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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씨와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씨
그리고 기록자 승현이 누나 이아름씨, 길 위에서의 열하루
등록 2014-07-25 15:00 수정 2020-05-03 04:27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도보순례단이 머나먼 길을 떠나는 이유를 4개의 깃발에 담았다.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 “특별법 제정 진상 규명”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잊지 말아주세요 기도해주세요”. 경기도·충남·전북·전남 등 각 도를 넘을 때마다 깃발이 하나씩 늘어난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도보순례단이 머나먼 길을 떠나는 이유를 4개의 깃발에 담았다. “하루속히 가족 품으로” “특별법 제정 진상 규명”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 “잊지 말아주세요 기도해주세요”. 경기도·충남·전북·전남 등 각 도를 넘을 때마다 깃발이 하나씩 늘어난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세월호 참사로 막둥이를 잃은 두 아버지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길을 걷는다. 단원고 2학년8반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 이호진(56)씨와 2학년4반 고 김웅기군의 아버지 김학일(52)씨다. 7월8일 경기도 안산 단원고를 출발해 전남 진도 팽목항(7월31일 예정)에 도착한 뒤, 대전 월드컵경기장(8월15일)으로 되돌아오는 750km(1900리) 도보 순례길이다. 하루 20~25km씩 39일간 걷는 고된 여정이다. 두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선 승현군의 누나 이아름(25)씨는 날마다 길 위의 단상을 담아 ‘누나의 순례 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은 7월8일부터 매일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hankyoreh21)를 통해 ‘누나의 순례 일기’를 소개해왔다. 첫 발걸음을 뗀 7월8일부터 이들과 함께 걷고 먹으며 밤을 지새운 은 어느덧 안산~팽목항 순례 여정의 절반에 이르는 7월18일까지 열하루간 이들이 느끼고 경험한 ‘길 위의 일상’을, 지난 100일의 기억에 더해 독자들에게 전한다. _편집자


“두 아버지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해 그 아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 단지 이것 하나로 통했다. 아빠가 먼저 아저씨에게 제안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짊어지자.’ 아빠는 전부터 이렇게 생각했는데 혼자 하려니 두렵고 걱정됐다고 했다. 아저씨의 대답은 ‘고맙다’였다. ‘이제야 할 일을 찾은 것 같다.’ 그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2014년 7월11일, 순례 4일째, 충남 천안에서)

닮은꼴 두 아버지

두 아버지의 인생은 닮은꼴이다. 세 자녀를 키웠고 수학여행을 떠난 막내를 차디찬 주검으로 14일, 15일 만에 만났다. 그리고 오늘도 미치도록 아들을 그리워한다.

수학여행 가기 사흘 전인 4월13일, 웅기 아버지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늘 그렇듯 막내아들이 옆에 누워 있었다. 웅기는 삼형제 중 막내다. 서울에서 김밥집을 하며 주말에만 안산 집에 내려오는 아버지 곁을 아들은 항상 맴돌았다.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TV로 스포츠를 시청하면, 곁에서 휴대전화로 예능을 보며 킥킥댔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핀잔을 줘도 아버지 곁을 아들은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혼자서 웃던 아들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이날 아침 아들이 “아빠, 옷 사줘요. 수학여행 가요”라고 했다. 생전 뭘 사달라고 하지 않던 아들이라 아버지는 반가웠다. 캐주얼 브랜드 ‘뱅뱅’ 매장에 가서 옷 한 벌을 사줬다. “돈가스도 먹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들이 이날 참 이상했다. 그 덕분에 점심까지 맛있게 먹었다. 그것이 마지막 식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4월29일 진도 팽목항에 199째 사망자의 인상착의가 붙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줄무늬 남색 남방….’ 아버지가 사준 옷이었다. 안치실에서 만난 아들은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자는 것 같았다. 아니, 집에서 자는 것보다 더 예뻤다. 할머니가 오래 지녔던 묵주를 뻣뻣해진 아들 손에 감아주며 아버지는 기도했다. “아들의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순례길에 나선 아버지의 가슴에는 아들 사진이 걸려 있다. 검은색 안경을 쓴, 단정한 모범생 스타일이다.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나는 모른다. 물이 들어와 물속에서 숨졌는지, 문이 닫혀 산소가 부족했는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고통스럽고 두려웠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무너진다. 벽을 얼마나 긁었는지 손톱이 뒤집힌 아이도 수없이 만났다. 순례길에서 우리 아이들이 겪었을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다. 아들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가는 방법이다.” 길이 130cm, 무게 5kg의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심한 이유다. 아비 된 자로 자식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처절하게 힘든 고비가 와서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차갑게 식어버린 승현이를 품에 안았던 그 순간처럼 영원히 멈춰버릴 것 같던 시간이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다놓았다. 금쪽같은 막내 승현이가 없는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 내일을 걱정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 그 시간을 돌아보니 결국 순간순간 우리 승현이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승현이를 위해 한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없다. 도보 순례도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진도 팽목항까지 기어간다고 한들 우리 승현이는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승현이를 만났을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용서받고 싶어서 오늘도 걷는다. 든든한 동생 둘이 있어서 나는 행복했었다. 하지만 이젠 행복하지 않다. 이 나라가 가족을 무능하게 만들었고 죄인으로 만들어버렸다.”(2014년 7월13일, 순례 6일째, 충남 공주에서)

