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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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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지 못한 사법정의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들의 뜨거운 뒷담화
대법원·헌재가 제 역할 못하고 있음에 공감하며 하급심 판결에 힘을 싣다
등록 2013-12-28 14:59 수정 2020-05-03 04:27
12월13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6층 회의실에 모인 심사위원들이 올해의 판결 선정을 위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12월13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6층 회의실에 모인 심사위원들이 올해의 판결 선정을 위한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략 난감. 2013년 올해의 판결 선정 과정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이럴 듯하다.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논란으로 시작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탄압, 철도 민영화와 파업 강경 대응까지 ‘안녕들 하지 못한’ 현실이 요동쳤지만, 이를 보듬는 사법부의 노력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2월13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 모인 7명의 심사위원들은 오랜 고민과 망설임, 그리고 뜨거운 논쟁 끝에 ‘2013년 올해의 판결’이라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망설임의 시간은 곧 사법부의 성적표이기도 했다. 여기, 심사위원들의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부부 강간 뒤늦은 감” “최소한의 역할 칭찬”

사회- 먼저 ‘최고의 판결’부터 이야기해보자. 실질적인 부부 사이에서 강간죄를 처음 인정한 판결(대법원)과 성기 형성을 하지 않은 성전환자에 대한 성별 정정 결정(서울서부지법)을 두고 심사위원마다 의견이 다른 듯하다.

유성규(노무법인 참터 공익노무사·이하 유)- 법리적인 부분과 사회적 공감대를 기준으로 고민했다. 이 기준을 충족하는 게 부부 강간 판결이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영역이 부부 관계일 테니 말이다.

조혜인(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변호사·이하 조)- 부부 강간 판결은 늦은 감이 있다. 성별 정정 결정은 소수자를 법원에서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판결이다.

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이하 오)- 대법원 결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부부 강간에 대해 법리가 무르익은 뒤 대법원이 인용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칭찬해줘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

김보라미(법무법인 나눔 변호사·이하 미)-사실 올해의 판결들을 훑어보면서 지난해처럼 딱 마음에 드는 판결이 없었다. 심사위원 다수가 부부 강간 판결을 꼽는다면 특별히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최고의 판결’로 꼽기에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판사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르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공부한 점에서 칭찬해줘야 하지 않나.” -오창익

김성진(법무법인 한결 변호사·이하 진)- 소수 의견이지만 지방자치단체의 대형마트 영업제한 조례가 적법하다고 인정한 판결(서울행정법원)도 추천하고 싶다. 지난해 재벌 대기업의 탐욕 탓에 경제민주화가 힘들었는데,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법원이 합리적 기준에서 다른 가치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해줬다.

조- 최고의 판결은 매년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요즘에는 법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부딪치고 있는데도 마땅히 해결할 장이 없을 때는 최후의 기관으로 사법부 역할이 더 크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판결인데도 용기를 내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별 정정 결정은 법원이 어떤 자세로 판결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다.

오- 성별 정정 결정문은 사실 못마땅하다.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통칭)는 불편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타자화된 시각이다. 그럼에도 판사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모르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공부도 한 점에서 칭찬해줘야 하지 않나.

진-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부부 강간 판결은 뒤늦은 감이 있고, 대법원을 칭찬할 명분도 적은 것 같다. 하급심 판사들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가 있다.

미-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인정한 판결은 그동안 있었던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판례다. 의미가 없지 않다. 실질적인 부부 관계인데 무슨 강간이냐는 반대 판결도 있는데 강간죄로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유- 김성진 변호사의 이야기 가운데 대법원을 왜 칭찬해야 하는가에 설득이 됐다. (웃음)

최재홍(녹색법률센터 변호사·이하 최)- 개인적으로 최고의 판결을 따로 뽑지 않았다. 사안 자체로 의미 있는 판결도 있지만, 현재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하지 못하고 법원이 뒤늦게 따라오는 경향이 있다. 성별 정정 결정도 해외에는 사례가 많은데 우리는 늦은 감이 있다. 입법부가 제구실을 못하는 상황에서 사법부가 최소한의 역할을 해준 셈이다.

오- ‘굉장히 훌륭해서’가 아니라 ‘부족하지만 잘하라’는 의미에서 최고의 판결을 선정하는 게 좋겠다. 부족한 부분을 우리가 지적해줘야 한다.

홍성수(숙명여대 법학부 교수·이하 홍)- 두 판결을 두고 고민했다. 성별 정정 결정보다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인정한 판결이 사회적으로 다른 상황에서도 폭넓게 인정될 수 있다는 파급효과 측면에서 의미 있다고 봤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산재 인정 판결 주목

미- 비록 다른 나라보다 늦은 판결이었을지언정 성별 정정 결정을 내렸다는 것 자체를 칭찬해주고 빨리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는 게 우리의 역할이기도 하겠다. 그래서 최고의 판결로 뽑는 게 의미 있을 듯하다.

