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바다에 두고 온 것 같아요.”
1년의 이별, 10분의 만남이었다. 지난 4월15일, 세월호 사고 현장에서 10여 분간 정박하고 무심하게 떠나는 배 안에서 세월호 희생자 정차웅군의 어머니 김연실씨가 울먹이며 되뇌었다. ‘차웅이를 차가운 바다에 두고 떠나는 심정’, 이별은 그렇게 구체적이다. 칼날 같은 아픔으로 심장을 파먹고, 살갗을 저민다. 유가족과 취재진은 같은 배에 탔지만 같은 곳에 다녀오지 않았다. 유가족들은 세월호 참사 현장에 갔다 온 것이 아니었다. 부모는 참혹한 이별을 한 번 더 겪었다. “유가족들이 모이면 항상 아이들 얘기를 하니까 아직 아이들이 옆에 있는 것 같거든요.” 1주기 소회를 묻는 잔인한 질문에 차웅이 엄마는 그렇게 답했다. ‘내 새끼를 또 바다에 두고 왔다’, 돌아오는 배에서 엄마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차웅이 어머니의 말을 듣고 비로소 알았다. 이것은 사망이 아니라 실종이다. 왜 구조를 못했는지, 왜 원인을 못 밝히는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으니 생명의 종결을 수긍할 상황이 아니다. 여전히 아이가 실종된 상태로 악몽의 365일이 지났을 뿐이다. 미치지 않을 부모가 없다. 몇 주년 몇 주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시간의 흐름이 순환하는 주기로 표시될 수 없다. 생로병사의 주기, 희로애락의 순환이 있을 리 없다(그런데 대통령은 일상으로 돌아가란다). 그냥 그리운 날짜가 쌓인다. 차웅이를 만나지 못한 지 365일, 세월은 그렇게 숫자로 기억될 뿐이다. 진상이 규명되기 전까지, 진실이 인양되기 전까지, 아직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에 떨어져 어떻게 숨졌는지 모르는 말레이시아항공 MH370 유가족의 절망과 다르지 않다. 사망이 확실한 실종, 죽음과 혼돈의 이중고가 유가족을 짓누른다. 아직 넋을 하늘로 보낼 준비를 한국 사회는 하지 못했다. 아득한 실종(Missing)은 끝없는 그리움(Miss)을 더한다.
‘실종자 9명이 세상의 중심이다.’
지난 4월15일 전남 진도 팽목항의 펼침막은 그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조은화, 허다윤, 남현철, 박영인, 고창석, 양승진, 권재근, 권혁규, 이영숙. 세월호 참사 1년이 지나도록 주검조차 찾지 못한 아홉 목숨이 아직 바다에 있다. 실종자 사진 가운데 아버지 권재근씨 옆에 작게 붙은 7살 혁규의 얼굴이 유난히 눈에 밟힌다. 침몰한 세월호에서 구조된 동생 지영이가 기다리는 땅으로 혁규는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베트남이 고향인 어머니 판응옥타인(한국 이름 한윤지)과 함께 묻히는 것조차 혁규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4월16일 1주기 집회에서 “정부의 세월호 인양 검토안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시신 훼손 방지 대책이 없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어린 혁규는 그렇게 방치돼 있다.
이날 북에서 남으로, 자전거를 타고 온 이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흙 묻은 자전거를 끌며 그는 마가복음 16장 7절을 인용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는 “부활하신 예수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리라 하신 말씀을 새기며 팽목항으로 왔다”며 “서울이 예루살렘이라면 팽목항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라고 말했다. 지금 부활한 예수를 만날 곳은 바로 여기란 것이다. 그를 포함한 5명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선교연대 목사들은 부활절 다음날인 4월6일 경기도 안산을 출발했다. 69살 노목사도 고행을 함께했다. 그는 “내일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서울 상황이 급박해 일정을 하루 당겼다”고 말했다.
