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6월21일 경남 양산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좌천리)에 들어선 국내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원전)인 고리 1호기가 시험가동을 시작한다. 당시 은 그날의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라늄 핵연료에서 핵분열이 시작돼 역사적인 제3의 불이 켜지기에 이르렀다.” 부산 해운대에서 태어난 이진섭(48)씨가 11살 되던 해였다. 해운대는 원전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통근버스의 출발지였다. 월급도 많은데다, 교대근무가 꼬박꼬박 지켜지는 원전은 어린아이가 보기에도 꿈의 직장이었다. 고리 1호기 주변으로 고리 2호기(1983년부터 가동), 고리 3호기(1985년부터 가동), 고리 4호기(1986년부터 가동), 신고리 1호기·신고리 2호기(2011년부터 가동)가 속속 들어섰다.
몇 집 건너 갑상선암, 싹튼 의구심1990년 진섭씨는 박금선(48)씨와 결혼했다. 고리 원전에서 3.5km가량 떨어진 기장군 마을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직장과 처갓집이 가까웠던 까닭이다. 아내는 20살 무렵부터 기장군에서 살았다. 원전 인근 마을은 개발이 제한됐다. 자연환경이 보존될 수밖에 없었다. 조용한 동네가 되레 마음에 들었다. 2년 뒤 부부는 이곳에서 첫아들 균도를 얻었다. 균도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나면서부터 자폐성 장애가 있었다. 아들의 병원 치료를 위해 1993년 10월 경기도로 집을 옮겼다. 2년여간의 타향살이 끝에 다시 기장군으로 돌아왔다. 고리 원전에서 7k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2010년 균도의 고향 바로 옆 마을에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이 설립됐다. 병원은 개원 기념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무료 건강검진을 시행했다. 2011년 진섭씨는 이곳에서 대장암(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초기였다. 가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2012년 2월 이번엔 아내가 같은 병원에서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갑상선을 떼어냈지만, 갑상선호르몬제를 평생 복용해야 한다. “아내를 간호하러 병원에 갔더니 아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원자력의학원은 암 전문 병원이라 입원한 사람들은 보나 마나 암환자 아닙니까. 안내데스크에 농담 삼아 물어봤어요. 이 동네 암환자가 얼마나 되냐고. 개인정보라면서 안 알려주더라고요.” 그즈음 울산지방검찰청은 고리 원전 3호기에 ‘짝퉁’ 부품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짝퉁 부품이 사용된 건 맞으나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자동차도 부품을 잘못 넣으면 멈춰서는데, 방사능이 정말 유출되지 않을까. 우리가 걸린 암, 그리고 균도의 자폐증은 원전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그해 7월 진섭씨 가족 3명은 부산지방법원에 원전 운영 사업자인 한수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지지부진한 소송은 2년간 이어졌다.
한수원, ‘피해 없음’ 입증해야지난 10월17일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민사2부(재판장 최호식)는 “한수원은 원고 중 박금선씨에게 15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다. 고리 원전으로부터 10km 안팎 지역에서 20년 이상 살면서 방사선에 노출돼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원전을 운영하는 한수원이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평상시 가동되는 원전에서 배출되는 방사선으로 인한 갑상선암 발병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한수원은 고리 원전에서 방출한 방사선량은 관련 법령과 고시에서 정한 한도치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지역 주민 건강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이 사건 원전에서 방출된 연간 방사선량은 원자력안전법 시행령이나 원자력안전위원회 고시에서 규정한 연간 유효선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법령에서 정한 연간 유효선량은 국민 건강상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으로 절대적으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수치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진섭씨는 판결문에서 발견한 이 문구를 잊을 수 없다. 방사선량이 기준치 이하니까 영향이 없다고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흔히 손해배상 청구에서 가해 행위와 손해발생의 인과관계는 피해자가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환경문제로 인한 피해를 일반 시민들이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환경오염 소송에서 가해 기업이 ‘피해가 없음’을 입증하도록 한 대법원 판례에 따라 재판부는 한수원에 입증 책임을 부여했다.
