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아르헨티나)과 싸웠지만, 훨씬 싸우기 어렵고 더 위험한 ‘내부의 적’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1984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연설. ‘내부의 적’은 2만 명이 해고되자 총파업에 들어간 탄광 노조를 의미했다.)
영국 땅을 밟자마자, 평소 “좋아하는 정치인”이라던 대처 총리가 빙의했나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럽 순방길의 두 번째 방문국인 영국에 도착한 시간은 지난 11월4일 밤 11시께였다. 그 시간 즈음, 한국에선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건’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내부의 적’을 처단하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새벽이란 시간도, 머나먼 영국 땅이라는 공간도 중요치 않았다. 박 대통령은 서둘러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심판 청구서를 최종 결재했다. 국무회의 의결에서 헌법재판소 접수까지는 채 4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대처 총리 생각난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 대처 총리를 흉내 내려는 것 같다. 전교조나 전공노도 그랬고 또 나타날 거다. (대처가 그랬듯이) 노동조합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나타날 거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의 분석이다. (WSJ) 아시아판은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이 ‘철의 여인’인 대처 총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며, 나비 모양 브로치를 왼쪽 정장 가슴에 다는 것까지 ‘따라한’ 박 대통령과 대처 총리의 사진을 나란히 싣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박근혜 정부 정책은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각종 복지정책을 포기하고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대처 총리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하지만 반공·반노조주의를 앞세워 ‘강한 통치’를 과시하려는 스타일만큼은 닮았다. “대처의 원칙은 법치와 엄정한 공권력의 확립이었다.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려는 집단에 대해서는 어떤 타협도 없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2007년 ‘대처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토론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 8개월여 동안 한국 사회는 전쟁터였다. 나 아니면 모두 ‘적’이었다. 타협은 없었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에게 ‘밉상’으로 찍힌 세력을 차례로 닦아세웠다. 마녀사냥을 연상케 하는 광풍이 숨 돌릴 새도 없이 몰아쳤다.
첫 번째 타깃은 지난 대선 때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였던 친노 세력이었다. 지난 6월 국정원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이 있었느냐를 둘러싼 진실 공방에 휩싸이더니, 문재인 의원은 결국 지난 11월6일 검찰에 출두했다. 회의록 초본이 삭제된 이유 등을 조사받기 위해서였다. “저는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러 나왔습니다.” 지난 대선 후보 TV토론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카기 마사오’라 칭하며 박근혜 당시 후보를 몰아세웠던 이정희 후보가 대표로 있는 통합진보당은 그야말로 ‘찍혔다’. 지난 8월 이석기 의원이 내란 음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RO’ 사건이 터져나왔고, 석 달 만에 통합진보당은 해산 위기에 놓였다. “다카기 마사오에 대한 치졸한 복수극”(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이나 다름없다.
세 번째는 “한 마리 해충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일 수 있다”(2005년 박근혜 대통령의 ‘사학법’ 관련 발언)며 적대감을 나타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차례였다. 전교조에는 ‘노조 아님’이 통보됐다. 고용노동부와 협의를 거쳐 해직자 배제 등 규약을 개정했던 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의 합법화도 다시 꼬투리가 잡혔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월31일 “공무원단체나 개별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지 않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라며,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슬그머니 ‘물타기’하는 동시에 전공노를 향한 공격의 밑자락도 살짝 깔았다. 그리고 11월8일 검찰은 전공노 홈페이지 서버를 전격 압수수색했다.
종북 블랙홀, 안 될 땐 물타기 전략“이념을 동원해 나라를 둘로 나누고, 그 절반의 지지에 기반해 나라를 통치하려는 전략을 영국의 정치이론가 밥 제솝은 ‘두 국민 전략’이라고 불렀다. 두 국민 전략은 새로운 권위주의의 전형적인 발상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가 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보는 단상을 적은 페이스북 글의 일부다. ‘두 국민 전략’은 대처 영국 총리를 비롯한 보수세력이 전통적으로 취해왔던 방식이다. ‘너희’를 공격함으로써, ‘우리’는 더 똘똘 뭉친다. ‘내부의 적’은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힘이 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종북’ 또는 ‘공안’은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는 블랙홀이다. 북한이라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국민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해 기존 반공세력은 물론이고 국민 대다수가 ‘종북’ 반대편에 서게 한다. 심지어 민주당조차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유감스럽다”며 통합진보당과 거리두기를 했을 정도다. 김호기 교수는 “시민 다수의 다양한 정치적 판단을 ‘종북이냐, 아니냐’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정치적 사유를 위축시키는 자기검열을 강화시키게 될 거다. 이는 결국 정치에 대한 혐오를 갖게 하는 ‘탈정치화’라는 효과를 겨냥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림수는 이뿐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물타기’ 수법으로 반전을 꾀해왔다.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직원들에게 인터넷 댓글을 달도록 시켜서 대선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자, 남재준 국정원장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법원이 원 전 원장의 공소장에 트위터에 5만여 건의 대선 관련 글을 올린 혐의를 추가하도록 허가하자, 이번엔 새누리당이 곧바로 대선 기간 전공노의 불법 선거운동 의혹을 들고나오는 식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이를 ‘갈등의 치환’ 전략으로 설명했다. “박근혜 정부는 통합진보당, 전교조 등 일부러 갈등을 불러들여서 야당이나 여론의 반대를 다른 쪽으로 돌려버리는 전략을 쓰고 있다. 본인이 가장 유리한 쟁점인 ‘공안’을 싸움의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경제민주화나 복지 등 자신이 지키지 않은 공약은 잊혀져버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사회 안전을 위해 ‘4대 악 척결’을 다짐해왔다. 4대 악은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이다. 정치적으로는 지금까지 ‘3대 악’에 칼을 들이댔다. 친노, 통합진보당, 전교조와 전공노.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어디일까?
