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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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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 안보가 안 보인다

‘컨트롤타워’ 없는 것은 안보 개념과 무관하지 않아… 참여정부에선 메르스 같은 ‘전염병’이 11개의 재난 유형 중 하나, 세월호 뒤 개편된 국민안전처는 메르스 사태에서 완전히 빠져 있어
등록 2015-06-17 18:40 수정 2020-05-03 04:28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5일 메르스 치료를 담당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현장을 방문한 것은 국내 첫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 17일 만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5일 메르스 치료를 담당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해 관계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이 메르스 대응 현장을 방문한 것은 국내 첫 확진 환자가 발생한 지 17일 만이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5월26일 국무회의는 각별한 시기에 열린 국정 최고 회의였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가 국내에 처음 발생한 지 6일 만에 대통령과 장관들이 모인 회의였다. 메르스 환자가 이미 5명까지 늘어난 상태였다. 그래도 경기도 평택의 병원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가 서울 대형 병원 등으로 옮겨다니기 직전이었다. 돌이켜보면 ‘5월26일’은 청와대가 메르스의 추가 확산을 통제할 수도 있었던 중요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날 박근혜 대통령의 메르스 관련 발언은 없었다.

5월26일, 북한 대항 ‘안보’ 이야기만

대통령은 회의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 청문회 통과와 공무원연금 개혁안 처리에 대한 국회 협조, 창조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통령이 특별히 공포정치와 애국을 언급한 것도 눈에 띈다.

“북한 내부의 공포정치로 주민들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 이럴 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중략)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젊은 세대에 진정한 애국의 의미를 전할 수 있도록 부처별로 사업을 발굴해 추진하기 바란다.”

북한 주민들의 삶까지 위협하는 공포정치의 파장을 주시하며 국가안보와 애국을 강조한 발언이다. 그런데 이날 국무회의에서 당장 우리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메르스 확산’ 문제는 왜 비중 있는 안건으로 오르지도 못했을까?

이는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박근혜 정부가 국가안보의 개념을 확장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란 의견이 나온다. 현대사회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과 테러, 내부 폭동뿐 아니라 자연 재난(태풍·홍수·폭설 등), 인적 재난(붕괴·폭발·화재·선박 침몰 등), 사이버 테러 등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요인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메르스 사태에서 확인되듯 전염병은 사망에 대한 불안감을 높여 사회위기를 부른다. 이런 요소들을 국가안보 차원에서 접근해 빠르고 집중력 있게 위기에 대응하지 않으면 국민의 생명이 위험해진다.

국가위기관리학회장을 지낸 이재은 충북대 교수는 “이제 군사적 안보뿐 아니라 경제안보, 환경안보, 인간안보 등을 안보 개념에 포괄적으로 포함시켜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한 메르스 대응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바이러스와 전염병의 확산을 막는 ‘방역’도 곧 국가안보란 인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에서 안보는 남북 대치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한 ‘전통적 안보’ 개념에 집중돼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인 지난해 7월 청와대에서 펴낸 ‘국가안보전략’ 문건에서 안보전략 기조를 “튼튼한 안보,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추진, 신뢰외교 전개”라고 재차 규정했다. 북한의 위협을 막고 한반도 평화를 위해 주변국을 관리하는 것을 안보의 주된 목표로 보았다. 국민이 메르스 사태를 위기로 체감한 것과 딴판으로 박 대통령이 5월26일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공포정치와 애국을 언급한 것도 안보의 개념이 국방·외교로 좁혀져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메르스 확산을 조기에 통제할 청와대의 컨트롤타워(통제·조정) 기능이 부실했던 원인도 안보에 대한 이런 시각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33개의 국가위기 유형, 2339개 현장 매뉴얼

박근혜 정부의 이런 인식은 참여정부 시절인 2004년 7월 대통령 훈령 124호로 시행된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서 정한 ‘포괄적 안보’ 개념을 제대로 이어가지 않은 데 따른 것이다. 참여정부는 당시 ‘포괄적 안보’를 “통일·외교·군사의 전통적 안보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국가 및 국민의 총체적 안위를 확보하려는 확대된 안보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이재은 교수는 “이 지침은 대통령 훈령으로 제정돼 사실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인데 현 정부가 (이를 실천하는 데) 미흡하다”고 말했다.