사회- 이번에는 ‘주목할 판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고용노동부의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에 제동을 건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은 심사위원 전원이 추천했다.

유- 내용으로 봤을 때 큰 의미는 없다. 말 그대로 가치를 부여하기 힘들다. 다만 정치적으로 정부가 노동조합과의 일대 격돌을 준비하는 시기에 나온 판결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전교조 법외노조에 적용한 노조 규약은 금속노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그런 점에서 법원의 결정이 가림막을 쳤다는 의미가 있다.

최- 교육부의 금성출판사 역사 교과서 수정 명령에 제동을 건 대법원 판결도 사회적 논란이 뜨거웠다는 점에서 시의성이 있다고 본다.

미- 쉽지 않은 판결이었다. 재판부가 논리를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것 같더라. 교과서 수정에 대해 저작권 개념을 적용했다.

홍- 후보작 선정 범위(2013년 1~11월 판결)는 아니지만 올해의 판결이 실리는 제992호를 받아볼 때면 대법원의 통상임금 공개변론(12월18일) 결과가 나와 있을 것이다. 2013년 올해의 판결 후보작이었다면, 그 결과에 따라 ‘최고의 판결’ 또는 ‘최악의 판결’까지 될 수도 있겠다.(74쪽 이슈추적 ‘반쪽 승리냐, 완전한 패배냐’ 참조)

진- 연세대가 등록금 인상 근거에 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판결(대법원)도 숨은 의미가 크다. 연세대가 사학의 역할이 크면서도 문제제기하는 것에 나 몰라라 했다는 점을 법원이 지적해줬기 때문이다.

오- 대법원이 결정을 내렸는데 연세대가 아직도 정보 공개를 안 하고 있다고 한다. 공개 시기를 제대로 특정하지 않은 대법원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유-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백혈병이 산재임을 또다시 인정한 판결(서울행정법원)도 주목할 만하다. 기존 업무상 질병 기준에 대해 사법부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산재로 인정될 때 근로복지공단은 과학적·의학적 의견을 요구한다. 사후 입증이 쉽지 않은데 그런 특수성을 반영했다.

조- 취업 허가 없이 일한 난민신청자에 대한 강제퇴거 명령 취소 판결(서울행정법원)은 판결문이 잘 쓰였다. 그동안 사법부는 난민 관련 국제규약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어떤 의무가 있는지를 설명했다.

진- 남양유업에 ‘밀어내기’ 피해액 전액을 배상하라고 한 판결(서울중앙지법)에서는 남양유업 대리점주가 손해배상을 청구했는데 남양유업이 입증 자료를 주지 않았다. 안 낸 걸로 봐서 손해액을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며 대리점주의 입증책임을 완화한 것은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리가 진전했다고 볼 수 있다. 갑을 논란의 시작이라는 사회적 영향도 끼쳤다.

‘촛불’ 시민단체 손배 책임 없다는 판결

사회- 한창 떠들썩했던 탈북자 출신 서울시 공무원의 간첩 혐의에 대한 무죄 선고(서울중앙지법)도 있었다.

오- (기소 과정에서) 증거 조작이 있었다. 요즘 계속 간첩 사건에 탈북자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관련 사건 가운데 굉장히 질 나쁜 사건이었다. 변호사들이 (무죄 입증을 위해) 중국에 가서 현장 조사를 했다. 애쓴 것도 칭찬해줘야 한다.


“문제적 판결에 노동 관련 판결을 뽑지 못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문제적 판례가 악용될까봐 쉽사리 내놓지 못했다.” -유성규

홍-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단체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인정한 판결(서울중앙지법)도 의미가 크다. 시민사회의 집회·시위에 손해배상으로 대응하겠다는 게 애초 정부의 전략이었는데 재판을 통해 깨졌기 때문이다.

진- 사건을 맡은 변호인단은 재판에서 질 것 같은 분위기가 들어서 선고 당일까지 엄청 떨었다더라. 지면 (손해배상 액수 때문에) 완전 망하니까. 실무자들이 아주 많이 시달린 듯하다.

홍- 만약 정부가 승소해 판례로 인용됐다면 배상금이 형사처벌보다 더 무거운 부담이 됐을 것이다.

오- 올 한 해 ‘문제적 판결’로는 대법원이 김형근 전교조 교사의 국가보안법 무죄 선고를 뒤집은 파기환송심(대법원)을 꼽을 만하다. 김 교사는 2006년 지면 캠페인을 통해 ‘빨치산 교사’로 찍혔다. 노무현 정부 때부터 계속 이렇게 힘들게 살고 있다.

