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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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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은 정해졌다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의혹은 문건 작성하고 유출하고 공방 벌이는,
철저하게 청와대가 저지른 ‘자충수’…어느 정권보다 빠르게 터진 원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비밀주의 리더십’
등록 2014-12-09 15:49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정권 2년차에 핵폭탄급 ‘비선 실세 국정 농단’ 의혹이 불거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정윤회씨가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내용의 청와대 문건이 폭로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박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주변의 ‘비선 실세들’과 관련된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번 ‘국정 농단’ 사태는 철저하게 청와대가 저지른 ‘자충수’라는 점이다. 해당 문건이 작성된 곳도 청와대이고 해당 문건을 유출한 것도 청와대이며 진실 공방을 벌이는 주체도 청와대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박근혜 대통령 본인과 박근혜 대통령의 측근, 박근혜 정권에서 일하거나 일했던 자들이다. 정권을 감시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역할을 해야 할 야당은 오히려 이번 사건에서 이렇다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외돼 있다. 정권 내부로부터 일어난 균열에 여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조기 레임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문제의 근원을 ‘언론 탓’으로 몰아가

이번 사건은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지난 1월 작성한 ‘청 비서실장 교체설 등 관련 VIP 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보도되면서( 11월28일치) 시작됐다. 이 보고서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윤회씨가 지난해 10월부터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1부속비서관, 안봉근 2부속비서관)을 비롯한 여권 관계자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 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보고서에서 정씨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그만두게 할 예정”이라는 발언까지 하는 등 청와대 제2권력자의 인사에까지 관여하는 것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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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도에 대해 청와대는 “보고서 내용은 찌라시를 모은 것에 불과하다”며 관련 내용을 전면 부인하고 와 문건의 유출자를 고소하는 등 강경한 대처에 나섰다. 박근혜 대통령도 12월1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조금만 확인해보면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관련자들에게 확인조차 않은 채 비선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같이 보도를 하면서 의혹이 있는 것같이 몰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윤회씨 관련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면서 문제의 근원을 ‘언론 탓’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러나 ‘찌라시’ 수준의 문건이 청와대에서 공식 보고서로 작성되고 그 내용이 김기춘 비서실장에게까지 보고될 수 있느냐는 점과 청와대가 문건 내용을 제대로 검증해보지도 않은 채 “사실이 아니다”라고 규정한 이유 등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승마 선수인 정윤회씨 딸 문제와 관련해 문화체육관광부에 직접 부적절한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보도( 12월3일치 1면)된 것은 ‘비선 실세 국정 농단’을 넘어서는 수준의 문제로 지적된다. 이는 측근들 스스로 저지르는 ‘전횡’뿐 아니라 박 대통령이 직접 이 전횡에 개입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는 박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청와대에서 유진룡 당시 문체부 장관을 만나 정윤회씨에게 불리한 보고서를 작성한 문체부 체육국장, 체육정책과장의 이름을 언급한 뒤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며 직접 경질을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보도 이후 도 유 전 장관의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 보도했고, 청와대도 12월5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박 대통령의 ‘인사 지시’ 사실을 뒤늦게 인정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직접 일개 국·과장의 인사을 지시한 이유로 “감사 보고 내용 부실”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을 내놓아 급조된 해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문서 유출자 한두 명으로 책임 끝날 일 아냐

궁지에 몰린 청와대는 현재 이 사건을 ‘청와대 문서 유출 사건’으로 단순화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유출자 색출’ 프레임만으로는 청와대 뜻대로 사건이 축소되기 어려워 보인다. 청와대 문서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유출했는지에 따라 비선 실세들 간 ‘권력 암투’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이 사건으로 청와대 문고리 3인방과 뜻을 함께하고 있는 정윤회씨와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지만 EG 회장 간의 권력 암투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박지만 회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진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내용을 김기춘 실장에게 보고한 직후 경질된 점과 이후 박 회장의 육사 동기인 이재수 기무사령관 등 박 회장과 관련된 인사가 줄줄이 밀려난 것도 권력암투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윤회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한 박지만 회장 쪽이 반격을 위해 의도적으로 문건을 유출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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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이나 실세들끼리의 권력 다툼은 보통 정권 임기 말에 불거지기 마련이다. 이번 사건에서 중요하게 지적될 지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창 정책 실행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정권 2년차에 왜 이런 일들이 외부로 튀어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근본적 원인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단순히 문서를 유출한 한두 명이 짊어지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선 실세들의 전횡 의혹 사건이 어느 정권보다 빠르게 터지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비밀주의 리더십’이다. 국정을 운영하는 데 대통령이 누구와 상의를 하고 있으며 결정은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참모는 누구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전부터 꾸준히 지적돼왔다. 정권 초기부터 밀봉인사·불통인사로 인한 각종 인사 파동이 이런 불통 리더십의 문제점을 드러냈지만 박 대통령은 바뀌지 않았고 결국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대통령이 은둔형으로 주변과 소통이 되지 않는다. 혼자 갇혀 있으면 그 사람의 뜻이 뭔지 아무도 모르게 된다. 대통령의 뜻을 모르니 어떤 사람(비선 실세)이 ‘위의 뜻’이라며 전횡을 저질러도 주변에서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것이다. 문고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만이 통로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보좌관 경험밖에 없는 이들이 권력을 갖게 되니 자연히 부작용이 생긴다. 이런 사태가 불거질 수 있는 토양을 박근혜 대통령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간신배’ 키우는 ‘의리파 취향’

또 다른 원인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충성파 사랑’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은 권력에 아부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자를 가장 혐오하는 반면, 자신을 희생하며 절대 배신할 것 같지 않은 충성파에 마음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비밀주의의 원천은 트라우마에 있다. 10·26 이후 아버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사람들이 표변하더라는 피해의식이 폐쇄성을 강화시킨 부분이 있다. 이러한 폐쇄성이 강화될수록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이사도 “훌륭한 보스는 자신의 욕망에 부하(측근)의 욕망을 충성이라는 포장으로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욕망을 교직시키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객관적 조건 혹은 다른 이유로 성취 동기를 가질 수 없거나 성취 전망이 낮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사심이 없는 충성파’가 아니라 ‘호가호위하는 간신배’ 혹은 ‘뒷돈의 창구’가 될 확률이 아주 높다”고 지적했다. 박 대통령의 ‘의리파 취향’이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시민과 의회의 감시’에서 벗어난 이들의 국정 농단을 부추기는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까? 여권에서는 벌써부터 조기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여권 관계자는 “문서 내용이 팩트고 아니고를 떠나 이 건이 터진 것 자체가 이미 레임덕은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이미 문건에 나온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50대 이상 여권 지지층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개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인물들을 쳐내지 않고서는 앞으로는 어떤 인사를 하든 어떤 개혁을 하든 ‘국정 쇄신 효과’는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 같은 비박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문고리 3인방 퇴진론 등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이대로 순항할 수 있을까.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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