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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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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만이라도 해주시라

이명박 정부 노동 배제의 상징인 쌍용차·한진중공업 등의 정리해고 문제 해결하고 엉망진창 된 노동 관련 법이 제대로 자리잡도록 해야
등록 2013-01-05 02:32 수정 2020-05-03 04:27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그런 나라를 꼭 만들겠습니다. 꼭 실천하겠습니다.”
아수라장 속에서 박근혜 당선인은 그렇게 말했다. 태풍 볼라벤이 비를 흩뿌리던 2012년 8월28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그는 서울 청계천6가 전태일다리(버들다리) 앞에 서 있었다. 여당 대선 후보의 ‘대통합 행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환대받지 못했다. 앞서 찾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전태일재단에서 유족들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발길을 돌린 곳인 전태일다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는 쌍용자동차·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한테 가로막혔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한 달 넘게 면담을 요청해온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모른 척하고 전태일다리를 찾은 탓이다. 그날 박 당선인은 전태일 열사의 유족도 아닌, 쌍용차 해고노동자도 아닌, 이날 새누리당이 섭외한 친박 외곽그룹의 노동계 인사인 김준용 국민희망포럼 노동위원장에게 자신의 다짐을 남겨야 했다.
비상시국회의, 집단행동 나서

한겨레 신소영

한겨레 신소영

‘일하는 사람의 행복’을 약속하려 했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지 열흘 만에 4명의 노동자·활동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물론 원인 제공자는 박 당선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사태를 보듬어야 하는 건 오롯이 새 정부의 책임자인 그의 몫이다. 지난 정부를 겪으며 오랜 시간 쌓여온 노동조합 탄압, 생계 곤란, 절망감 등의 생채기가 터져나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심리기획자인 이명수씨는 칼럼에서 이 상황을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느낀 이가 보내는 구조신호인 ‘헬프 미 징후’가 지속적으로 외면당한 결과 벌어진 필연적 현상”이라고 표현했다.

노동·시민사회단체도 한목소리로 구조신호를 보냈다. 민주노총과 한국진보연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은 2012년 12월26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비상시국회의를 열고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에 대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이날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손배·가압류와 노조 탄압을 중단하고, 철탑에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등)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당선인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촛불집회를 하고 1월에는 대규모 시국대회도 열기로 했다.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단행동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노동·시민사회단체 안에서는 잇단 자살의 충격부터 극복하는 게 가장 급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비상시국회의에 참여했던 권영국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장)는 “최근 상황을 보며 1991년 대선을 앞두고 노동자들의 분신 자살이 이어졌던 이른바 ‘열사 정국’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20년이 흘렀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해고된 노동자가 앞장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해법밖에 없다는 점이 착잡할 뿐이다.”

‘대표적 민생 공약’, 비정규직 확대할 것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26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비상시국회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민주노총 등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2012년 12월26일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비상시국회의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박 당선인의 공약도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선 기간에 그가 밝힌 구체적인 노동정책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노동시간 단축, 기업의 정리해고 요건 강화 정도다. 한진중공업·현대차 등에서 문제가 됐던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박 당선인이 ‘대표적 민생 공약’이라 선전하며 발의한 새누리당의 19대 국회 1호 법안인 ‘사내하도급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은 “오히려 불법적인 비정규직을 확대시킬 것”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침해 요소가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이 법안이 현재 불법 파견 사업장을 합법적인 도급계약으로 인정받도록 해,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화보다는 고착화를 부추기는 역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은 “박 당선인의 공약에 집단적 노사관계나 노동기본권과 관련한 언급 자체가 없다는 게 노동자들이 가장 암담하게 느끼는 현실”이라며 “적어도 현재 노동 관련 법이 현장에서 엉망진창 쓰이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막는 ‘법치’부터 자리잡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기업의 구조조정을 막을 수는 없다”며 “정부가 실업급여를 확대해 기업의 짐을 덜어주고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받는 엄청난 충격부터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박 당선인이 우선 쌍용차·한진중공업 등의 정리해고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나서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두 곳 모두 이명박 정부가 보여준 노동 배제의 상징적 현장이라는 점에서, 박 당선인 스스로 해고자들의 복직과 공권력 투입으로 발생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제시해 “우리는 이명박 정부와 다르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사 쪽이 정리해고를 남발하는 행태에 대한 규제 장치가 마련돼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며 “박 당선인이 말한 대통합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으려면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문제부터 푸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1991년 이른바 ‘열사 정국’이 떠올랐다. 20년이 흘렀지만 해고된 노동자가 앞장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해법밖에 없다는 점이 착잡할 뿐이다.” -권영국 변호사
전태일다리의 약속 기억해야
2012년 8월28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당선인이 서울 청계천6가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려는 순간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동상 앞을 막아서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2012년 8월28일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박근혜 당선인이 서울 청계천6가 전태일다리(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동상에 꽃을 바치려는 순간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이 동상 앞을 막아서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의 집단상담을 했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마인드프리즘 대표는 “박 당선인이 ‘박근혜 정부는 노동자를 죽일 마음이 없다’는 최소한의 선언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무적인 해법을 제시하기에 앞서 더 많은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도록 응급조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종합병원에는 외과·내과·연구소가 있고 응급실도 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은 응급실부터 가야 한다. 목숨부터 구해놓고 봐야 한다.”(정혜신) 그러나 사람 목숨이 오고 가는 상황 속에서도 박 당선인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들이 자신을 선택한 51.6%가 아니라는 이유로 외면하는 건 아닐 테다. 불과 넉 달 전 전태일다리 위에서 박 당선인이 한 약속이 그저 정치적 쇼가 아니었음을 보여줘야 한다. 박 당선인이 말했던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 살려달라며 손을 내밀고 있다.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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