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걷습니다. 그분들이 없었으면 걷지 못했을 겁니다.”
다시 시작된 고 이승현군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의 순례가 47일째(4월10일 기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7월 십자가 순례(제1021호 ‘길 위에서, 기로에서’) 이후 약 7개월 만에 다시 길 위에 섰다. 세월호 실종자 수습과 인양 촉구를 위해 지난 2월23일 전남 진도 팽목항을 출발한 아버지와 딸은 서울 광화문을 목적지로 ‘삼보일배 30만절’(제1051호 ‘다시 팽목항에서’)을 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354일째인 4월4일, 두 사람은 광주에서 삼보일배 41일째를 맞았다. 이날 순례단은 갑자기 쏟아진 빗속에서도 일정을 강행했다. 궂은 날씨에 약 8.79km를 걷고 절했다. 그 험로를 견디는 힘은 함께 걷는 이들로부터 나온다고 부녀는 말했다. 4월3일 합류한 ‘포항자매’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윤정화·윤연화(제1025호 ‘그들에게 길은 희망이었다’) 자매는 광화문까지 부녀와 함께할 계획이다. 자매는 지난해 7~8월 십자가 순례에도 참여해 18일 동안 같이 걸었다. “고되지만 진실을 향한 길에 동참하는 일이 영광스럽습니다. 세월호 인양과 진실 규명을 위해 끝까지 갈 겁니다.”
215kg의 모형배를 끌기 위해 일요일마다 세종시에서 달려오는 김윤수( 2014년 7월16일치 ‘아무도 세월호 십자가 안 져 우리라도…’)씨도 든든한 지원군이다. 윤수씨 또한 십자가 순례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아버님과 아름씨에게 죄송스러워 매주 내려올 수밖에 없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오는 게 송구스럽죠.”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매일 일정이 끝날 때마다 이호진씨는 동행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한마음으로 한곳을 보고 가기에 우리는 걸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8월, 19살 김선오(제1025호 ‘그들에게 길은 희망이었다’)양은 십자가를 진 아버지들이 전북 전주에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들 웅기(단원고 2학년4반)군을 잃은 아버지 김학일씨를 만났다. 그날 동행한 순례길에서 선오양은 펑펑 울었다. 선오양은 김학일씨와 사흘을 내리 함께 걸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버지와 딸의 인연을 맺었다. 요즘도 선오양은 명절마다 잊지 않고 김학일씨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김학일씨도 선오양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제가 고3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께) 연락을 자주 드리진 못했어요.” 지난 2월 김학일씨를 비롯한 세월호 희생·실종자 가족들이 전주를 다시 찾았다. 선오양도 친구들과 손팻말을 들고 마중을 나갔다. 김학일씨는 선오양에게 “무조건 건강하라”고 늘 신신당부한다.
도보순례를 다녀온 뒤 선오양에게 작은 변화가 있었다. 아침마다 뉴스를 챙겨보게 됐다. 요즘 세월호 희생·실종자 가족들이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을 보면서 “그냥 답답하다”고 했다. 선오양의 꿈은 소박하다. 그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수학여행 같은 걸 가려고 해도 많이 불안하잖아요. 우리나라가 그런 걱정 없이 안전한 곳이 됐으면 좋겠어요.”
지난 2월 말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박소영(26·제1022호 ‘소통 부재의 참사, 반복되지 않도록’)씨는 팽목항을 찾았다. 차창 밖을 보니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이 삼보일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누나 아름씨인지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다가 뒤늦게 삼보일배 순례단임을 알곤 가슴이 철렁했다. “무릎보호대도 착용하지 않고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박소영씨는 일본 지바대학에서 디자인과학을 전공했다. 전공을 살려 세월호 침몰 직후 88시간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을 만들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으로 ‘커뮤니케이션 실패’를 꼽았다. 그는 종종 아버지와 세월호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는 지난해 8월 ‘유민 아빠’ 김영오씨 옆에서 동조단식을 했다. “아빠는 김영오씨 같은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단식했을 거라 말씀하세요. 그래서 저도 김영오씨 보면 아버지가 떠올라요.”
