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공포 작가’가 살기 힘든 시대를 만들고 있다. 김종일 공포 장르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요새는 작가들이 공포 장르를 쓸 필요가 없어요. 현실 공포가 더 크니까. 보통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지의 공포가 가장 큰 공포라고 하죠. 한밤중에 문 긁는 소리가 나는데 문 뒤에 누가 있을지 모르는 공포 같은 것. 불길한 일이 계속 일어날 것 같은 공포감이죠. 또 하나는 고속도로에서 차가 미끄러져 사고 날 게 뻔히 보이는데 내가 어찌할 수 없어 당하는 공포 같은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위험 상황을 무력하게 맞이하는 공포죠.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만드는 공포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죠.”
<font size="3"><font color="#006699">‘13일의 금요일’ 개각</font></font>수백 명이 숨진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의 무능, 민심과 동떨어진 국무총리 후보자 잇단 지명,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유임, 대통령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측근 중심의 내각 개편까지. 김 작가는 대통령이 민심의 뜻과 무관하게 상황을 밀고 나가며, ‘문 뒤의 불길함’을 계속 증폭시키고 있다고 봤다. 박 대통령의 공포 구성력에 위협을 느끼는 공포 작가들의 눈엔 내각 개편 발표일이 공포 장르의 오랜 소재인 ‘13일의 금요일’과 겹치는 우연마저 들어온다.
6·4 지방선거 이후 박 대통령의 총리·내각 인사를 본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두 문장으로 총평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4월16일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심판론이 작동한 지방선거 결과를 오독했거나, 무시했다는 얘기다. 비교적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려는 여권 인사는 “대통령이 국민과 싸우려 해선 안 된다”고 걱정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10일 문창극 전 주필을 국무총리 후보자, 이병기 주일대사를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문 후보자는 앞서 총리로 지명된 안대희 전 대법관이 ‘슈퍼 전관예우 논란’에 막혀 5월28일 자진 사퇴한 이후 나온 카드다. 문 후보자가 과거에 쓴 칼럼과 강연 내용이 “극보수·강경우익” “친일사관”이란 비판을 크게 불렀지만, 박 대통령은 지난 6월12일 청와대 정무·경제·민정·교육문화 수석 교체, 13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 등 각료 17명 중 7명을 바꾸는 중폭 개각을 단행했다. 문 후보자를 버리지 않고 ‘돌진’하겠다는 뜻이다.
문 후보자가 지명됐을 때 정치권에선 “뭐, 누구?”란 반응이 많았다. 그만큼 의외의 인사였다. 그가 글(칼럼)과 말(강연)로 남긴 흔적을 따라 실체에 다가갈수록 여론이 악화됐다.
그가 2011~2012년 교회 강연에서 “일본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 “조선민족의 상징은 게으른 것”이라고 말한 내용들이 알려지면서, “총리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감도 못 된다”는 격앙된 비판이 쏟아졌다. 서유석 호원대 교수(철학)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역사와 민족성을 깎아내렸던 것과 같은 친일사관이 보인다”고 말했다. 문 후보자 쪽에선 “(강연은) ‘한국사의 숱한 시련들은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들이었다’는 내용이었다”고 반박했지만,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맥락이 그렇더라도 표현을 그렇게 하면 국민 정서가 상처를 받는다”고 말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공짜 점심… 김석기를 살려라…</font></font>
그의 현대사 인식도 반발을 불렀다. ‘제주 4·3은 냉전시대에 미군정까지 가담한 양민 학살’이란 역사적 평가가 나오는데도, 문 후보자는 “4·3은 폭동”(2012년 교회 강연)이라고 규정했다. 또 지난해 4월 서울대 강연에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해 일본의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 전해진 뒤, 일본 우익 세력들이 ‘문 후보자 지명’을 반기는 반응이 나오는 지경이 됐다.
문 후보자 지명 직후 가 지면을 할애해 그를 ‘온정주의 보수주의자’라고 엄호했지만, 그의 예전 칼럼이 ‘극보수’로 쏠렸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그는 2011년 ‘공짜 점심은 싫다’는 칼럼에서 무상급식을 ‘사회주의적 발상’이라 칭하면서 “공짜 점심을 먹기 위해 아이들이 줄을 서는 것”을 식량배급을 타려고 줄을 서는 북한 주민과 같다고 빗댔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인 이상이 제주대 교수는 “문 후보자는 경쟁 위주, 시장 만능주의, 반복지 성장주의로 사회를 바라보는 강고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이자, 강경 우익적 사고를 가졌다”고 평했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복지와 성장이 적대적 대립이 아니라, 복지에 더 투자하고 소득이 균등히 분배될수록 경제성장에 유리하다는 의미의 ‘복지·성장 통합개념’이 확대되는 게 세계 흐름이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최저임금을 끌어올리고 복지를 강조하는 추세다. 세월호 참사 이후 시장 만능, 성장 지상주의를 교정해야 한다는 흐름과 정반대되는 인물이다.”
문 후보자는 2009년 철거민들이 죽은 서울 용산 참사 과잉 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에 대해 ‘김석기를 살려야 한다’는 칼럼으로 보호막을 쳐주기도 했다. 용산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을 연출한 김일란 감독은 “용산 참사와 세월호 참사 모두 국가 시스템의 불능과 오작동이 빚은 결과다. 용산 참사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세월호 참사 이후 총리로 지명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라고 했다.
