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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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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대에 오른 ‘재난 이후’의 한국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월호 참사…

재난이 훑고 간 상처 되짚는 방식에 대한 고민 필요해
등록 2014-05-02 09:28 수정 2020-05-03 04:27

그래도 살아야 한다. 재난의 상처가 가혹한 이유다. 세월호 침몰 사고라는 대형 재난이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충격파를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어쩌면 재난 뒤의 길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맞은 우리에게 ‘재난 이후의 사회’에 대한 또 다른 단서가 될 수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는 제2차 세계대전 뒤 패망의 절망 이후 일본 국민이 켜켜이 쌓아온 ‘국가를 향한 신뢰’를 무너뜨린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핵발전소를 두고 일본 정부는 잦은 혼선을 빚었고, 시민 안전과 직결하는 중요한 정보는 제때 알려지지 않았다. 세월호를 버리고 떠난 선장과 가라앉는 배를 두고 우왕좌왕했던 우리 정부의 모습과 겹친다.

3·11과 4·16, 겹쳐지는 장면들

“당신이 기술쟁이(전문가)야? 기술을 알고 있는 자를 불러!” 2011년 3월11일 오후 5시, 일본 도쿄 총리 관저 집무실에서 고성이 흘러나왔다. 진도 9.0의 해저 지진에 영향을 받아 몰려온 쓰나미의 직격탄을 맞은 후쿠시마 제1원전 1·2호기가 가동을 멈춘 지 3시간이 지났다. 혼란에 휩싸인 간 나오토 당시 일본 총리는 사고 상황을 설명하려고 달려온 데라사카 노부아키 원자력안전·보안원장(우리나라의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장)을 앞에 두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경제산업성(우리나라의 산업통상부) 산하 기관인 원자력안전·보안원의 데라사카 원장은 경제산업성 사무직 관료 출신으로 핵발전 전문가가 아니었다. “뭐라고? 몰라? (도쿄전력) 사장을 불러!” 공학도 출신인 간 총리는 답변을 제대로 못하는 그를 몰아붙였다. 총리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사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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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재난은 일반적으로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태풍·홍수 등의 자연재해와 화재·붕괴·폭발 등 사고’를 말한다. 그런 점에서 후쿠시마 핵발전소를 덮친 쓰나미는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위기에 빠진 핵발전소와 그 주변에 사는 주민들에게 적절한 조치가 내려지지 않은 건 ‘인재’였다. 사고 뒤 드러난 진상보고서에는, 바닷물이 들어차 정전 상태가 된 원자로의 위험 상태를 판단해야 할 정부 담당자는 자리에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사고대책본부에는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데 필요한 기본 정보 자료조차 없었다.

사고 당시 책임자였던 요시다 마사오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 소장은 끝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도쿄전력 직원들은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원자로의 수증기를 내뿜는 밸브를 열기 위해 원자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고 현장에 남아 방사선량 등을 측정하는 임무를 맡아야 했던 원자력안전·보안원의 보안검사관들은 사고의 위험성이 커지자 3월14일 저녁 방재가 가능한 차량을 타고 발전소에서 빠져나왔다. 현장과 떨어져 있는 긴급사태 응급대책 거점시설(오프사이트센터)로 피신한 탓에 정부는 사고 초기 모든 현장에서 방사능의 유출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도쿄전력 협력기업 기술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데 눈앞의 속도계, 내비게이션, 헤드라이트 등 모든 계기 표시가 다 없어져 버린 것과 같았다. 물론 가로등도 없는데 고속도로를 시속 150km로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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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책임한 것은 직원만이 아니었다. 사고에 대비한 매뉴얼조차 형편없었다. 사고 직후 정부는 방사능의 영향이 심각해지자 주민 대피령을 준비했다. 방사능 누출 상황을 감안해 후쿠시마 제1원전 20km 반경에 주민 대피령을 내리려 했지만, 사고대책본부에는 20km 행정구역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가 없었다. 사고 매뉴얼에도 10km, 30km 형식으로 구분한 지도만 존재할 뿐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행정구역을 알 수도 없던 정부는 3월12일 오후 5시 원자력안전·보안원의 보안검사관에게 20km 이내 지역명과 인구를 즉각 조사하고 주민을 피난시킬 경우 어떻게 되는지 시뮬레이션을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피난 준비는 그만큼 늦춰졌다. 더 치명적이었던 건, 방사능의 영향을 예측하기 위해 구축해둔 프로그램(SPEEDI)은 그 결과물이 정부 안에서 제대로 공유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 총리도 모른 채, 사고 지역 주민들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정부 잘못 지적하는 정부 보고서

사고 뒤 가장 크게 불거졌던 문제는, 간 나오토 총리가 직접 사고를 지휘하면서 엉망이 된 지휘체계였다. 그는 사고가 벌어진 뒤 곧바로 현장을 파악하기 위해 후쿠시마 제1원전으로 갔다. 요시다 소장은 사고 뒤 “총리의 방문으로 시급하게 진행하던 벤트(원자로 내의 수증기를 배출하는 작업) 작업이 2시간 정도 지체됐다”고 말했다. 현장을 믿지 못한 간 총리는 현장 전문가 대신 직접 상황 지시를 시작했다. “노심용융이 진행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간 총리는 자신을 통하지 않는 보고를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 뒤 각 부처는 총리에게 보고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연출됐다. 도쿄전력의 한 협력기업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원자로에서 수소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건물에 구멍을 내서라도 물 공급이든 뭐든 제꺽제꺽 해나가야 할 때 그 사건을 계기로 그런 것들을 먼저 총리 관저와 의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버렸다.”