세월호 참사 이후 그의 장래희망은 확실해졌다. 비주얼 저널리스트를 꿈꾼다. 비주얼 저널리스트는 문자 대신 명료한 그림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저널리스트다. “무능하고 허술한 게 다 드러났는데도 고치지 않으면 당장 내일 세월호가 다시 가라앉더라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치유공간 이웃’(이하 이웃)이 문을 연 지난해 9월부터 봉사활동을 한 김지희(38·제1033호 ‘이제 확실히 알아요, 함께의 힘’)씨는 실종·사망한 단원고 학생들의 생일잔치를 도맡아 준비해왔다. “아이의 친구들이 엄마·아빠도 몰랐던 아이의 생전 모습을 들려주면 엄마·아빠들이 많은 치유를 받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자주 화가 난다. 누가 뉴스에 나와 세월호 참사를 두고 이상한 소리를 하면 “엄마·아빠들이 ‘이웃’에 와서 식사하셨던 게 (뉴스를 보고) 다 체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울컥한다. 예전에는 그 화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풀기도 했다. “내 새끼 살아 있어 다행”이라며 안도하다가도 “언니·오빠들 몇백 명이 죽었는데 너희는 어떻게 이렇게 철이 없냐”며 혼냈다. ‘이웃’에 와서야 자신의 화가 세월호를 바라보는 ‘건강한 불안’이란 걸 알게 됐다. 그 깨달음으로 아이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엄마를 따라 ‘이웃’에 나와 언니·오빠들 생일상을 함께 준비하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영어 잘하는 아이로 키울까’에만 관심을 가졌던 김씨는 세월호를 계기로 내 가족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왜 작은 시골 마을에 송전탑이 세워져야 하고, 왜 노동자들은 갑자기 직장을 잃어야 하는지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 설에는 쌍용자동차 굴뚝농성을 응원하는 그림을 아이들과 그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했다.
이승용(43·제1015호 ‘아무리 잘해도 빵점인 일 묵묵히, 끝까지’)씨는 시골 약사다. 그는 명량대첩의 현장인 전라우수영 인근에서 약국을 한다. 세월호 참사 이틀 뒤 의료용품을 지원하며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팽목항과 진도체육관을 오가며 유가족들의 슬픔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승용씨는 네 아이의 아버지다. 세월호 이후 아이들이 더욱 소중하다. “첫째아이가 사춘기인데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져요.”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구나’그는 시골에서 약국을 하며 사람의 소중함을 많이 느낀다. 약국을 찾는 사람들은 대개 노인들이다. “한두 달 안 오시면 돌아가신 거예요. 갑자기 어르신이 안 오시면 안 오신 날들을 헤아려보곤 해요.” 그는 지난해 11월까지 팽목항을 찾아 빨래와 청소를 도왔다. 거의 매일 갔다. 최근 세월호 유가족들이 정부의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를 주장하며 삭발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같이 울었다.
그는 유가족들의 바람처럼 세월호의 진실이 하루빨리 규명되길 바란다. 그는 정확한 진실을 알기 위해 선체의 뒷면을 촬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종자를 수색하는 바지선에 몇 번 갔었습니다. 맑은 물이 들어오면 40m 깊이의 내부가 깨끗하게 잘 보여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페이스북 페이지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제1038호 ‘무엇이 사진인가? 세월호 앞에 묻다’)에는 안산 단원고와 합동분향소, 진도 팽목항, 광화문 농성장 등을 찍은 사진이 매일 10여 장씩 올라온다. 구독자 5천여 명은 그 사진들을 통해 하루하루 세월호를 기억한다.
페이지 운영자 ‘개와 넝마주이’는 “이심전심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페이지”라고 설명한다. 현장에서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사진가들은 ‘우리가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자연스럽게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모인 사진들을 우리 사회의 공적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진’ 페이지를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전자우편을 통해 사진을 보내온다. “사진은 그림과 달리 사진가의 머릿속이나 손끝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사진은 철저하게 대상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카피라이트’(Copyright)가 아닌 ‘카피왓’(CopyWhat)을 묻는 이유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고 인간 앞에 이윤을 앞세운 문화가 세월호 참사를 일으켰다”는 자각도 사진을 통해 공공성을 복원하는 데 동참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다.
누군가에게는 세월호와 관련된 기억이 ‘불쾌하고 불편한 것’일 수 있다. 말과 글로만 전해들어도 가슴 아픈 장면을 사진을 통해 목격하는 것은 더욱 피하고 싶은 일일 수 있다. ‘개와 넝마주이’는 사진을 통해 사람들이 읽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믿는다. “계속 사진을 올려서 사람들에게 ‘잊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이수민(48·가명·제1032호 ‘상처 입은 치유자, 그 새로운 길로’)씨에게도 지난 1년은 치유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과 서울시 치유활동가 집단 ‘공감인’이 공동 진행한 치유 프로그램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트라우마 편’ 집단상담에 참가했다. 그제야 ‘나만 아픈 것이 아니었구나’ 깨닫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슬퍼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있던 그는 비로소 할 일을 찾았다. 세월호 희생·실종자 가족들이 언제든 찾아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방을 안산 합동분향소 옆에 만들었다. 꽃누름 공예로 액자를 만들어 아이들 사진을 담고, 자수로 브로치를 만들어 엄마들 가슴에 달았다. 엄마들이 슬픔을 조금이라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서울에서 안산까지 가는 길도 멀거나 고되게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들을 만나고 오면 마음 아픈 게 더 심해져요. 그 속에 깊이 들어갔다 오면 (엄마들이 느끼는) 아픔이 전해져오니까요. 많이 힘들더라고요, 항상.” 그럼에도 그는 안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안 가면 더 힘들기 때문이다. “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간다고 (엄마들과) 약속했어요.”
정인선·이수현·강예슬* 2014년 하반기 인턴으로 활동했던 정인선·이수현·강예슬씨가 현장 취재 뒤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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