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4일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표결 3시간 뒤 국가정보원은 의원회관에서 이 의원에 대한 구인영장을 집행했다. 이날 국회의 모습은 30년 전쯤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놓은 것 같았다. 혐의 내용, 신병 처리 절차, 정치권의 대응이 뒤죽박죽 섞여버렸고, “종북 의원”이라는 비난과 “낡은 진보”라는 비판이 별로 다르지 않은 뜻을 품은 듯 오갔다. 정치권에선 어떤 다른 얘기도 나오지 않았다. 통합진보당을 뺀 모두가 똘똘 뭉쳤다. 새누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국정원은 이번에 150%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승자는 국정원인가?
정의당, 지도부가 설득한 ‘찬성’
민주당은 체포동의안 표결 당일인 9월4일 본회의에 앞서 의원총회를 열었다. 민주당은 소속 의원 127명 가운데 110명이 참석한 의총 결과에 대해, “민주당이 이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강제·권고 등의 수식어를 빼고 ‘찬성 당론’으로 간략하게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김한길 대표 체제의 뜻이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김 대표는 사건이 불거지자마자 “이제까지 알려진 혐의가 사실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충격적 사건”(8월29일), “내란 음모 사건은 수사 결과를 지켜볼 것”(8월30일)이라는 등 사건 일체를 하루빨리 사법 당국의 손에 넘기고자 했다. 통합진보당과의 총선 연대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뿐 아니라, 이 의원이 노무현 정부 시절 사면·복권됐고(2003년 8·15 특사),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문재인 의원이었다는 등의 부분까지 싸잡아 여권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자연히 민주당은 국회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아무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애초 민주당은 여야 협상을 통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정보위원회를 소집해 수사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보고받겠다는 걸 전제로 9월2일 체포동의안 보고에 임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9월3일엔 한발 물러서 정보위만 열자고 하더니, 9월4일엔 이마저도 포기하고 그냥 본회의를 여는 데 합의했다. 결국 국회는 이 의원에 대한 일련의 혐의와 관련해 어떤 확인도 하지 않은 셈이 됐다. 민주당은 여기서 한발 나아가 찬성 당론까지 결정했고, 실제 본회의 표결에서 대다수 의원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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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은 천호선 대표와 심상정 원내대표가 주도해 9월4일 대표단·의원단 연석회의에서 ‘찬성 당론’을 결정했다. 하루 전인 9월3일 당내 의견 수렴을 위해 열린 광역시도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는 상당수 참가자들이 반대 또는 기권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체포동의안에 대한 법리적 해석 문제, 국정원 개혁 국면에서의 시민사회와의 균열, 국정원이 발표한 현 사건에 대한 신뢰성 결여 등”이 이유였다. 지도부는 한편으론 ‘특권 내려놓기’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원내 경험’을 앞세워 체포동의안 찬성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럼에도 대표단·의원단이 ‘찬성 당론’을 강행하자, 광역시도당위원장들은 “심각한 유감을 표명한다. 연석회의에서 수렴된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당론이 결정된 과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는 성명을 냈다.
“진작 죽었어야 할 주사파를 살려놓은…”통합진보당이 현재의 모습이 된 데는 정의당에도 책임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의당은 2011년 말 창당한 통합진보당이 지난해 총선 비례대표 부정 경선으로 인한 내부 분열을 겪는 과정에서 탈당한 이들이 만든 당이다. 계파로 따지면, 국민참여당계(유시민·천호선)와 진보신당 탈당파(심상정·노회찬)로 나눌 수 있다. 통합진보당 ‘경기동부연합’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도 이들과 정치적 이합집산을 같이 해온 셈이다.
지난 6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계간지 에 실린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임미리 한국학중앙연구원)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9년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사건이 발생했을 때 유시민은 ‘정치적 존재 이유를 상실한 주사파를 지금까지 살려놓은 책임은 그들을 무작정 배척하고 고립시켜 지하로 몰아넣은 우리 사회의 편협함이 있다’고 했으면서도 13년 뒤 주사파와 손을 잡았다. 한편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직전, 자주파 청산을 위해 ‘종북’의 칼을 휘둘렀다가 국회의원 자리를 위해 통합진보당으로 결합했던 진보신당 탈당파들, 유시민의 말대로라면 진작 죽었어야 할 주사파를 살려놓은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다.”