문 후보자가 전직 대통령들이 위중(김대중)하거나, 서거(노무현)했을 당시 폄훼성 칼럼을 썼던 점을 들어, “총리가 되면 국민 통합이 아니라 국민 갈등을 조장할 것”(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란 격앙된 목소리도 나왔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문 후보자는 지난해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에 공모해 떨어졌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 탈락자가 국정 2인자가 되려는 상황이다”라고 우려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대통령 눈물 닦아준’ 사람, 경제부총리로</font></font>박 대통령은 ‘민심을 향한 도발적 인사’란 평가까지 나오는 후보자를 왜 총리로 지명했을까? 여권 일부에서도 ‘통합형 총리’를 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여권의 한 인사는 “문 후보자가 정치·행정을 제대로 알까? 그걸 아우를 능력이 있을까 의문이다. 낙마한 안대희 전 대법관과 달리 재산 문제 등이 적은 청문회 통과 맞춤 인사를 고른 것 같다”고 짐작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정희대통령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을 당시 문 후보자가 재단 이사였던 인연으로 추천됐을 것이란 주장부터, 서울고 출신인 문 후보자가 박근혜 정부 들어 입각이 늘어난 서울고 출신 파워의 ‘핵심 줄’을 탔다는 설까지 무성하다.
천호선 대표는 언론인 출신을 총리로 기용한 것을 두고 “대통령이 뭔가 자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억울해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입장을 잘 전할까란 퇴행적 기준에만 맞춘 인사다”라고 말했다. 정상호 서원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화합형 총리 등을 바라는 당의 일부 의견까지 무시한 것은 대통령 주도로, 청와대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권력 누수(레임덕)가 생기지 않도록 임기 말까지 국가개조론을 강력하게 끌고 가려는 생각”이라고 짚었다. 문 후보자도 지명 직후 기자들에게 “책임총리는 처음 듣는 말”이라고 하는 등 총리가 돼도 ‘대독총리’에 그칠 것이란 우려를 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사퇴 요구가 빗발치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곁에 두는 동시에 ‘친박(박근혜계) 핵심’들을 청와대와 내각 안으로 불러들여 대통령 보좌 체제를 굳건히 했다. 특히 지방선거 막판에 “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자”고 발언한 최경환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경제사령탑인 경제부총리에 앉혔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최 내정자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경제 부흥을 이뤄낼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박근혜 대선 캠프 시절 김종인 당시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추진한 경제민주화 법안을 반대했던 ‘친박 측근’인 안종범 새누리당 의원도 경제수석에 임명됐다. 이상이 교수는 “박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한국형 복지국가 등의 모든 그림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우리 사회 지배계층의 주류 사상인 ‘성장 중심주의’에 포획돼 있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이병기의 국정원, 좀더 정교하게 개입?</font></font>외교관 출신인 이병기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정치공작원’이란 오명을 쓴 국정원을 쇄신해야 할 책임을 떠안았다. 국정원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통일대박론을 강조한 박 대통령은 임기 중반 이후 대북 관계에서 성과를 내고 싶을 것이다. 이 후보자가 대북강경파(매파)들과는 좀 다른 ‘비둘기파’로 평가받고, (북한과 접촉이 있는) 일본 사정도 잘 아는 일본통인 것도 국정원장으로 선택된 요인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문창극 총리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으로 시끄러운 사이, 국정원장 후보자를 어물쩍 통과시키려는 이른바 ‘성동격서 전략’(동쪽을 시끄럽게 해서 서쪽을 친다)에 말려선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 후보자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한 ‘북풍’ 공작 사건을 일으킬 때 안기부 2차장을 지낸 이력 때문이다. 이 후보자는 2002년 한나라당이 다른 대선 후보를 매수하기 위해 불법 대선자금을 전할 때, 자금의 단순 전달자를 넘어 불법자금 전달을 모의했다는 의혹도 산다. 국회 정보위원회의 한 야권 인사는 “이 후보자가 부드러워 보이지만, ‘이병기의 국정원’이 좀더 정교하게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내각 개편을 단행한 박 대통령은 6월21일까지 중앙아시아 순방을 한다. 문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라는 새누리당 일부 초선 의원들의 공개 표명은 ‘작은 반란’ 정도로 묻히는 분위기다. 2010년 서울대 강의 시절 학생들로부터 강의평가 10점 만점에 3점을 받았다는 문 후보자는 한 나라의 총리가 되기 직전에 있다. ‘공포 작가’의 밥줄이 위태로운 시대에 사는 또 다른 공포 작가는 걱정 끝에 말을 꺼냈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무서운 것은 공포가 풍선처럼 계속 부풀어오르면서 공포가 계속 쌓일 때다. 그런데 공포가 극대화되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 공포까지는 참는다. 조용한 비명을 지른 정도겠지. 그런데 공포 분위기에 억압되던 관객이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이르면 결국 크게 비명을 지른다. 우리 사회에서 비논리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거기에서 생기는 공포가 축적되면 침묵하는 다수가 결국 비명을 지르게 될 것이다. 그땐 정권에 더 큰 부담이 되겠지.”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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