“우리 사회도 재해의 의제가 정치·경제·사회·문화·문학·언어·의료·공학·복지·재정·환경·민관관계·예술 등으로 다변화해 정부가 중심이 된 거버넌스 형태의 재해 관리가 필요하다.” -고려대 일본연구센터의 김영근 교수(국제정치경제)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이 대중에게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사고 뒤 민관에서 만든 보고서 덕분이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뒤, 일본에서는 정부의 ‘사고조사검증위원회’와 일본재건이니셔티브(RJIE) 등 시민사회가 중심이 된 ‘후쿠시마 원전사고 독립검증위원회’, 도쿄전력이 제3자를 초빙해 운영한 ‘후쿠시마 원자력사고조사위원회’, 그리고 국회에서 구성한 ‘사고조사위원회’ 등 모두 4개의 위원회가 사고의 문제점을 조사했다. 보고서를 통해 사고의 원인도 입체적으로 짚을 수 있었다. 정부 보고서는 “국가와 도쿄전력이 예상을 초월한 쓰나미에 의한 중대 사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독립검증위원회는 “정부의 대응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도쿄전력의 사고조사위원회는 “총리 관저의 개입이 혼란을 부추겼다”는 주장을, 국회 사고조사위원회는 피해자 설문조사 등을 진행해 사회적 파장이 어땠는지 등의 결과물을 내놨다.

다각적인 재난 이후의 연구

그러나 일본 사회는 사고 원인을 파헤쳐서 정부의 잘못을 따지는 분석에 머물지 않았다. 학계 등 민간 영역에서는 재난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관점에서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 간사이대 사회안전학부가 3년 넘게 진행해온 ‘3·11 대지진 연구’가 있다. 1995년 한신·아와이 대지진 이후 생겨난 이 학과에서는 방재 전문가뿐만 아니라 공학자, 의학 전문가 그리고 경제·경영 전문가와 안전 사상학자 등이 모여 재난 이후 사회가 겪는 위기에 대한 복합적인 연구를 벌이고 있다. 재난이 벌어진 뒤, 피해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지원이 필요하며, 공동체 파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 언론 등의 보도는 얼마나 적절했는지 등에 대한 결과물을 내놓고 있다.

주필 출신인 후나바시 요이치 일본재건이니셔티브 이사장은 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기에 직면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원자로의 냉각 안정과 방사능 봉쇄, 그리고 주민 피난. 해야 할 일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각 부처 모두 무익한 부담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가가 정할 일이라며 자신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의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통감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를 겪은 뒤, 박근혜 정부는 관계 부처에 민간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등 ‘안전혁신 마스터플랜’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단순히 정부의 재난 시스템만 손보는 것으로는 사회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나타난 정부의 무능함뿐만 아니라 선박업체의 안전 불감증, 그리고 언론 등이 보여준 재난에 대한 감수성 부족, 사고 당사자뿐만 아니라 대중이 겪은 트라우마 등의 문제를 복합적으로 진단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포스트 3·11과 인간: 재난과 안전·그리고 동아시아 연구팀’에 참여하고 있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의 김영근 교수(국제정치경제)는 “일본에서는 1995년 한신·아와이 대지진 이후 재난에 대한 꾸준한 연구물을 축적해뒀기 때문에 그만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다. 우리 사회도 재해의 의제가 정치·경제·사회·문화·문학·언어·의료·공학·복지·재정·환경·민관관계·예술 등으로 다변화해 정부가 중심이 된 거버넌스 형태의 재해 관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문·사회적 방식의 해결도 필요

실제로 일본은 정치적 우경화 색채가 강해지는 등 이른바 ‘폐쇄사회’로 가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일본 사회 안에서 안전한 나라라는 신화가 깨지고 자위대의 헌신적인 활약을 확인한 대중의 인식이 변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만큼 재난의 후폭풍은 크다. 송완범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교수(역사·사상)는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사고는 정부 자체에 대한 불신이 높게 표출됐다는 점에서 일본처럼 폐쇄사회로 진행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그러나 그동안 공학적 접근으로만 그쳤던 재난을 인문·사회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시도조차 없다면, 한국형 재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재난 이후 한국 사회가 시험대에 올랐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참고 문헌

(오시카 야스야키·2013), (후나바시 요이치·2014), (다케나카 헤이조 등·2012), (마쓰오카 슈운지·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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