물론 ‘종북’ 딱지가 붙으면 대중적 지지층의 이탈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에서 대중 정당인 민주당과 정의당이 현실적·정치적 선택을 한 측면도 있다. 체포동의안 표결이 곧 유죄를 뜻하는 게 아니며, 수사를 지켜볼 거란 항변도 있다. 그러나 ‘종북 콤플렉스’ 때문에 국정원의 여론재판식 공안몰이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기만 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다. 여론을 선도하는 것도 정당의 중요한 구실이기 때문이다. 야권에서는 이 의원과 관련해 피의사실이 공표되고 무죄 추정의 원칙이 훼손된 데 대한 문제의식도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의원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국가보안법 폐지가 당론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민주당과 현재 폐지를 당론으로 삼고 있는 정의당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부분도 비판 소지가 있다. 민주당은 어떻게든 국정원 개혁으로 여론의 관심을 돌려보려 하지만, 이 의원과 관련해 형성된 공안 정국에서 야권의 핵심 요구인 ‘국내 파트 및 대공 수사권 폐지’가 받아들여지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특히 이번처럼 정치권이 사실 규명에 대한 노력을 방기한 상태에선, 누구도 그런 동력에 힘을 실어줄 수 없다.
안철수 “빨갱이 없다 말한 적 없다”무소속 안철수 의원의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안 의원은 체포동의안에 대해 찬성 뜻을 밝힌 데 이어, 9월5일엔 “대한민국에 종북 세력이 없다, 빨갱이가 없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했다. 미묘한 시기에 최근 일련의 공안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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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의 개념은 뭘까? 지난 5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에 대한 변희재씨의 발언과 관련해, “‘종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어떠한 범주의 사람 또는 세력을 지칭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며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지난 9월2일 원세훈 전 국정원장 공판에선, 검찰의 증인신문 도중 재판장이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 단장에게 “종북의 기준은 없나”라고 물었다. 민 전 단장은 “다른 데는 있는지 몰라도 잘…”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종북 척결’ 지시를 공유시켰던 국정원 간부가 종북의 기준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처럼 ‘종북’의 개념은 모호한데, 안철수 의원은 그저 ‘종북이 없다고 한 적 없다’는 변명에 급급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안철수 후보의 비서실장을 지낸 조광희 변호사는 9월5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혐오하는 사람에게까지 온전하게 헌법의 정신에 따른 보호를 허락할 때에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안전해진다는 것을, 역사가 얼마나 더 가르쳐야 합니까?” 민주당과 정의당과 안 의원에겐 얼마나 더 많은 역사 수업이 필요한 걸까?
“당내 토론에서 좀더 신중하고 진지한 논의가 이뤄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당의 무거운 책임에 더욱 유념하겠습니다. ”
정당의 책임을 언급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9월4일 기자회견은 오히려 여론을 더 악화시켰다. ‘5월12일 모임’의 녹취록에 나온 ‘총기 탈취’ ‘시설 파괴’ 등의 발언이 “농담”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몇 개 조에서 총이라도 구해야 하는 거냐 등의 말이 나왔는데, 그때마다 웃음이 이어졌다”는 거다. “책임 있게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국민들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다”는 말로 시작된 원내 제3정당 대표의 기자회견에서 불거진 ‘농담론’은 실소마저 자아냈다.
8월28일 국정원의 압수수색 직후 통합진보당은 “모든 게 날조”라며 모임 자체를 부인했다. 8월30일 5월 모임의 녹취록이, 9월2일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 내용이 잇따라 공개되자, 통합진보당은 발언 내용을 부인했다. 모임의 존재, 참석 사실 등을 시인하면서도 “몇몇 단어를 가지고 짜깁기했다”고 주장했다.
실소 자아낸 진보당의 ‘농담론’
구체적 설명은 하지 않은 채 해명은 계속 바뀌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압수수색 당일 이 의원의 ‘잠적’으로 시작되고, 이 대표의 ‘농담론’으로 끝을 맺은 이 궁핍한 해명은 통합진보당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설명의 책임을 감수하지 않고, 무조건 피해자라고 주장해 신뢰를 잃었다”고 지적한다. “설명을 했어야 한다. 엄연히 말했는데, 날조부터 농담까지 피해가기만 했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모든 걸 공안 세력의 탓으로 돌리니 사람들은 공안 세력의 다른 얼굴, 국정원의 쌍생아로 보는 거다.”