“내가 대신 해결해주겠다”던 동생

4월30일 새벽 4시30분, 210번째 사망자는 학생증 이승현, 주민등록증 이동현을 지니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떠나며 승현이가 형 주민등록증까지 챙겨간 때문이다. 아마도 제주도에서 친구들끼리 술 한잔 하려는 계획이었으리라.

사고 발생 뒤 15일간 아버지는 차디찬 주검을 수없이 마주했다. 승현이가 살아 있을 확률이 0%라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안치실에 들어서는 순간, 내 아들이 아니길 바랐다.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는 게 그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아들을 찾지 못해 마지막 실종자로 남는 것 또한 무서웠다. 이율배반적인 공포가 최고점에 다다랐을 때 아들이 돌아왔다.

안치실에서 누나는 동생을 품에 안고 오열했다. 살아 있을 때 그랬듯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누나는 8살 어린 동생을 업어 키웠다. 엄마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동생이 안쓰러워서다. 그런 막내가 고등학생이 되더니 듬직해졌다. 누나가 고민을 말하면 “내가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 그 모습에 겉으로는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는 든든한 버팀목을 얻은 듯 든든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유골함을 집에 두고 날마다 바라본다. 그리움은 느닷없이 솟구친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일어나 집 앞 골목에서 담배를 피울 때 그렇다. 학교를 다녀온 아들이 저 골목 끝에서 함박웃음으로 내달려올 것만 같다. 아침 7시20분 식탁에 앉을 때도 그렇다. 아들이 아침밥을 맛있게 먹으며 조잘조잘 이야기를 할 것만 같다.

아버지가 행복을 느끼던 순간순간이었다. 이제는 그 행복이 영원히 사라졌다. 사랑해서 열 달을 품었고 목숨 바쳐 키웠던 17년을 이 나라에 송두리째 빼앗겼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그리울 때면 진도 팽목항으로 달려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그곳에서 당나라 여류시인 설도가 쓴 한시 ‘춘망사’를 읊조렸다.

“꽃이 펴도 함께 기뻐할 수 없고/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그리움은 어디에 있나/ 꽃 피고 꽃 지는 때에 있다네 (중략)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거울 앞에 흐르는 옥 같은 눈물/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이날 아침 아들이 “아빠, 옷 사줘요. 수학여행 가요”라고 했다. 생전 뭘 사달라고 하지 않던 아들이라 아버지는 반가웠다. “돈가스도 먹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들이 이날 참 이상했다. 그 덕분에 점심까지 맛있게 먹었다.


