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상 시간문제인 주5일제 근무…여가활동의 비약적 발전이 사회·경제적 변화 주도할 듯
주5일근무제 도입을 둘러싼 노사정 사이의 오랜 합의시도가 △임금보전 방안 △할증률문제 △실시 시기 등 핵심쟁점을 절충하지 못한 채 일단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합의 실패가 곧바로 주5일근무제 도입 무산을 뜻하는 건 아니다. 정부는 일단 노사정위원회 공익위원안을 토대로 단독입법 절차를 밟아 올 11월 정기국회 또는 늦으면 내년 2월 임시국회 때까지 법안 처리를 시도하고 그동안 막판 합의 노력을 계속 기울이기로 했다. 앞으로 정부안 마련과 국회처리 과정에서 노사 양쪽의 대립과 반발이 예상되고 나아가 끝내 좌절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겠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주5일제 도입은 사실상 ‘시간문제’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다.
가사노동 대체 서비스 급성장할 듯
주5일제는 여가시간 증가에 따른 내수확대를 통해 경기부양을 꾀하겠다는 당국의 의도 못지않게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에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주5일제가 불러올 사회·경제적 변화상은 어떤 것일까?
우선 노동과 여가의식의 변화다. 전세계는 인간답고 풍부한 삶을 위해 ‘더 짧은 노동시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지난해 프랑스가 주당노동시간을 35시간으로 낮춘 데 이어 독일에서는 주4일근무제(주 32시간) 도입이 논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자는 오로지 ‘노동만 하다 세월을 다 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한국의 연간 노동시간은 지난 99년 2497.4시간으로 국제노동기구 75개 국가 중 7번째로 많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대부분 연간 1400∼1800시간)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노동자는 일에 ‘충분히 지쳐 있으므로’ 여가를 그만큼 잘 누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시간부족 탓에 못했던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게 되면 “밤잠 안 자고 일해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주5일근무냐”고 말하는 사람도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우리보다 주5일근무가 7년여 앞선 일본이 이를 보여준다. 고도성장기에 ‘노동만이 곧 생산’이라는 관념에 휘둘려 일의 노예로 살아온 일본 노동자들 사이에 ‘일로부터의 해방’이나 ‘여가도 생산’이라는 생각이 몸에 배고 있는 것이다. 노동중독에서 탈피한, ‘여유의 생산성’에 대한 발견이다. 프레드 톰슨은 <폴 라파르그 일과 여가; 전기적 에세이>에서 이를 노동자의 상상력으로 표현했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멈추어 서서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근육과 감각을 사용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동료들과 함께 건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기획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가패턴에서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2000년 통계청 사회통계조사보고서를 보면, 고용형태에 상관없이 한국 노동자의 여가생활은 1위 TV시청, 2위 휴식·수면, 3위 가사 잡일로 나타났다. 건강관리, 학습, 지역사회활동 참여 등에 쓰는 시간은 거의 없다. 게다가 여행을 가더라도 여행지에서조차 그저 ‘유흥’으로 보내기 일쑤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으로 소진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틀을 쉬더라도 여가시간을 돈 쓰는 데 바치는 금전소비형 여가가 당장은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캠핑을 가는 등 취향에 맞게 시간을 적절히 소비하는 시간소비형 여가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숙희 박사는 “처음에는 이틀을 쉰다는 해방감에서 지나친 소비위주의 여가로 흐를 수 있겠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또는 가족에 맞는 건전한 여가 형태를 찾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가사노동을 대체하는 탁아소, 청소대행, 반찬판매업 등도 성장하고, 전문적 노하우를 가진 서비스기업에 가사업무를 아웃소싱하는 생활패턴이 점차 자리잡게 될 것이다. 여가시간 확대에 따른 소비지출 증가를 감당하기 위해 여성들도 취업에 나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외계층의 상대적 박탈감도 우려돼
게다가 여가활동이 급속히 고급화, 다양화, 대중화되면서 소수의 마니아중심으로 이뤄지던 여가활동도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가족단위의 여가생활을 자문해주는 단기 여가컨설팅업의 새로운 등장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원은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대부분 여가를 TV시청이나 수면으로 보내고 있지만 주5일근무가 도입되면 여행, 스포츠, 게임 등 체험형 여가수요가 확대될 것”이라며 “문화, 예술, 레포츠, 건강 등 특정 이벤트와 연계된 여행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정부 발표대로 내년 3월부터 주5일 수업제가 시범실시되면 시간제약에서 벗어난 가족중심의 주말여행이 정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들은 노동시간단축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려고 노동강도를 높이면서 한편으로는 성과위주의 인사관리를 더욱 강화할 게 뻔하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도 여가시간을 그저 즐기는 것보다는 어학, 정보기술(IT) 등 업무능력 향상을 위한 자기계발에 투자하고 이는 학습시장 확대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또 한 가지, 늘어난 여가시간에 쓸 자금 압박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중직업’을 갖는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평일 밤 시간과 주말 이틀을 슈퍼마켓 등지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여가시간 확대가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고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족에게 ‘여가 스트레스’를 주는 것으로, 소득이 낮은 계층이나 소외계층은 여가 향유에서 상대적 박탈감이 더 커질 수도 있다.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노동시간단축의 혜택에서조차 소외되는 부류가 생기는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소비자태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주5일제를 선택하기 위해 최대한 포기할 수 있는 소득은 한달 10만원 정도로 나타났다. 아직 휴일보다는 소득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5일근무제로 노동의 피로가 줄어들면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문화비평가로 사는 삶’이 훨씬 더 가까워질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느끼기’ 시작할 때쯤이면 소득보다는 ‘더 많은 여가’를 요구하지 않을까.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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