통합진보당이 고립무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정치적 책임’에 둔감한 탓이다. 국민 앞에 정치적 견해를 투명하게 제시하고 표로 심판을 받아야 할 정당과 국회의원의 의무와 책임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얘기다. 시민의 눈높이가 아니라 ‘당원의 눈높이’를 중시하는 조직 문화는 지난해 총선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 이후 더욱 공고화했다. 부정경선의 정치적 책임을 둘러싼 극심한 갈등 끝에 ‘자주파’(NL) 가운데 인천연합 등 온건파 세력까지 이들과 다른 길(정의당 창당)을 선택했다. 경기동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를 견제할 당내 세력이 없다는 얘기다. 통합진보당은 처음부터 “이석기 의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당 전체에 대한 탄압”이라며 사건의 진상을 따져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날조된 공안 탄압”이라는 당 지도부의 논리에 반대하는 일부 목소리는 ‘분파주의’로 취급됐다고 한다.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이런 몽매함은 통합진보당 전체의 위태로움을 초래하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진보 진영 전체가 위태로운 처지에 몰리고 있다. 박상훈 대표는 “국민은 체제의 정통성을 북에 두려는 해석이나 역사인식을 갖고 있는 이들을 정당한 정치행위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우파는 늘 그랬지만, 합리적 시민의 범위에서도 이런 세력이 정치권이나 정당으로 발붙이는 걸 쉽게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시민 권력의 요체인 국회의원으로서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사건이 파장이 크다. 진보정치만 망친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보수 편향적 경향을 제어할 힘을 잃을 위험이 높다는 점에서 심각하다”고 말했다.
“경력 위조, 상대방에 대한 명예훼손, 로비스트로부터의 금품 수수, 음주 추태 등으로 정치적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상태였으며, 그의 정치생명은 끝난 것으로 여겨졌다. 충격적인 이슈 없이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매카시(공화당 상원의원)는 ‘미국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나는 297명의 공산주의자 명단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해 미국 사회에 엄청난 충격과 관심을 이끌어냈다. 신문들은 매카시의 폭로를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헤드라인으로 삼았으며, 매카시의 폭로를 다룬 신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위키피디아 ‘매카시즘’에서)
“종북 의원이 최소 31명”“이석기 체포 찬성 258, 반대 14, 기권 11, 무효 6(참석 289명 중). 반대는 완전 대놓고 종북, 기권도 사실상 종북, 무효는 은근슬쩍 종북. 대한민국 국회에 종북 의원이 최소 31명.”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9월3일 체포동의안 표결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의 매카시가 되고 싶었던 걸까. 이런 말은 9월6일 새누리당 주요당직자회의 공개회의에서도 나왔다.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해걸 실버세대위원장은 “국회는 10%가 넘는 31명이 종북 아니면 간첩이다. 31명이 국회 안에 있다는 사실은 한국을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과 새누리당, 보수 언론의 행태는 195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을 빼닮았다. 수사의 필요성, 이 의원의 시대착오적 인식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무차별적인 공안몰이 행태와 야권 전체에 대한 마구잡이식 색깔론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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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피의사실 공표와 언론 플레이로 사건 초기부터 ‘여론재판’으로 몰아갔다. 수년간 내사를 통해 ‘결정적 증거’를 확보했다는 말과 달리, 87쪽에 달하는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에는 녹취록 말고는 혐의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 증거는 담기지 않았다. 압수수색 물품 분석 등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미진한 구석이 적지 않다. ‘RO’는 지하혁명조직이라고 못박고, 김재연·김미희 통합진보당 의원이 ‘RO’ 조직원이라고 사실상 지목하고도,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국정원이 애초 내란 음모 혐의 외에 내란 선동 혐의를 추가한 것을 두고 내란 음모 혐의 입증이 어려울 것에 대비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별다른 근거를 찾기 어려운 추측성 보도도 난무했다. 이 의원의 집에서 발견된 현금에 섞여 나온 러시아 화폐가 곧바로 ‘북한 공작금’으로 둔갑하는 식이다. 통합진보당은 “국회 상임위의 러시아 출장 때 남은 1만루블(약 33만원)”이라고 해명했다. 국정원 압수수색을 받은 당사자 10명은 피의사실 공표, 공무상 비밀 누설,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국정원과 몇몇 언론사, 기자를 검찰에 고소했지만 별다른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국정원이 제시한 혐의는 기정사실화했다.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떠 이번 사건을 야권에 대한 정치적 공세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민주당이 종북좌파 이석기 의원 탄생의 숙주 역할을 했다”며 야권 연대 책임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민혁당 사건으로 복역하던 이 의원이 2003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된 것을 두고는 “이런 사람을 특별사면해 국회의원을 만들어준 것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의원”이라며 사퇴를 요구했다(홍지만 원내대변인). 새누리당은 사법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의원에 대한 국회의원 제명 요구안을 제출했다. 매카시가 광기를 부릴 때 그가 속했던 공화당에서는 “독재자의 방법으로 자유를 지켜서는 안 된다”는 양심선언이 나왔다는데, 새누리당 내에서는 합리적인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북한 공작금으로 둔갑한 러시아 화폐매카시가 몰락한 것은 1954년 미국 육군 안에 친공 세력과 간첩이 득세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다. 육군 청문회에서 근거 없는 인신공격만 일삼는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국민이 더 이상 그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고통을 겪은 뒤다. 매카시는 두통에 시달리다가 알코올중독에 빠져 48살 나이로 죽었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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