내리쬐는 햇살에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시간당 3km씩 걷다가 두 아버지(왼쪽 김학일씨, 오른쪽 이호진씨)가 잠시 쉬고 있다. 아버지들이 짊어지고 걷는 무게 5kg의 나무 십자가가 옆에 놓여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내리쬐는 햇살에 한껏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시간당 3km씩 걷다가 두 아버지(왼쪽 김학일씨, 오른쪽 이호진씨)가 잠시 쉬고 있다. 아버지들이 짊어지고 걷는 무게 5kg의 나무 십자가가 옆에 놓여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내일 당장 아버지들이 힘들다고 집에 가자고 하면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자랑스런 마음으로 집에 갈 수 있다. 두 아버지는 이미 한마음이 돼 서로 의지하며 걷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져주지만 나중에 그 수가 줄어들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어서다. 아버지들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뿐이다. 이 여정은 아버지가 첫발을 디딘 순간 이미 성공한 것이라 생각한다. 혹시 완주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014년 7월15일, 순례 8일째, 충남 논산에서)

발바닥에 생긴 큰 물집, 햇빛 알레르기

7월8일 안산 단원고를 나설 때 유가족 도보 순례단은 6명이었다. 유가족 3명과 기자 2명, 페이스북을 보고 배웅 나온 이상길(66)씨였다. 길잡이도, 의료 지원자도 없었다. 오후 4시에 출발한 이들은 밤 10시에 가까워서야 첫날 목적지인 경기도 화성시 면목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낯선 마을에서 순례단은 잘 곳을 구하지 못했다. 성당은 멀고 교회는 잠들었다. 할 수 없이 모텔에서 몸을 뉘었다. ‘너무 무모한가.’ 두 아버지는 생각했다. ‘발걸음을 되돌리지 마세요.’ 아버지들이 짊어진 십자가와 깃발에 나부끼는 수십 개의 노란 리본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단원고 생존 학생들이 직접 쓰고 묶어준 것들이었다.

다음날(7월9일) 두 아버지는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둘쨋날 목적지인 화성시 양감면으로 향했다. 호위 차량 없이 걷는 39번 국도는 위험했다. 대형 트럭이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데 두 아버지가 걷는 갓길의 폭은 1m도 되지 않았다. 트럭이 지나갈 때면 모자가 벗겨질 만큼 먼지바람이 일었다. 게다가 도보 순례단은 겨우 5명. 이들이 보폭을 좁히며 걸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최단거리인 39번 국도를 포기하고 순례단은 우회했다. 길잡이는 스마트폰 지도 앱이 맡았다.

해가 떠오르자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로 발바닥이 달아올랐다. 내리쬐는 햇살에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웠다. 잠시 그늘에 앉아 승현이 아버지가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발이 벌게져 있었다. 찬물을 발에 끼얹으며 식혔지만 발바닥에 큰 물집이 생겼다. 웅기 아버지는 햇빛 알레르기가 나타났다. 두 팔에 땀띠처럼 붉은 발진이 보이더니 진물이 흘러나왔다. 낯선 길에서 물 한 병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이아름씨가 이날 이렇게 일기를 썼다. “둘쨋날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힘들다니, 어떻게 40일을 지낼까 무서워졌다.” 순례단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오전 10시30분, 오후 3시30분부터 저녁 7시까지만 걷기로 결정했다.

이아름씨는 날마다 길 위의 단상을 담은 ‘누나의 순례 일기’를  페이스북(www.facebook.com/hankyoreh21)에 올린다. 동생 이승현군의 사진을 목에 걸고 길을 걷는다.

이아름씨는 날마다 길 위의 단상을 담은 ‘누나의 순례 일기’를 페이스북(www.facebook.com/hankyoreh21)에 올린다. 동생 이승현군의 사진을 목에 걸고 길을 걷는다.

둘쨋날부터 반가운 지원의 손길이 이어졌다. 잠자리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지원했다. 한 끼 식사라도 제공하고 싶다며 에 문의가 쏟아졌다. 길 위에서도 그랬다. 출근길에 순례단을 지나쳤던 한 30대 남자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얼음물과 아이스크림을 전했다. 이름을 물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뒤돌아섰다. 그의 눈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지친 아버지가 자판기 커피를 찾자 슈퍼마켓 아주머니는 손수 커피를 타서 내왔다. 순례단이 지나는 길목을 미리 지켰다가 아침밥으로 먹을 빵과 우유를 건네는 시민도 만났다. 두 아버지는 어김없이 두 손으로 받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아름씨는 눈물을 훔쳤다. “날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그래서 날마다 슬프기도 하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많은데 나는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국가가 바뀌지 않았음은 길 위에서도 드러났다. 두 아버지를 미행하던 사복 경찰(공주경찰서 정보관)이 7월13일 공주시 정안면에서 꼬리가 잡혔다. 순례단은 이날 오후 5시20분쯤 23번 국도를 이용해 광주 시내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이때 스타렉스 차량이 2시간 가까이 속도를 늦춘 채 따라오는 것을 두 아버지가 발견했다. 이 차량에는 30대 남자가 혼자 타고 있었다.

