유로 이강훈·윤치형이 구영필을 밀고자로 지목한 탓이다.

2005년에는 더 기가 막힌 답변도 있었다. 당시 서훈 신청을 거부하면서 국가보훈처 연구원과 직원들이 “이 모든 정황을 이해할 수 없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부를 중심으로 정립된 독립운동사와 상충되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말했다는 게 후손들의 주장이다.

큰딸 구미혜(75)씨는 지금도 가슴을 친다. “올해 들어서도 서훈 신청을 했는데 거부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확인한 모든 자료들이 친일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데 보훈처에서는 계속 친일이 아니라는 자료를 내놓으라고 해요. ‘친일 아님’이라는 자료는 없잖아요. 완전 억지예요.”

관련 사료를 검토해온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김좌진의 신민부와 구영필 사이의 갈등에 주목했다. “구영필이 먼저 영고탑에 기반을 잡았고 김좌진의 무장세력이 그다음에 들어갔다. 이후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겼고 조정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구영필이 암살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 광복회의 주류를 신민부 출신들이 형성하고 있는데 구영필과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안타까운 상황이다.”

5. 밀양 송전탑 투쟁에서 만난 ‘국가’

구영필-구수만으로 이어진 불행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막내딸 구미현(65)씨는 2007년 부산에서 밀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건강이 악화돼 요양할 곳을 찾다 한적하고 깨끗한데다 산세가 좋은 자리를 택한 것이다.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소문에 송전탑이 들어선다고 하더라고요. 동네분들한테 물어보니 송전탑은 산 너머라고 해서 괜찮겠다 싶어 집을 지었죠.” 한국전력에서 주민들을 속인 것이었다.

3년쯤 지나 건강이 괜찮아지던 어느 날 헬리콥터가 마을에 굉음을 내며 날아왔다. 그날 이후 2011년부터 송전탑 공사를 몸으로 막기 시작했다. 구미현씨는 3년 동안 남편, 활동가들과 함께 한여름 한겨울 가리지 않고 길 위에 섰다. 산에는 기어서라도 올라갔다. 실신하는 노인들이 속출했지만 구미현씨는 끝까지 정신줄을 잡았다. 한전에서 산에 올려둔 포클레인 밑에서 종일 먹고 자고 했다.

“그게 별로 두렵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너무 부당했어요.”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현장에 있던 이들에게 구미현씨는 단아하고 또렷하게 의견을 말하는 ‘대단한 어르신’으로 통했다. 지난해 2월부터 6월까지는 아예 마을 뒷산에서 살았다. 머리맡으로 들쥐가 다녔다. 한전의 강제대집행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던 때였다.

구영필의 후손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서른다섯 창창한 나이에 신민부 보안대원에게 암살된 것도 억울한데 이후 100년 가까이 친일파, 일제 밀정으로 왜곡돼 있는 탓이다. 유족 보상금 따위가 아니라 오직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는 게 후손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부친의 고통을 내내 아파하다 자신 또한 두 눈의 시력을 잃고 숨진 아버지 구수만에 대한 회한도 깊다. 구미현씨는 송전탑 투쟁을 겪으며 역사 바로잡기를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산에서 할아버지·아버지 생각이 참 많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이렇게 위험하다 하지만, 그래도 고문은 없는 세상이잖아요. 아버지가 생전에 고문 얘기를 참 많이 하셨거든요. 일제 때 고문은 이랬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던 장면이 떠올랐어요. 내가 만약 그런 위협이 있었으면 할아버지·아버지처럼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할아버지·아버지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굉장히 절실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정부는 전문가 협의체를 구실로 공사 재개 수순을 밟았다. 지난해 말 구미현씨 집 뒷산을 비롯한 4곳을 마지막으로 765kV짜리 송전탑 공사가 끝났다. 공사 반대 투쟁에 나섰던 이들에게 내려진 벌금만 해도 줄잡아 2억원을 넘는다. 구미현씨의 남편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국가에 외면받은 독립운동 역사도 모자라, 삶의 터전마저 국가에 훼손되는 현실을 말하면서 구미현씨는 눈이 붉어졌다.

구미현씨는 나머지 생을 할아버지·아버지 두 분처럼 살겠다고 했다. 송전탑 반대 투쟁을 하던 산에서 선친들을 마음으로 다시 만났다고 했다. 구영필의 맏아들 구수만, 막내딸 구미현을 유독 예뻐했던 아버지 구수만은 생전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크고 비장하게. 한 대목이다.

“산에 사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 마라/ 몸은 비록 죽었어도 독립정신 살아 있다.”

밀양=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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