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시국선언의 시작은 돈가스덮밥!

고교생 시국선언 불씨 댕긴 산청간디학교 학생 7인에게 들어본 ‘사건의 전말’
등록 2013-07-09 15:46 수정 2020-05-03 04:27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산청간디학교 3학년 학생들. 왼쪽부터 윤나은·곽민주·안은초·양지유양, 신승현군, 정한솔·김성은양.윤운식

국정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한 산청간디학교 3학년 학생들. 왼쪽부터 윤나은·곽민주·안은초·양지유양, 신승현군, 정한솔·김성은양.윤운식

까르르르. 가만히 앉아 있던 학생들이 갑자기 웃음보를 터뜨렸다. 지난 7월4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산청간디학교 3학 년 곽민주·김성은·안은초·윤나은·정한솔·양지유양과 신승현군 은 앳된 티를 아직 못 벗은 고등학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 6 월30일 굳은 표정으로 서울 광화문광장에 서 있었다. 이날 산청·금 산·제천간디학교와 산마을학교 등 대안학교 4곳의 학생들은 국정 원의 선거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그동안 교수·시 민단체·대학생의 시국선언은 있었지만, 고등학생이 나선 건 이들이 처음이었다.

대안학교 학생들의 시국선언 불씨가 붙은 곳은 경남 산청군 산청 간디학교였다. 이 이날 시국선언을 이끈 학생 7명을 불러 이들이 시국선언을 ‘도모’한 전말을 물었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진로탐색 인턴십 과정을 밟고 있는 3학년생 가운데 서울 지역에 머무는 이들이었다. 자연스레 시작한 인터뷰는 어느새 기자의 존재감은 사라진 채 ‘친구들 사이의 대화’가 됐다. 이들은 “시 국선언은 ‘돈가스덮밥’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까 르르 웃음바다에 빠졌다.

온 국민을 상대로 한 엄청난 도난사건

정한솔(이하 정) 그날(6월21일) 지원이라는 친구가 ‘금요식당’(매주 금 요일에 학교 조리실로 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해주는 활동)에 불러서 밥을 해주고 있었어. 은초한테 돈가스덮밥을 해주는데 나랑 나연이 가 얻어먹으러 갔다가 은초한테 국정원 선거 개입 이야기를 처음 들 었어. 우리가 (경남 산청에 있다보니) 바깥과 소통이 안 되잖아. (웃 음) 처음 얘기를 듣고는 진짜 국정원이 그랬을까라고 생각했어.

안은초(이하 안) 그날 기사로 봤던 국정원 선거 개입 이야기를 친구들 한테 처음 했어. 그 다음날,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는 다들 시국선언을 하는데 심각한 문제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잖 아. 그러면 우리도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공부를 한 다음 시 국선언이라는 걸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 그래서 일단 ‘시국 선언 추진팀’을 우리가 만들고, 학생총회에 가져가자는 얘기까지 나 온 거지.

이들이 쓴 시국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도 모 르는 사이 열심히 쌓아온 것을 한순간에 도난당했습니다. 이번 국 정원 선거 개입 사건은 온 국민을 상대로 한 엄청난 도난사건입니다.” 시국선언문에는 “학생총회 등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직접 참여를 하지 않는 학생들과도 의견을 나눴다. 우려가 된다는 친구들의 말에 이번 선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제3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학생들은 국정원 사건 관련자들을 지연·학연·기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수사해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 국정원이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도록 대통령 차 원의 예방책을 마련하고 국정원을 개혁할 것, 그리고 국정원장과 대 통령이 국민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김성은(이하 김) 난 학생총회가 끝난 뒤 시국선언 준비팀에 들어갔잖 아. 인터넷 뉴스를 자주 보는 편이라 국정원 선거 개입에 대한 내용 은 대충 알았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거 같더라고. 그런데 이 친 구들이 시국선언 한다는 얘기를 듣고 돕고 싶었어. 학생총회에서 읽을 글의 교정을 봐주면서 동참했지.

곽민주(이하 곽) 시국선언을 하기 전에 스터디를 한 건 전교생이 다 이 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머지 애들 이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 각했거든.