참여정부는 안보 개념을 ‘포괄적 안보’로 확장한 뒤 국가가 관리할 위기 대상도 남북관계, 군사·외교와 관련된 전통적 안보뿐 아니라, 재난(인적재난·자연재난), 국가핵심기반 분야 위기로 확대했다. 이를 토대로 참여정부는 전통적 안보 13개, 자연·인적 재난 11개, 국가핵심기반 마비(사이버안전·원전안전·보건의료·정보통신 등) 9개 등 33개의 국가위기 유형을 만들었다.

지금의 메르스 같은 ‘전염병’은 11개의 재난 유형 중 하나로 관리했고, 이로 인해 공중보건 기능이 혼란에 빠지는 상황에 대해선 9개의 국가핵심기반 마비 위기 중 ‘보건의료’ 항목으로 따로 대처했다. 참여정부는 33개 위기별로 주관 부처가 어디이며 다른 부처의 임무는 무엇인지를 정한 33개의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을 만들었다. 다시 하나의 위기마다 연관된 8~9개 정부기관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움직이는지 행동 절차를 기록한 278개의 ‘위기대응 실무매뉴얼’을 제작했다. 다시 여기에서 현장 투입 기관들의 행동을 더 정교하게 적은 2339개의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이 만들어졌다. ‘관심-주의-경계-심각’이란 국가위기경보 제도도 이때 처음 도입됐다. 이런 모든 국가위기는 대통령 직속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산하 위기관리센터가 ‘컨트롤타워’가 돼 통합·관리했다.

당시 국가위기관리 시스템을 주도적으로 구축한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 겸 위기관리센터장은 “전통적 안보 외에 재난, 국가핵심기반 마비까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국가위기로 보았고, 전염병까지 망라해 상황 관리를 했다”고 말했다. 참여정부의 안보 개념 확대에 따른 국가위기관리 도입에는 정부 출범 직전에 터진 인터넷 마비 대란, 대구 지하철 참사, 정부 출범 직후 발생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대응에서 얻은 교훈이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포괄적 안보 개념과 국가위기별 대응 매뉴얼은 무시되거나 방기되는 수순을 밟았다.

독일·미국, 모두 ‘시민보호’ 개념에 주목
안보 개념 비교

안보 개념 비교

“이제 군사적 안보뿐 아니라, 경제안보, 환경안보, 인간안보 등을 안보 개념에 포괄적으로 포함시켜 위기관리를 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한 메르스 대응도 마찬가지.” (이재은 충북대 교수)

안보 개념의 확장은 국제사회의 흐름이기도 했다. 이미 유엔개발계획(UNDP)은 1994년에 ‘인간개발 보고서’를 통해 외부 침입을 막는 안보 개념을 확장해 ‘인간안보’(Human Security)란 새 안보 개념을 제시했다. 안보를 추구하는 궁극적 이유가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본 개념이다. 그래서 빈곤, 차별, 억압, 기아, 환경 파괴, 정치적 자유, 기본권 보장, 경제적 불평등, 질병 통제 등 인간의 평화를 해치는 다양한 요소를 안보 개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인간개발 보고서’의 주문이었다.

독일은 ‘인간안보’와 비슷한 ‘시민보호’란 개념에 주목한 뒤 2004년 5월 ‘시민보호 및 재난대응청’을 정부 안에 설치했다. 미국은 2001년 9·11 사태 이후 재난, 자연재해, 테러에 긴밀히 대응하기 위해 2003년 2월 해안경비대, 출입국관리소, 국경경비대, 연방긴급재난관리청 등 22개 연방기관을 합쳐서 ‘국토안보부’를 출범시켰다. 당시 조지 부시 정부는 외교·안보 분야를 담당해온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별개로 국토안보위원회(HSC)를 추가 설치했다.