노동에 대한 일대 공세의 낌새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노동에 대한 일대 공세의 낌새가 보인다”고 말했다.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심판을 청구하면서 내놓은 법무부의 설명자료에서도 이런 조짐이 엿보인다. ‘일하는 사람이 주인된 세상’이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대부분의 노동조합 강령이 위헌이다. ‘반노동’은 역대 정권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면 전환용으로 쉽게 휘두르는 칼이었다. 촛불집회로 궁색한 처지가 됐던 이명박 정부도 집권 2년차에 접어들면서 비정규직법 개정, 제3노총 설립 측면 지원 등으로 노동계와 정면 충돌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명박 정부가 경제논리로 노동문제에 접근했다면, 박근혜 정부는 이념 대결에 전교조·전공노 등 노동조합을 동원시키는 양상이다. 진보와 보수의 대치 국면이 심해지면 각 노조의 진보정당 지지 활동까지 문제 삼아 탄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검찰이 전공노의 대선 개입 수사에 나선 것은 노동계 전체로 전선을 확대하려는 신호탄일 수 있다. 실제로 새누리당은 이참에 ‘종북’ 시민사회단체를 해산시키는 법안까지 만들겠다고 벼르고 있다. 통합진보당이라는 ‘약한 고리’부터 끊어낸 다음에, 차례차례 무너뜨리겠다는 속내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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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입장에서는 집권 초기에 버릇을 고치려고 할 거다. 철도 민영화 이슈만 해도, 2만 명의 조합원이 걸려 있다. 공공부문 전체로 확대해보면 몇십만 명의 노동자가 있다. 민영화가 가시화되고 노조가 이를 저지하면 정부가 가차 없이 ‘법대로 처리하겠다’고 할 사안이 한두 건이 아니다. 민주노총이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내년에는 각개격파당할 거다.” 김금수 전 노사정위원장의 우려다.
박근혜 대통령은 독하다. 특히 자신에 대한 공격을 참지 못한다. 2004년 MBC 라디오 에 출연해서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쏟아지자 “저하고 싸우자는 거냐”고 대꾸했고, 지난해 가을 ‘안철수 당시 카이스트 교수의 지지율이 더 높아진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병 걸리셨어요?”라며 신경질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성격으로 볼 때, 지금까지 이어진 일련의 ‘복수극’이 쉽게 끝날 리 만무하다.
더구나 아직까진 여유 있게 배짱도 부릴 만하다. 정권의 정통성 시비로까지 번질 수 있는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이 몇 달째 이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50%가 넘는다. 추석 전 조사(한국갤럽 기준)에서 67%로 정점을 찍은 이후 하락 추세였다가, 11월 초 조사에선 58%로 다시 반등했다. 집권 첫해에 대통령 측근 비리,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 등 여러 악재로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졌던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에 견주면 지지층이 강고하다. 이명박 정부 때와 비교해 ‘공안몰이’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그래서다. 이명박 대통령도 집권 1년차이던 2008년, 정연주 전 KBS 사장 해임, <pd> 광우병 오보 논란 검찰 수사 등 ‘내부의 적’을 옥죄긴 했다. 하지만 당시엔 촛불에 대한 ‘방어’ 성격이 짙었다. 반면 박근혜 대통령은 ‘수비’가 아니라 줄곧 ‘공격’이다. 야당이 지리멸렬하고 ‘촛불’로 상징되는 저항이 크게 확산되지 않고 있어, 오만함은 더해간다. 당분간은 공안몰이와 마녀사냥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곧 맞닥뜨릴 한계효용의 법칙
박상훈 대표는 “무리하고 억지스러운 공안통치가 계속되긴 할 거다. 그러나 갈등의 치환 전략으로 여론의 초점을 옮겨놓는다고 그게 얼마나 오래가겠나. 회의적이다. 유사한 공안몰이나 물타기를 반복할 때 한계효용의 법칙상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집권당 안에서도 삐걱거릴 수 있다. 이런 전략은 무너지기 시작하면 금방 무너진다”고 말했다.
지난 11월6일 저녁, 보슬비로 촉촉하게 젖은 런던 거리. 박근혜 대통령이 런던 시장 주최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검은 세단에서 내렸다. 순간 푸른빛이 도는 비단 한복 치맛자락이 허공에 펄럭였다. 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박 대통령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만 것이다. 박 대통령은 외국 순방길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한복 외교’니 ‘세계가 한복에 반했다’느니 하는 찬사에 취해서였을까. 박 대통령은 치맛자락을 손으로 여며쥐지 않고 있었다. 아래도 보지 않았다.
“저의 이념은 간단하다. 오직 국민”이라던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박근혜 왕국 안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국민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는 중이다. 발밑도 보지 않는 오만함은, 결국 스스로를 무너뜨리게 마련이다.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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