홍- 삼성·안기부 X파일을 폭로한 노회찬 전 의원에 대해 유죄를 확정한 판결(대법원)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를 한 번 더 했다. 노원구 주민이다. (웃음) 당시 재판부는 8년 전 일이라서 공개해도 공익적 이익이 없다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공익적 관심이 뭔지, 공공의 이익이 있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유- 원래 남녀 분리 채용시 동일 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대법원)을 문제적 판결로 추천하려 했다. 그런데 이 판결에 등장하는 사 쪽의 관리 방식이 알려지면 노동자들에게 악영향이 더 클 것 같다. 노동계는 어떤 기업이 이런 방식으로 법망을 피해갔다고 하면 실제로 그걸 답습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안 뽑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 올해 키코(KIKO) 손해배상 책임을 30~35%로 제한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도 있었다. 은행이 위험한 상품을 설명도 안 해주고 중소기업에 팔아놓고는 손해배상을 해주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대법원이 중소기업의 현실을 무시하고 너무 은행 편을 들었다.

조- 동성애 성향을 이유로 왕따당해 자살한 학생에 대해 학교 책임이 없다고 밝힌 판결(대법원)은 1심에서 손해배상을 인정했는데, 대법원이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이 자살이나 폭력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 학교 현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를 흔드는 폭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학교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음을 사실상 인정해준 것이다.

미-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과정에서 KT의 문제점을 제보한 공익신고자의 보호조치 취소 결정(서울고등법원)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공익침해를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법원이 넓게 인정해줘야 공익신고가 되는 법인데 이 판결은 법원이 매우 좁게 해석해버렸다.

노동 관련 문제적 판결 악용될까 못 뽑아

홍- 투표시간 제한 위헌 헌법소원을 낸 소송인들의 구체적인 사유를 보면, 정말 투표하기 쉽지 않더라. 1시간 먼저 퇴근하거나 1시간 늦게 출근하는 게 어려운 상황인데, 헌재 결정문을 보면 그래도 나와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지만 다른 나라는 8시간 근무를 잘 지키지 않나.

진- 헌재를 비난해줘도 되는 판결이다.

홍- 청년유니온의 청년실업 정책 비판 플래시몹이 집시법 대상이라고 한 판결(대법원)도 문제적 판결로 꼽을 만하다. 플래시몹도 집시법의 범주에 넣어 집시법의 의미를 너무 확장시켰다.

문제적 판결을 뽑아내는 심사위원들의 대화는 끝 모르게 이어졌다. 애초 5개를 선정하기로 했던 약속과 달리, 심사위원들은 격렬한 토론에도 7개의 판결을 쥔 채 더는 양보할 수 없다고 버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10개를 뽑자”는 한 심사위원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올 한 해 사법부에 대한 평가와 못다 한 이야기를 주문했다.

홍- 오늘 과거사 문제가 많이 다뤄지지 않은 듯하다. 사법부가 재심·손해배상으로 진행하는 과거사 문제의 해법이 바람직한가 하는 고민이 든다.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도 필요하다. 원치 않는 판결이 나오면 문제가 있다 하고 원하는 판결이 나오면 문제없다고 하는 식의 접근에 문제가 있다.

진- 최고의 판결을 찾기 어려웠다는 데 모두 동감할 것이다. 그나마 좋은 것은 하급심 판결이었다. 대법원·헌재가 제구실을 못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반면 문제적 판결에는 대법원·헌재 판결이 많았다. 대법원·헌재가 좀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해달라.

최- 우리나라는 사회의 쟁점이 너무 법원으로 몰린다. 법관 몇몇이 중요한 쟁점에 답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많다. 올해의 판결들은 대부분 자유권에 대한 판결뿐이다. 사회권은 법원에서 부딪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서 국회가 제구실을 해줘야 한다.

미- 지난해 선거 전 올해의 판결 심사를 와서 “유권자들이 좋은 판단을 해서 법원으로 가지 않아도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올해 다시 느끼는 건데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적 의사 표시가 권리로 제대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 같다.

유- 문제적 판결에 노동 관련 판결을 뽑지 못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문제적 판례가 악용될까봐 쉽사리 내놓지 못했다. 최근에는 사용자가 노동법을 활용해 노동자를 탄압한다. 전교조 탄압이 그 예다. 자구력을 잃은 노조가 완전히 위축된 상황에서 사용자는 노동법 판례를 활용하는 시대다.

조- 심사가 끝나니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사회적 공론장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들을 소송으로만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가슴 아프다. 그럼에도 법원이 충실한 역할을 해줘야 한다. 법원은 법 안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겠지만, 지금 이뤄지는 것은 법이 있음에도 더 합리적 판단을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법원이 호민관이 아니라 반동인 듯

오- 사법부의 역할은 행정부의 역할과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한다. 대통령과 정권이 막가고 있을 때 법원이 제동을 걸어줘야 한다. 그런 역할을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법원이 호민관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반동인 것 같다. 판사들의 공감 능력도 떨어지는 듯하다. 법원이 법치의 교두보가 돼야 한다.

사회·정리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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