북에서, 동에서, 자전거 타고, 걸어서동에서 서로, 걸어온 이들도 있었다. ‘밀양에서 팽목까지’ 슬로건을 등에 매단 이들이 팽목항 등대 앞에 멈췄다. “참된 왕이신 주님,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백성을 섬기기를 구하오니.” 예배가 시작되자 주변에 있던 이들도 가까이 모여들어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도했다.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기도에 이어 편지를 읽었다. 송전탑을 막기 위해 싸우는 경남 밀양 ‘할매·할배들’이 보낸 편지였다.
“매주 한 번씩 두 달 동안 움막에서 아이들을 기리는 촛불을 들었습니다. 를 부르며 이 아이들이 이 엉망진창의 나라를… 비춰주는 등대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울음을 삼키며 편지를 읽는 이의 뒤로 빨간색 ‘하늘로 보내는 편지 우체통’이 보였다. 장기용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대표는 “밀양의 배수철씨가 함께 걷다가 어제 다리를 다쳐 돌아갔다”고 전했다. 예배가 끝나고 “다리에 알이 배었다”며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여성 옆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정치인들이 지나갔다. 이날 팽목항에서 번듯한 양복을 빼입은 이들의 표정은 무심해 보였고, 땀에 전 옷을 입은 이들의 눈시울은 뜨거웠다. ‘세월호 참사 1년, 팽목항 사고해역 인양촉구 위령제’에 참석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추모객 일부의 항의에 부닥쳐 위령제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했다.
“학살이여, 학살!” 위령제가 끝나고 세월호 참사 해역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자 유가족 한 명이 외쳤다. 단원고 희생자 부모들은 아이들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달았다. ‘정차웅’, 학생 희생자 가운데 가장 먼저 바다에서 돌아온 이름이 보였다. 차웅이 아빠 정윤창씨와 엄마 김연실씨는 객실에서 조용히 차웅이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물이 무서워요.” 엄마가 말했다. 부부는 차웅이가 가장 먼저 나와줘서 참사 현장에 가볼 일이 없었다. 이날 처음 그곳으로 차웅이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세월호) 부표가 있을 때 가야지 싶어서…” 물이 무서운 엄마는 용기를 냈다. 엄마는 “진상 규명을 가로막는 시행령 따위로 부모들 악만 남게 한다”며 분노했다. 엄마가 “질투 날 정도로 아들과 친했다”고 하는 아빠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삼일절 아침이면 애들을 일부러 깨워서 함께 태극기를 걸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엄마는 “그 국기를 버리고, 그 자리에 ‘잊지 않겠습니다’가 적힌 4·16 연대 깃발을 뒀다”고 했다. 국가는 스스로 국민을 잃었다. “이 나라에서 꼭 살아야 되나?” 요즘 부부가 나누는 얘기다. 자주 메었던 엄마 목소리에 잠시 생기가 스쳤던 순간, “생존 학생들을 못 보겠더라고요. 근데 차웅이 친구 중에 아파서 수학여행을 못 간 애가 있어요. 걔를 만났는데 친구들이 차웅이한테 ‘살 빼면 얼짱’이라고 했다고 해요.” 1시간30분간의 항해 끝에 배는 이날 오후 5시 넘어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부근 맹골수도에 도착했다.
“얘들아~ 엄마가 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엄마 목소리 들려?” “엄마가 가지 말라니까.”
엄마들은 목숨을 다해 울었다. 목숨을 다해 불러야 아이가 들을까, 온몸의 힘을 짜내 엄마들은 이름을 불렀다. 서로가 서로를 꽉 붙잡지 않으면 검푸른 바다로 떨어질 것처럼, 아빠는 몸부림치는 엄마를 붙잡았다. 울다 지쳐 누운 엄마의 손을 남은 딸은 꼭 잡았다. ‘세월’이라고 적힌 부표는 답이 없었다. 피를 토하는 10분여가 흐르고, 선내 방송이 나왔다. “작별 인사를 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억장이 무너진 부모는 가슴을 치며 마음에 담았던 말들을 토했다. “엄마가 같이 못 가서 미안해….” “엄마 여기 와서 죽을게.” 무정한 대통령처럼 무정한 바다였다.