“지원이라는 친구가 ‘금요식당’에 불러서 밥을 해주고 있었어. 얻어먹으러 갔다가 은초한테 국정원 선거 개입 이야기를 처음 들었어. 처음 얘기를 듣고는 진짜 국정원이 그랬을까라고 생각했어.”
국정원이 뭐냐는 질문도 나왔지

산청간디학교는 일반 학교와 다르게 전교생이 학생회에 참여한다. 모든 논의는 학생총회를 거친다. 학생회장인 윤나은양은 “총회에는 학생회장 직권 상정, 전교생의 6분의 1 이상 동의, 사간원(학생회장 단의 감사기구)의 3분의 2 이상 동의가 있어야 올릴 수 있다”고 설명 했다. ‘시국선언 추진팀’은 빠른 추진을 위해 주말에 학생회장을 찾아 가 안건 상정을 설득했다고 했다. 학생총회는 다음날 저녁에 열렸다.

학생총회에서는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을 설명하는 읽을거리와 동 영상이 등장했다. 이날 모인 학생들은 국정원 댓글녀 사건을 정리한 글, KBS 뉴스에 나온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동영상 등을 봤다. 전교 생 120명 가운데 90명이 참석한 학생총회는 밤 9시에 시작해 자정께 까지 이어졌다. 이날 90명 가운데 82명이 시국선언 발표에 동의했다. 시국선언을 준비하는 스터디 과정에서 다른 대안학 교와 연합해 발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학생총회에서 “준비팀이 제대로 했 으면 좋겠다”고 부탁했어. 그래서 자료를 만들어 가지고 갔는데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 해서 우리끼리 공부를 한 거야. 공부 자료를 가지고 왔더니 국 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친구들도 있었어. 진짜냐, 이거 꾸민 거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지.

국정원이 뭐냐는 질문도 있었어. (웃음)

사실 난 사건 자체는 이미 알고 있었어. 그냥 봐도 정부 잘못이 많잖아. 이걸 집회·1인시위 말고 친구들과 우리가 하나로 뭉쳐서 할 방법을 몰랐던 거 같아. 그래서 시국선언 한다고 하니 같이 하고 싶 었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더 알리고 싶었어.

신승현 나는 올해 초부터 정부 관련 비리 사건이 이어지다보니 좀 무감각하게 느꼈어. 그냥 인턴십 기간에 서울에 가서 촛불집회나 참 여해야지 생각했거든. 그런데 학교에서 학생총회를 하고 나니 꼭 참 여해서 뭐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도 있더라고

사실 난 ‘시국선언’이라는 단어를 이번에 처음 배웠어. 고등학교 1학년 때 한국사 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말뜻은 이번에 처음 들었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서 시국선언을 보고 뭐지 하다가 ‘아, 박근혜 대통령이 이랬구나. 그런데 너무 근본적인 게 틀린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배웠고, 민주주의의 꽃은 투표 라고 배웠잖아. 그런데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해 부정을 했다면 당연 히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잖아. 다른 어른들은 분명 나보다 훨 씬 똑똑하고 국민이 들고일어날 텐데… 그런 생각을 했어.

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은 사건을 정리한 글,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동영상 등을 봤다. 전교생 120명 가운데 90명이 참석한 학생총회는 밤 9시에 시작해 자정께까지 이어졌다. 이날 90명 가운데 82명이 시국선언 발표에 동의했다.

양지유(이하 양) 사실 나는 원래 정치에 관심 없어. 옆 테이블에서 너 희가 열띠게 토론하는 걸 듣다보니 부정선거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 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아주 그럴싸한 사명 감 그런 건 아닌데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우리가 이렇게 주목받을 줄도 몰랐어. 그냥 내 의사를 표현할 줄 안다는 걸 보여준 건데 말이야.

그런데 민주주의를 배우면 다 아는 거 아냐? 모르면 이상한 거 지. (웃음)

지난 6월30일 시국선언을 할 때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간 4·19 혁 명 당시 학생들의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인터넷 등에서는 이를 빌미로 교사 등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선동한 것이라는 비판글이 나 오기도 했다.

