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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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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 불빛이 미래를 태운다

등록 2001-11-28 00:00 수정 2020-05-02 04:22

가난이 유흥문화를 낳고 유흥문화가 탈선을 낳는 안산 청소년문화의 악순환

“<나쁜 영화>의 주인공인 나쁜 아이들을 배출한 곳도, 미성년 남자 접대부를 고용한 이른바 ‘맨다방’이 처음으로 적발된 곳도 안산입니다.”

한 시민운동가가 전하는 안산 청소년문화의 현주소다. 청소년문화는 유흥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안산은 수도권의 다른 외곽도시에 비해 유흥가가 번성할 조건을 갖췄다. 우선 반월공단이라는 든든한 자금줄이 있다. 그리고 서울과 거리가 멀어 소비가 안산에서 해결된다. 한 시민은 “안산은 안양이나 부천처럼 서울 유흥가로 유출되는 돈이 적다”면서 “공단에서 나온 돈이 대부분 안산 안에서 소비된다”고 분석한다. 이런 완결적 소비구조는 유흥가의 번성으로 이어지고, 청소년문화를 위협한다.

“서울애들은 잘 놀고, 안산애들은 깡이 세다”

안산의 유흥가는 안산역 앞 원곡동, 중앙동, 상록수역 앞으로 나뉜다. “한물간 원곡동, 잘 나가는 중앙동, 뜨는 상록수”란 게 대체적인 평가다. 다양한 종류의 유흥업소가 밀집해 있고, 패션몰까지 들어서 있는 중앙동은 안산 청소년들의 문화의 중심지다.

11월10일 토요일 저녁 10시. 중앙동으로 들어서자 휘황한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늦은 밤인데도 200여m 가까이 이어진 골목에는 청소년들이 가득하다. 가장 먼저 ‘유니폼’인 듯 비슷비슷한 옷차림이 눈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남자 아이들 두엇 중 하나는 딱 붙는 가죽 반코트에 통을 바짝 줄인 정장바지 차림이다. 안에는 검은색 쫄티를 받쳐 입었다.

여자 아이들은 긴 생머리에 검은 스타킹의 ‘통일성’이 두드러진다. 청소년 패션문화는 강남의 힙합, 강북의 복고풍 정장으로 나뉜다. 안산 아이들의 옷차림은 ‘강북보다 더 강북 같은 스타일’이다. 문화평론가 이호영씨는 “서울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스타일에 대한 추종은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안산 아이들의 강북 스타일 옷차림은 옷을 구매하는 장소와 관련이 있다. 상당수 아이들은 “가끔씩 동대문 패션매장에 들러 옷을 산다”고 밝혔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강남 아이들은 고급 브랜드의 힙합 제품을 선호하는 데 비해 강북 아이들은 동대문 등지의 패션몰을 주로 이용한다. 아이들의 옷차림은 이미 하나의 ‘계급적 지표’로 자리잡고 있다. 중앙동은 자정을 넘어서도 불야성을 이뤘고, 거리에 남아 있는 청소년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시계바늘이 새벽 1시에 가까울 무렵, 패션몰 앞에서 서성이는 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남자 아이는 김용호, 여자아이는 정윤숙, 신정미(이상 가명)였다. 말을 걸자 아이들은 뜻밖에 반색을 했다. 차 한잔씩 앞에 놓고 둘러앉자 거침없이 말이 터져나왔다.

“술 못 마시는 게 바보죠. 인문계 애들이 더 마셔요.”

“서울애들은 잘 놀고, 안산애들은 깡이 세죠.”

“까진 애들은 중학교 때 학교 그만둬요.”

“제 친구 중에도 티켓다방 가 있는 애도 있는데요 뭘.”