차웅이 엄마는 차웅이 아빠의 옷자락을 잡고 겨우 객실로 돌아왔다. 한참이 지난 뒤 말을 붙이자 엄마는 “(차웅이가) 떠내려가는 모습이 떠올라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참사 해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서워서 갑판에 나가지도 못했던 엄마는 객실 안에서도 힘들었다. “배에 물이 차올랐을 텐데 얼마나 엄마·아빠를 찾았을까….” 그렇게 엄마는 1년 전 그날을 몸으로 겪었다. “같이 가야 하는데….” 떠나는 배를 멈추지 못하는 엄마는 되뇌었다.
지난 4월16일, 약속의 날이었다. 미지는 민지와 한 약속을 지켰다. 고등학교 3학년이지만 조퇴를 하고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왔다. 광장 한켠에 전시된 사진 앞에서 미지는 한참을 쪼그려앉아 있었다. 단원고 아이들이 1학년 때 반별로 찍은 단체사진이었다. 미지는 사진의 한 귀퉁이에 있는 민지 얼굴과 오래 눈을 맞췄다. 사진 속에서 민지는 웃고 있었다. 미지는 “자꾸 얼굴에 뽀뽀를 해서 ‘하지 마’ 하면 ‘알았어’ 하고 다시 그러곤 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살가운 친구를 잃었다. 초등학교 친구였던 둘은 서울과 안산의 학교를 다녔지만 자주 연락하고 가끔 만났다. “진짜 예뻐요….” 사진을 보는 미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날 오전부터 광화문광장에서 ‘4·16 약속의 밤’ 추모제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광장에 한땀한땀 뜨개질해 한자한자 만든 펼침막이 눈길을 끌었다. ‘아직 세월호에 사람이 있습니다.’ ‘이어 붙이는 농성장’ 활동가 구름은 “22명이 25글자를 한두 자씩 뜨개질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4학년 야니와 2학년 써니도 천막 안에 앉아 손가락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선생님께 편지를 써서 오늘 결석하는 이유를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써니와 야니는 광화문 농성장에 여러 번 와봤다.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에 걸린 펼침막에는 직접 손뜨개한 글자도 넣었다. 며칠 전부터 4월16일 광화문광장에 가자고 했던 써니는 이날 자신의 손구호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가족 품으로’를 골랐다.
‘잊지 않겠습니다.’ 1년 전 약속을 기억하는 이들이 서울광장에 모였다. ‘반별’로 온 이들도 있었다. 2학년2반 허다윤, 2학년3박 박영란, 2학년7반 김기수, 2학년10반 이해주…. 박재동 화백이 그린 단원고 학생들 얼굴 그림을 든 대학생들이 있었다. 얼굴이 담긴 손팻말 뒤에는 손편지도 썼다. ‘아름다웠던 너를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하고 행동할게.’ 대학생 혜영이 누나가 ‘축구를 좋아하고 체육 선생님이 꿈이었던 건우’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그렇게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손에는 하얀 국화를 든 인파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유가족들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믿었지만, 이렇게 많은 국민이 함께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광장 추모제가 끝나고 유가족이 광화문으로 헌화를 하러 가는 길마저 막혔다. 경찰은 광화문 사거리 앞에 차단벽을 쌓고 분향하러 가는 시민들을 막았다. 추모 행렬은 청계천 쪽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경찰은 종로로 향하는 대열을 또다시 막았다. 전경 방어선을 뚫은 시민들이 종각 부근에 이르자 이번엔 경찰차 차단벽이 막았다. 심야의 도심에서 경찰의 해산 명령 방송이 들렸다. 그것은 세월호 선내에서 나왔던 방송과 내용이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여전히 공권력은 어리석은 주문을 반복했다. 어두운 서울 하늘에 노래가 서서히 퍼졌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진도·서울=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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