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단으로 통하는 서울광장 동쪽 보도에 작은 천막이 있다. 덕수궁 앞 ‘함께 살자 농성촌’과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이곳에선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해고자들이 세 번째 겨울을 나고 있다. 지난해 4월 이 이곳을 찾았을 때 그들은 1203일째 노숙 농성 중이었다. 성인 서너 명이 모로 눕기에도 비좁아 뵈는 0.5평짜리 등산텐트 안에서 혹한의 긴 겨울을 보낸 유명자 지부장은 추위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고 힘겹게 고백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중구 소공동 원구단 처마 밑에서 전국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오수영 사무국장이 농성을 하고 있다. 이곳은 재능교육 을지사옥과 100m 남짓 떨어져 있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농성을 시작할 때부터 이들이 내건 요구안은 한결같았다.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된 조합원의 원직 복직과 노동조합 인정, 2007년 체결한 단체협약의 원상 회복. 하지만 현행법상 ‘노동자’가 아닌 ‘소사업자’로 분류되는 ‘특수고용노동자’ 신분의 학습지 교사들에게 법과 공권력을 등에 업은 회사와의 싸움은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었다.
이들의 농성이 1800일째를 향해 가던 지난 11월 초 서울행정법원 행정12부(재판장 박태준, 배석판사 안승훈·곽상호)는 의미 있는 판결을 내놓았다. 전국학습지노조와 재능교육 해고자 9명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에서 “회사의 위탁사업 계약 해지 통보는 학습지 교사들의 노조활동에 불이익을 줘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한 목적이므로 부당노동 행위에 해당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학습지 교사를 노동조합법상 노동자로 인정한 첫 판결이었다.
재판부의 판결 근거는 이랬다.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특수형태 노동자가 나타나게 됐는데, 경제적 약자인 이들도 사용자와 대등한 위치에서 노동조건을 협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헌법의 취지에도 부합한다. 이들이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일하는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노동조합법상 노동자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 판결은 학습지 교사는 근로기준법은 물론 노동조합법상으로도 노동자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2005년 대법원 판례와 충돌한다. 이를 판단할 상급심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단체교섭권을 인정함으로써 학습지 교사를 비롯해 보험 모집인, 퀵서비스 종사자,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 200만여명에 이르는 특수고용 형태 노동자들의 권리 향상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는 아니다’라며 재판부가 붙여놓은 꼬리표는 분명한 한계다.
재판부의 전향적 판결 이후에도 재능노조의 장외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사 쪽이 해고 조합원의 원직 복직과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복직자들에 대한 생활안정지원금과 노사협력기금 지급 등을 약속했지만, 애초 노조 요구안의 핵심이던 2007년 단체협상의 효력 인정 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능교육 사 쪽이 학습지노조 재능지부를 부르는 명칭에도 변함이 없다. 11월8일 낸 보도자료에서 사쪽이 노조를 지칭하며 쓴 이름은 ‘임의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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