왜 ‘깔세’방이 많은가

세 아이는 같은 고등학교 1학년이다. 윤숙이는 다른 두 아이보다 한살 위다. 지난해 한달 동안 무단결석해 퇴학당했다가 올해 다시 입학했다. 윤숙이 아버지는 날품팔이를 하다가 허리를 다쳐 집에 누워 있다. 어머니가 파출부 일을 나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다. 정미는 아버지가 반월공단에서 일한다. 그나마 셋 중 형편이 나은 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왜 아이들이 티켓다방에 나간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정미가 “배불러서 그렇지”라고 내뱉듯 대답한다. 옆에 있던 윤숙이가 “배부른 애들이 미쳤다고 몸 파느냐?”며 발끈한다. 대답의 차이는 호주머니 사정의 차이처럼 보였다.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용호는 “선배한테 ‘방학하면 맨다방에 나가보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YWCA 청소년부 김은정 간사는 “부천, 성남 등 다른 위성도시의 청소년문제와 기본적으로 비슷하다”면서도 “안산지역의 유흥문화가 좀더 아이들의 일상으로 파고든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은정 간사는 지난해 특별활동 지도교사로 한 여고에 나갔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원조교제 제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겠느나?’고 물었어요. 스무명쯤 되는 아이들 중 다섯명이 ‘하겠다’고 대답하더군요.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청소년들 사이에 “안산은 유흥가가 많아 놀기 좋고, 일자리 구하기 쉽다”는 소문이 돌아 가출 청소년이 몰려드는 도시 중 하나다. 안산경찰서 여성·청소년계쪽은 “안산에는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는 이른바 ‘깔세’ 방이 많은 것도 가출 청소년들이 몰려드는 이유”라고 밝힌다.

지난해 겨울, 가출 청소년 셋이 깔세방을 얻어놓고 빈집털이를 하다가 잡힌 일이 있었다. 방 안에는 대형 TV를 비롯해 각종 전자제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만난 중학생 세명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들 중 한명은 의정부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아이였다.11월9일 새벽 3시, 안산경찰서 형사계 상황판은 안산 청소년문제의 현실을 방증하고 있다. 게시판에 적힌 6건의 사건 중 절반이 청소년 관련 범죄였다. 청소년보호법 위반이 2건, 10대 4명의 특수절도가 1건이다.

청소년 뿐 다른 지역 성인 여성들도 손쉬운 일자리를 찾아 안산으로 몰린다고 한다. 이주여성들도 예외는 아니다. 11월15일 저녁7 시, 안산 원곡동의 한 다방에서 우연히 중국동포 다방 아가씨를 만났다. 서른쯤 돼 보이는 그는 "서울을 거쳐 안산으로 온지 벌써 5년이 됐다"며 "첨엔 공장일을 했었는데"라고 말문을 열었다. 한참을 말이 없다가 "돌아가고 싶어도 벌어둔 돈도 없어"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특별한 ‘명문고’가 없는 도시

물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미래를 개척해가는 안산 청소년들도 많다. 11월22일 오후 7시. 안산시 선부동의 청소년문화센터 공연장에서는 경쾌한 댄스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댄스팀 열명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이들 뒤에서 춤을 따라하던 후보팀원 한명이 머쓱한 표정으로 공연장에서 빠져나와 무용연습실로 들어간다. 고등학생 김호성군이다.

호성이는 “지난해에는 참 많이 방황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호성이네 형편은 지난해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가 이미 실직 상태였고, 어머니마저 당뇨병으로 다니던 화학공장에 사표를 낸 것이다. 호성이는 모델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가정형편 탓에 어림없는 일이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술과 담배에 절어 살았다.

한참을 방황하던 호성이는 올 초 결심을 굳게 했다. 호성이는 “더이상 나를 망가뜨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요즘엔 주말에 뷔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을 벌어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린 나이답지 않게 “그래도 세상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른바 ‘명문고’가 없다는 사실도 안산 청소년의 현실을 반영한다. 서울 위성도시에도 90년대 들어 이른바 ‘명문고’가 생겨났다. 안양의 안양고, 부천의 부천고, 성남의 서현고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안산에는 뚜렷하게 내세울 만한 명문고가 없다. YWCA 김은정 간사는 “입시에만 매달리지 않고 다양한 취미활동을 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고 지적한다. 진학률이 낮은 것은 안산시의 교육비 투자와도 관련이 있다.

안산시 학부모의 학생 1인당 월평균 교육비 지출은 14만7천원으로 경기도 평균 18만원에 비해 떨어진다. 인근의 수원시(18만6천원), 군포시(17만7천원), 광명시(19만4천원)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이다. “공장에서 나오는 돈이 유흥비로 탕진되고, 그렇게 낭비된 돈은 다시 청소년들의 ‘일거리’가 된다.” 대안학교 ‘들꽃피는 학교’의 유승권 교사는 “소비적인 밤문화가 낮은 교육투자의 한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가난이 안산의 유흥문화를 만들고, 유흥문화는 청소년들의 탈선을 낳는다. 그리고 가난은 다시 청소년의 탈선을 통해 대물림된다. 중앙동의 휘황한 불빛이 안산 청소년의 내일을 밝혀주지는 못한다.

글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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