4·19 혁명도 부정선거에 저항한 거였잖아. 그런데 우리가 하는 시국선언과 딱히 비슷하다고는 생각지 않았어. 이번에 스터디하면서 최루탄에 맞은 사람 중에 김주열이라는 고등학생도 있었다는 걸 알 았어.

1

1

사실 우리를 그분들에게 대입한 건 아니잖아. 고등학생이 들고 일어난 게 잘된 건지 아닌지. 그런데 우리가 시국선언을 한 뒤 교육청 에서 조사를 했다고 하더라고. 우리는 학생자치라 선생님들과는 상 관이 없는데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시국선언을 학생들끼리 준비했다는 거 자체를 이해 못하더라. 좌빨 교사, 전교조의 희생양들이라는 댓글도 있더라 고. (웃음)

아버지가 “공부해라” 글을 올리셨어

주변에서 우리 얘기 많이 하더라. 너네 대학 갈 때 불이익 있을 거다, 대안학교 인가 취소된다, 대안학교 리모델링비 안 나올 거다…. 부모님도 직접적으로 말씀은 안 하시고 내 의사를 존중하는데도 “위 험하지 않냐. 가서 위험할 짓 하지 말고 경찰 눈에 띄지 말고 숨어서 집회해라” 하시더라. 그런데 너무 이상한 거야. 걱정하는 사람이 많 다는 게 말이야.

우리 아버지는 학교 카페에 “은초야 공부해라”라고 글을 올리셨어. 경찰한테 잡혀갔을 때 매뉴얼을 올리 셨더라고. 그래서 전체모임 할 때 그 매 뉴얼 읽었어. (웃음)

우리 부모님도 (시국선언) 안 가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안전도 걱정되고 내 가 고3인데 대학 입학에 해가 없겠느냐 하시더라. 그 얘기 들으니 화가 나더라고. 학생들이 의견을 표출하고 시국선언을 하는 게 왜 특이한 거지? 이 일 때문에 대학 입학에 해를 입으면 그 일 이 더 옳지 못한 거지. 그래서 “옳지 못한 거에 저항하는 걸 안 좋게 보 는 게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더니 부모님께서도 “몸조심해라” 하셨어.

이런 걸로 (대학에서) 안 받아주면 치사한 거 같다.

대안학교 고등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한 이후, 현재까지 교수·시민사 회단체·종교단체 등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청소년 단체인 21 세기청소년공동체희망은 제헌절인 7월17일 청소년 시국선언을 진행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촛불집회 등의 민심은 좀처럼 커질 기세가 보이지 않고, 국정원 사건의 국정조사 등도 답보 상태다. 이들은 지금 처럼 하는 촛불집회 대신 플래시몹, 대형 도화지에 규탄 메시지 적기, 민중가요 대신 쉬운 노래를 틀며 같이 따라 부르기 등 획기적인 변화 가 있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 같다며 아이디어를 풀어놨다.

세상 모든 게 정치와 관련 있어

6월항쟁 때는 사람들이 시간 맞춰서 경적을 울리고 데모 행렬 이 움직이고 그랬대. 사람들이 월드컵 거리응원을 할 때보다 많았다 는데 그때는 그게 신선한 집회 방법이었겠지? 2008년에는 촛불집회 가 신선했던 것처럼 말이야.

이 학교에 오기 전에는 두발 자유도 안 되고 교복을 입었어. 그 때 학급회의 때 머리를 좀더 길게 기르자고 얘기했더니 담임선생님 이 “이 안건은 논의할 수 없다”고 하며 회의록에 안 적으시더라고. 두 발 자유처럼 직접 우리와 관련된 걸 아무것도 못하는데, 과연 뭘 해 야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는 가만히 기계처럼 나라의 규 범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건지.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게 정치와 관련 있어.

윤나은 시국선언은 여러 방법 가운데 의견을 내놓는 한 가지 방법 일 뿐인 것 같아. 앞으로 부조리한 일이 일어나면 시국선언이라는 방 법을 활용할 수 있는 거지. 시국선언 자체로 행동이 끝나는 게 아니 라 이제 시작인 거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