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순진했던 걸까, 아니면 ‘제1야당’의 무능이 또다시 드러난 걸 까.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및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개 파문 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국회가 지난 7월2일 본회의를 열고 ‘2007 년 남북 정상회담 자료 열람·공개 요구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재석 의원 276명 가운데 257명(반대 17명, 기권 2명)이 찬성했다. 새 누리당의 이탈표는 없었다. 요구안 통과는 민주당의 강제당론이었다. 민주당에선 처음부터 원문 공개에 반대했던 김성곤·김승남·박지원· 추미애 의원 등 4명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font size="3">“공개하면 논란은 종결될 것” </font>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따져볼 일이다. 민주당은 이번 사태 초 반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를 전제로 국회 절차를 통한 대화록 원본의 열람과 공개에 동의했다. 국회가 국정조사에 돌입한 만큼 원 본 공개가 논리적 귀결일 수는 있다.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7월4 일 “민주당은 한 치도 부끄러운 점이 없다. (원본의) 열람과 공개를 통 해 사실이 밝혀지면 NLL 논란은 종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원내 대표는 7월3일 기자간담회에서도 “개헌 정족수와 동일한 국회의원 3 분의 2 이상의 의결 절차를 거쳐 공개해야 하는 엄중하고 무거운 기 록물이라는 점을 이번에 보여줬기 때문에 국정원의 임의적인 기록물 공개가 얼마나 위법적이고 파렴치한 행위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났다” 고 말했다. 원본 공개를 통해 ‘NLL 포기’ 논란의 종지부를 찍는 동시 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여권에 대한 ‘도덕적 우위’ 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게 당 지도부의 판단이다. 문재인 의원도 “원본 을 열람해 포기 발언이 사실로 드러나면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배수 의 진을 쳤다.
그러나 원본 공개가 곧 ‘논란의 종결’로 이어질 수는 없어 보인다. 구체적으로 ‘포기’라는 발언이 없다고 해 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실상 NLL을 포기했다’는 게 새누리당의 입장이다. 원 본을 열람한다고 해서 새누리당이 이 주 장을 포기할까? 오히려 새누리당으로선 공략 범위가 더 넓어지는 효과를 거둘 수 도 있다. 새누리당 소속인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은 2007년 당시 남북 정상의 육성이 녹음된 파일까지 공 개하자고 주장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국정원이 이미 원문을 공개했지만 국민 여론 대다수는 ‘NLL 포기’가 아니라고 본다. 그런 데 무엇을 더 확인한다는 것인가”라며 “원문의 내용 일부가 공개된다 면 그 과정에서 또다시 왜곡이 일어나 새로운 논란을 야기할 가능성 도 높다”고 내다봤다. 본회의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진 박지원 의원도 7월5일 언론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우매한 결정을 했다”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정계 은퇴를 언급한) 문재인 의원의 순수성에 대해서는 이해를 한다. 자기가 모셨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결백을 밝히고 싶은 심정이 그렇게 하게 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48%의 지지를 받은 지도 자로서 감정적 대응을 뛰어넘었어야 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font size="3">흐려진 전선에서 지루한 대치</font>‘얻은 것’은 희미했지만 ‘잃은 것들’은 구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댓 글 공작을 포함한 국정원의 광범위한 정치 개입과 ‘NLL 대화록’을 대선 전후로 활용하려 했던 여권의 불법과 탈법이 이번 사태의 핵심 이다. 그런데 여야가 원본 공개에 합의하면서 이 전선은 실종되고 쟁 점은 또다시 ‘NLL 포기 발언’의 존재 여부로 되돌아왔다. 김무성 새 누리당 의원과 권영세 주중 대사 등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의 입을 통해 드러난 ‘이명박·원세훈·박근혜·남재준 커넥션’ 의혹도 수 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국회가 국정조사에 돌입하는 결정적 시점에 새누리당은 눈물겹도록 소중한 시간을 번 셈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논외로 하더라도 야권이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던 2007년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스스로의 손으로 봉인 해제했다는 비판은 피해가기 어렵다.
흐려진 전선에서의 지루한 대치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요구안의 국회 통과에 따라 국가기록원은 7월12일까지 일체의 자료 를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열람의 주체와 방식, 원본의 공개 여부와 그 범위는 아직 미지수다. 결국 ‘제한적 열람·최소한의 공개’로 가닥 을 잡긴 했지만 민주당은 이와 관련해서도 방침을 정리하지 못한 채 오락가락 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개헌 정족수인 재적 의원 3분의 2로 요구안이 의결됐으면 당연히 국회에 (원본을) 공개할 수 있는 권 한을 준 게 아닌가. 보기만 하고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했다. 광범위하게 열람하고, 전면적으로 공개하자는 이야기다. 반면 박지원 의원은 “여야 원내대표단 등 4명만 열람하는 것으로 최소화하고, 공개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새누리당은 짐짓 점잖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보위원회·외교통 상위원회·국방위원회 등 관련 상임위 관계자와 여야 원내지도부 등 이 열람하도록 하고 NLL 문제와 관련한 핵심적인 내용만을 제한적 으로 공개하자는 것이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대통 령기록물관리법상에는 처벌 규정이 있다. 본회의 통과로 기록물을 열람한다고 해도 열람만 가능하지, 공개할 경우 3년 이하 징역에 7년 이하 자격정지에 처하게 된다. 메모 등 자료를 일부 발췌해 기자회견 방식으로 공개하는 정도가 국회의원 면책특권의 범위라고 본다”고 말했다.
<font size="3">‘3주 이상 열람’ 주장의 속내 </font>또 다른 속내도 엿보인다. 윤 수석부대표는 “사안의 성격상, 또 자 료가 워낙 많아서 적어도 3주 이상은 (열람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 한다”고 덧붙였다. 국가기록원의 자료 제출 기한인 7월12일부터 3주 라면 이미 8월 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 야 할 국회 국정조사는 8월15일까지로 예정돼 있다. 국정조사의 상당 기간을 ‘대화록 원본 열람’으로 뒤덮으려는 의도다. 여권 내 극히 일 부인 비주류 인사들을 제외하면 ‘국정원 개혁론’도 쏙 들어갔다. 아 예 정부는 7월4일 국정원에 사이버안보의 총괄 권한을 부여하는 것 을 골자로 한 ‘국가 사이버안보 종합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갤 럽이 7월5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민주당 지지자의 72%는 “민 주당이 야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어쨌든 웃고 있는 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다. 민주당에 과연 반전의 카드 는 있을까?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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