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중·일 삼국에 지도부 교체가 있었다. 2011년 말 북한의 지도자 교체까지 합하면 동북아 모든 국가에서 권력 교체가 이루어진 셈이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 지역정권 교체를 세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논평들이 나왔다. 진보정권이 들어서지 못하고 보수적 흐름이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세습도 세습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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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후계자 수업을 거친 북한 김정일의 권력 승계나, 별다른 준비나 경력 없이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지도자로 등극한 김정은 정도가 세습에 가깝다. 중국의 시진핑 총서기를 권력 세습 사례로 볼 수 있을까?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의 자제가 총서기직을 계승했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알다시피 마오 주석의 장남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지금도 북한 땅에 묻혀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본 정치권에 부모의 선거구를 직접 물려받는 세습의원 비율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매우 높다. 일본 정치에서 세습은 예외라기보다 대세인 것이다. 그런데 한 나라의 지도자를 출신에 따라 이해하려는 시각은 과연 현실 인식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세습도 가지가지다. 북한식은 명실상부하게 세습을 통한 권력 유지다. 변화보다는 안정이다. 중국식은 세대교체를 통한 권력 교체다. 확고한 권력 중심을 기반으로 지속적이고도 안정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하고자 한다. 변화를 통한 연속성 추구다. 일본식은 세습정치를 통한 권력 유지다. 기본적으로는 연속성 추구인데 내각책임제라 지도부가 자주 교체된다. 동북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한국식은 세습이라 보기 어렵다. 투표자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을 의식했다 하더라도 이를 세습의 범주에 넣는 것은 억지스럽다. 굳이 예를 찾자면 박정희 정권을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나 이를 이어받은 노태우 정권까지가 군사정권의 세습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관전 초점을 ‘누구’에서 ‘무엇을’ 또는 ‘어떻게’로 옮겨올 때다. 세습은 ‘누구’라는 사람의 태생과 관련된 인간관계에 주목한다. 이에 비해 ‘무엇’은 통치 의제이고, ‘어떻게’는 통치술이자 경국책이다. 이들이 누구의 자식이라는 가계(家系)가 중요한 게 아니다. 정작 문제는 이들 최고지도자가 직면한 나름의 국제적·국내적 현실이다. 아니 그런 현실의 도전에 대응하는 이들의 인식이다. 이들이 권좌에 올랐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공동의 과제를 떠맡았다는 점이다. 주관적 의도보다 권력관계의 양상과 배치가 중요하다. 우리 처지에서는 한-미 관계, 한-중 관계, 한-일 관계, 남북한 관계, 그리고 한국의 국가-시민사회 관계가 중요하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철의 법칙 아래 한·중·일 삼국은 서로 얽혀 있다. 또 동북아에서 여전히 군사적·경제적·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과 엮여 있다. 국제관계를 통치하고 국내외 주체들을 형성 또는 변형하고자 할 때 각국 내부에서 또 국가 간 어떤 쟁점이 떠오를 수 있는가? 과연 한·중·일 삼국과 북한은 평화롭게 함께 번영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국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무시하지는 않을까?
한국 지도부의 집단적 역사의식이 문제각국 지도부가 어떤 정치합리성(政治合理性) 또는 통치성(統治性)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시진핑의 중국은 자국을 어떻게 통치하고자 하는가? 이때 남한 그리고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아베의 일본은 어떠한가? 박근혜 정권은 한국을 어떻게 통치하고자 하는가? 이때 중국, 일본,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지도자를 둘러싼 통치집단과 이들이 집합적으로 추구하는 통치성이 관건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 제국이었다. 한국은 과거 중국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바 있다.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뒤 여전히 분단된 상태다. 한 세대 이상 진행된 일본과의 경제 통합에도 불구하고 한-일 관계는 여전히 껄끄럽다. 중국과의 경제교류 규모가 미국과 일본의 그것을 합한 것보다 더 커졌다. 그럼에도 한-중 간에는 역사의식과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인식 차이가 크다. 한-미 관계는 한국의 생존과 안정, 번영에 여전히 관건이 된다. 결국 한국 지도부의 집단적 역사의식, 현실 인식, 미래 비전이 중요하다.
박정희와 박근혜 당선인의 가족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은 건설적이지 못하다. 그보다는 박근혜 정권이 추구할 구체적 정책을 통해 연속 속의 단절, 유사성 아래서의 차별성을 확인하고 싶다. 박정희 정권의 공과에 대한 찬양과 부정의 가파른 대립에서 성찰과 전망으로 역사 인식부터 합류했으면 한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이후 개혁정치를 통해 보수의 물질적 기반을 다졌다. 이렇듯 박근혜 정권도 개혁적 통치의 효과로 보수층의 저변 확장에 기여할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장기적인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사회안보(Social Security), 즉 사회보장의 확장에 나서기 바란다. 전대미문의 세계적 경제위기를 맞아 국가안보와 사회보장을 연계시키는 통 큰 통합의 정치를 실천하기 바란다.
안정된 통치 기반과 정교한 통치술 없이는 위기 극복이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집권당인 새누리당이 과반 득표를 통해 안정된 대통령 권력과 과반에 이르는 국회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는 정치 현실은 현 시점에서 우려스럽기보다 다행스럽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박근혜 당선인을 비롯한 지도부가 판을 크게 보고 시야를 멀리 앞에 둘 때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위기에 대응해 정말로 민생을 돌보고,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위기를 극복해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선거연합을 넘어 통치연합으로 나아갈 시점이다.
통치연합 지휘자가 되기를‘1987년 체제’ 아래서의 역대 정권은 선거연합을 안정적인 통치연합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조급한 개혁연합으로 나아가려 하거나(노무현 정권),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지배연합에 머물렀다(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은 과거의 실패를 피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를 위해 사안에 따라 유동하는 지지층을 형성하고 또 해체하는 솜씨 있는 통치연합 지휘자가 되기 바란다. 이 지점에서 박근혜 당선인이 아버지로부터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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