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국가정보원은 지난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정국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다. 국정원은 대통령기록물을 함부로 공개해선 안 된다는 기록전문가들의 지적과 외교적 결례란 우려를 무시한 채 ‘국민의 알 권리’란 논리를 내세워 기밀등급을 낮춰 내용을 공개했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오간 ‘정상 간 대화록’은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돼 유통되는 다른 자료들처럼 취급돼 시중에 떠돌게 됐다.
청와대가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의혹 등을 담은 청와대 문건을 토대로 한 언론 보도가 나간 직후 보인 반응은 두 가지였다. 청와대는 해당 문건이 “찌라시에 나온 소문을 모아놓은 수준”에 불과하다고 강조하면서, 문건 유출자로 의심되는 사람을 상대로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 여부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국격 훼손이란 비판을 무릅쓰고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정부가 스스로 찌라시 수준이라 규정한 문건의 유출에는 즉각적인 검찰 수사를 요청한 것이다.
7년 이하의 징역과 2천만원 이하의 벌금기록물전문가들은 우선 해당 문건을 두고 공공기록물, 대통령기록물이란 표현이 혼재돼 있는데, 이 문건은 대통령기록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얘기한다.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은 “내용이 찌라시 수준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대통령 비서실에서 생산된 것은 대통령기록물”이라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관리법’ 2조는 ‘대통령기록물’을 대통령 또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자문기관·경호업무 수행기관 등에서 생산한 기록물이라고 정의한다. 이번 문건을 작성한 민정수석실이 대통령 보좌기관이니 대통령기록물이란 얘기다.
따라서 기록물전문가들은 청와대가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는 문건들의 유출에 대한 수사를 의뢰한 것 자체는 적절한 조처라고 일단 평가했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누설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상당히 미진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와 별개로 대통령기록물의 안전한 관리를 위해 ‘정윤회 관련 문건’ 유출 경위와 유출 목적 등을 제대로 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기록전문가협회장을 지낸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대통령기록물이 유출된 행위는 심각한 일이다. 대통령기록물법에서도 은닉 또는 유출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과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출된 건 “올해 초”인데문제는 청와대가 뒤늦게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 쪽 인사와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 등의 최근 발언을 종합하면, ‘정윤회씨 국정 개입 의혹 문건’을 포함해 공직기강비서관실에서 작성한 감찰보고서와 동향정보 문건 수백 장이 올해 초 외부로 유출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청와대는 감찰문건에 들어 있는 청와대 행정관 비리 내용이 언론을 통해 지난 4월 보도된 직후 다량의 문건이 유출됐다고 보고 경위 파악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응천 전 비서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건이 대량 유출됐다는 보고서가 지난 5월 말과 6월 초 (윗선에) 올라갔는데도 제대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민감한 내용이 담긴 대통령기록물(감찰보고서 등)이 청와대 담장을 넘어 흘러다니는데도, 문건 유출자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으로 유출했는지, 문건이 어디까지 흘러갔으며, 그 문건들을 추적해 회수할 수 없었는지 등 필요한 향후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다 비선 라인의 국정 개입 의혹이란 휘발성 강한 문건 내용이 최근 보도되자, 검찰 수사를 의뢰하며 뒤늦게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를 연출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박스째 문건이 유출된 것은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이러한 문건이 유출된 것을 김기춘 비서실장이 알았다면 그때 해결했어야 했다”며 김 비서실장 등의 책임론을 거론했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월 말과 6월 초, 문건이 대량 유출됐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필요한 조처를 제대로 하지 않다 언론에 내용이 보도되자 뒤늦게 호들갑을 떠는 모양새를 연출한다는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현재 문건 유출 사건은 검찰 특수부에 배당돼 수사 속도를 내고 있다. 정윤회 관련 문건 등을 작성한 박관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경정)과 그의 상관이던 조응천 전 비서관이 지난 12월4일과 5일 연이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청와대는 자체 조사를 통해 박 경정이 문건을 유출한 주체라고 판단하고 이를 검찰에 알린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도 박 경정을 유력한 유출 혐의자로 보고, 그의 집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하지만 박 경정은 유출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누구인지 짐작되는 ‘제3자’가 자신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와 문건을 빼냈다고 맞서고 있다. 조 전 비서관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5월 말, 6월 초에 박 경정이 아닌 다른 루트로 (문건들이) 유출됐다는 보고서를 민정수석실에 올렸다”고 밝혔다. 다른 유출자가 있는데도, 청와대가 문건 유출의 범인을 정윤회씨 등을 감찰한 박 경정 등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소행으로 몰아세운다는 뜻이다.
진위 공방이 가열되면서, 대통령기록물이 여기저기 떠도는 등 국가 보안 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도 큰 문제지만 국정 개입 의혹에 대한 사실 규명이 이번 파문의 핵심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우려는 여권 내부에서도 나온다.
문희상 “문제의 핵심은 국정 시스템 붕괴”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지금 문제의 본질은 그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이다. 문건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권의 도덕성과 대통령의 투명성, 지도력에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고, 만약에 사실이 아닌데 (국정 개입 의혹이 소문으로) 돌아다닌다면 관리를 잘하지 못한 비서실장이나 청와대 수석 등이 책임을 져야 하는 사안”이라고 말했다. 문희상 새정치연합 비상대책위원장도 “문제의 핵심은 국정 시스템 붕괴, 이 나라가 비선 실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부분이다”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파문이 불거진 뒤 국정 개입 의혹에 대한 확실한 진상 규명과 엄단 의지를 밝히는 대신 “청와대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있을 수 없는 국기 문란 행위”라는 점을 강조했다. 유출 행위에만 국기 문란 딱지를 붙인 박 대통령의 가이드라인 때문에 검찰이 비선들의 국정 농단 의혹의 실체에 과연 다가설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벌써 흘러나오고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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