버락 오마바 정부가 출범한 뒤 백악관이 HSC의 업무까지 NSC로 통합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NSC가 군사·외교뿐 아니라 기존 HSC가 맡던 테러, 자연재해, 전염병 등의 관리까지 맡게 된 것이다. 류희인 전 청와대 NSC 사무차장은 “결국 미국도 HSC의 업무를 NSC로 흡수·통합하면서 (재난·질병까지 포함한) 포괄적 안보를 백악관의 NSC가 통합 관리하게 됐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의 NSC 산하 위기관리센터가 다양한 국가위기 사태의 ‘통합 컨트롤타워’ 구실을 한 것과 비슷하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에도 국가안보실장이 상임위원장을 맡는 NSC가 있고, 그 밑에 위기관리센터가 있다. 하지만 재난·질병 등 여러 국가위기 통제(컨트롤타워)까지 이곳에서 맡지는 않는다. “남북 대치 상황을 고려할 때 NSC는 (전통적) 국가안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게 청와대 쪽의 설명이다. 참여정부가 재난·질병·국가핵심기반 마비까지 포괄적 안보 개념에 포함시켜 청와대 NSC 위기관리센터에서 조정·관리한 것과 다른 대처 방식이다. 대신 박근혜 정부는 국민 안전과 직결된 재난 사태 대응과 구조 등은 세월호 참사 이후 신설된 국민안전처에서 맡도록 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구상과 달리 국민안전처는 여러 부처를 조정하며 메르스 사태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첫 메르스 확진 환자가 나온 지 18일이 지나 국민이 이미 아는 메르스 예방 기본 수칙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보내 여론의 비난만 받았다. 정부는 또 ‘중앙메르스관리대책본부’(본부장 보건복지부 장관), ‘메르스대책지원본부’(본부장 국민안전처 장관), 청와대의 ‘메르스 긴급대책반’ 등 여러 갈래로 나뉜 대응 기구가 유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일자, 뒤늦게 최경환 국무총리 대행이 주재하는 ‘일일 점검회의’를 띄웠다.

이재은 교수는 “국민안전처가 메르스 사태에서 관여하지 못한 채 빠져 있던 것은 의아할 정도”라고 했다. 국민안전처가 만들어질 때 소방 업무와 해체된 해경 업무를 이곳에 갖다붙이는 식으로 진행된 탓에 안전처가 다른 부서를 조율하며 국가위기를 지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통령중심제, 청와대가 컨트롤타워 돼야”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9일 정부세종청사와 영상으로 연결해 회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9일 정부세종청사와 영상으로 연결해 회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은 “대통령중심제에선 결국 청와대가 (전통적 안보와 재난·질병 상황을 포괄한) 컨트롤타워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청와대는 방향을 정해주는 ‘머리’가 돼야 하고, 국민안전처는 여러 부처를 종합 조정하는 몸통, 현장에서 뛰는 기관들은 손발이 돼야 한다. 위기관리는 행동을 수반해야 하기 때문에 명령 계통이 명확해야 한다. 머리·몸통·손발이 각자 역할을 하면서 연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전통적 안보’에 대통령의 의지를 집중할지, ‘포괄적 안보’ 개념으로 확대해 청와대가 다른 국가위기까지 주도적으로 관리할지는 국정 책임자의 판단에 좌우될 것이다. 다만 메르스 사태는 전통적 안보론자들에게 또 다른 유형의 안보위기를 경험시킨 사례가 됐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과거에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국가위기)까지 (안보에) 포괄하자는 것이 대북 안보 태세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보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안보란 뜻으로 인식되던 안보는 ‘안전보장’의 줄임말이다.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메르스 방어’가 곧 안보란 말은 전혀 어색한 표현이 아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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