“윗사람 시키는 대로 한 게 뭐가 잘못이겠나”

웅기 아버지가 행진을 멈추고 차량에 다가가서 “누군데 따라오느냐”고 따졌다. 30대 남자는 “따라가는 게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목격했는데 무슨 소리냐. 경찰 맞지 않느냐”고 재차 물었고, 그제야 “공주서 정보보안과 경찰이다. 도와주려고 왔다”고 해명했다. 아버지가 동행하던 기자에게 취재를 요청하자 정보과 경찰은 차량을 몰고 급히 사라졌다. 다음날(7월14일) 공주서 정보과장 등은 새벽 5시30분에 출발지로 찾아와 “불법 미행이 아니라 초보 정보관의 실수”였다고 사과했다. 두 아버지는 “재발 방지를 바란다”고 했다. “미행하다가 걸린 말단 정보관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 윗사람이 시킨 것을 따른 것밖에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둘쨋날부터 반가운 지원의 손길이 쏟아졌다. 길 위에서도 그랬다. 출근길에 순례단이 지나쳤던 한 30대 남자가 되돌아와 얼음물과 아이스크림을 전했다. 이름을 물었지만 손사래를 치며 뒤돌아섰다. 그의 눈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아버지와 나, 어찌 보면 무식하게 셋만 믿고 시작한 여정을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 있다. 이제는 헤어짐이 먹먹한 인연마저 생겼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길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아버지들에게 큰 힘이 되리라.(2014년 7월17일, 순례 9일째, 전북 익산에서)

함께 걷는 시민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7월17일부터 100명을 넘어섰다. 순례단의 행보를 전하는 페이스북을 보고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몇 시간 함께 걸으려 왔다가 며칠씩 동행하는 경우가 생겼다. 대전에 사는 최정혜(50)씨와 오세란(47)씨는 7월13일 오후 천안에서 처음 함께 걸은 뒤 17일까지 닷새간 공주·논산과 전북 익산을 동행했다. 유부초밥, 오이, 방울토마토, 오미자차 등 아침밥까지 챙겨왔다. 오씨는 “진상 규명을 바라고, 실종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들과 걷다보니 나도 위로를 받는다. 팽목항에 도착하는 날, 다시 동행할 생각”이라고 했다. 충북 청주에 사는 30대 이아무개씨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순례단에 합류했다. 그의 자전거 순례는 사흘간 계속됐다. 천안에 사는 마라토너이자 한의사인 김삼태(54)씨는 7월11일부터 아침에는 길잡이로, 저녁에는 주치의로 활약한다. 시인 안도현씨 등 전북작가회의에서는 7월20일까지 전북 지역을 함께 걷고 호위 차량 등을 지원한다.

시민 100여 명이 마중나온 익산

7월17일 저녁 7시께 이날 목적지인 전북 익산 목천교차로에는 두 아버지를 기다리는 익산 시민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승현이 아버지는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뿐 아니라 국민에게 분노의 끝이 보이지 않게 했다. 그러나 순례단의 천릿길은 감동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감격했다. “먼 훗날 좋은 날, 행복한 날이 오면, 그때 오늘의 감동을 조각조각 끄집어내 고마움으로 되새기겠다.” 8일간 순례단과 동행했던 김삼태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의 힘있는 목소리가 떨림과 울림으로 뒤엉켰다. 승현·웅기군이 모든 아버지의 아들로, 두 아버지는 모든 아들의 아버지로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안산·화성·평택·아산·천안·공주·논산·익산·김제=글 이아름 세월호 희생자 가족·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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