방사선 노출은 갑상선암 발병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전이 갑상선암 발병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뜨겁다. 국내에서 원전 인근 주민들의 피폭 피해 가능성이 대두된 건 1989년이었다. 1987년 3월부터 1988년 5월까지 전남 영광 원전에서 일했던 직원의 아내가 ‘뇌 없는 태아’를 두 번이나 사산·유산한 일이 언론 보도로 알려진다. 사회적으로 우려가 커지자 정부는 원전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시 원전을 운영하던 한국전력공사는 영광 원전 인근 주민들의 건강 실태조사를 한 뒤 ‘안전하다’고 밝혔으나 불안감을 잠재우지 못했다. 정부는 서울대 의학연구원 원자력영향·역학연구소에 의뢰해 대규모 역학조사에 나선다. 1991년 12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진행된 이 연구에는 영광·월성·고리·울진 원전 주변 주민과 비교 대상 지역 주민 3만6천여 명이 참여했다. 연구진은 2011년 4월 정부에 ‘원전 종사자 및 주변 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 최종보고서를 제출한다. 그해 12월 원자력위원회는 연구 결과를 공개하며 “원전은 주변 지역 암 발병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원전 5km 이내 여자 주민의 갑상선암 발병률은 원전 30km 이상 떨어진 지역에 사는 경우보다 2.5배에 이른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원전으로 인한 영향은 아니라고 보았다. 연구책임자인 안윤옥 서울대 의대 교수는 “원전 주변 주민들의 건강검진율이 높아 갑상선암 환자가 많이 발견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선을 그었다. 이번 소송이 제기되기 두 달 전, 2012년 5월 대한직업환경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선 같은 서울대 의학연구원 보고서를 놓고 정부가 내놓은 결론과 상반된 내용이 발표된다. 주영수 한림대 의대 교수는 보고서를 재검토한 결과 “방사선에 많이 노출된 종사자들의 염색체형 이상이 건강한 일반 성인보다 높게 나타나 암 발생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변호사조차 기대 못했던 결과
진섭씨 가족 소송대리인들은 재판부에 의료 감정을 요청했다. 변영철 변호사는 “원전에서 방사선이 얼마나 나오는지 우리는 모르지 않나. 2011년 서울대 의학연구원 보고서에 유출량이 기록돼 있더라. 대한직업환경의학회에 해마다 이런 정도의 방사선이 유출돼왔다면 갑상선암 발병과의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물었다”고 말했다. 대학직업환경의학회 임상위원회는 지난 6월 재판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회신했다. “갑상선암의 가장 중요한 위험 요인은 방사선 노출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도 여성들에게서 갑상선암이 유의하게 증가됐다는 보고가 있다. ‘원전 종사자 및 주변 지역 주민 역학조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원전 주변 지역에서의 방사선 노출이 갑상선암 증가의 한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변호사조차 이번 소송에서 이길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저 기장군에 암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자 싶었다. 재판 과정에서 이들의 궁금증을 약간이나마 해소해주는 숫자가 나왔다. 동남권원자력의학원은 2010년 7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기장군민 4910명을 대상으로 종합건강검진을 실시한다. 암 검진을 받은 3301명 가운데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은 94명(2.84%)이었다. 수도권 대형 종합병원 검진센터의 암 진단율의 3배가량 되는 수치다. 암 종류별로는 갑상선암이 41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번 판결로 진섭씨는 더 이상 ‘사기꾼’ 취급을 받지 않게 됐다고 했다. ‘원전이 안전하다’는 믿음이 뿌리 깊은 지역사회에서 다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부산시상수도사업본부는 최근 기장군 기장읍에 바닷물을 식수로 바꿀 수 있는 해수담수화시설을 준공했다. 원전 인근 바닷물을 끌어와 기장군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주민들은 방사선 오염 우려가 있다며 사업 철회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는 이러한 움직임이 반갑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탈핵운동가가 아니라고 했다. “원전을 30년 쓰겠다고 주민들과 약속했으면 그만큼만 쓰고, 제대로 점검해서 안전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아야 합리적인 거 아닙니까?” 진섭씨는 아들 균도로 인해 장애인 복지 문제에 눈을 떴다. 사회복지사이자 장애부모회 기장·해운대 지회장을 맡고 있다.
12월9일 기장군 대라리에 위치한 장애인부모회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옆엔 ‘갑상선암 주민 공동소송 접수처’라고 쓰인 A4용지가 붙어 있다. 사무실은 고리 원전 문제를 고민하는 군민들의 사랑방이 돼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아내뿐 아니라 또 다른 갑상선암 환자들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공동소송을 돕게 됐다. 12월10일까지 고리 원전 인근 주민 약 180명이 한수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원전으로부터 10km 이내에 5년 이상 살거나 근무했던 주민들로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경우다. 집값과 특산물 가치가 떨어진다며 진섭씨 활동을 못마땅해하는 주민들도 있다. 정수희 에너지정의행동 활동가는 지역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주민들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러면서도 지역경제가 원전에 종속돼 있다보니 경제적 피해가 나타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것이다.”
못마땅해하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야죠”
한수원은 이번 판결에 즉각 항소했다. 진섭씨는 고리 원전 인근 주민들에 대해 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건강 실태조사를 해줄 것을 촉구했다. 그렇게만 되면 소송에 나설 까닭도 없다고 했다. 설마설마했던 피해가 판결로 확인됐다. 지금 사는 곳을 떠나고 싶진 않을까. “어쩔 수 없이 사는 거예요. 고향이란 게 그런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왜 후쿠시마로 들어가겠습니까.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서 함께 살아야죠.” 이미 설계수명을 넘긴 채 가동되고 있는 고리 1호기 지척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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