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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모든 것은 ‘사라진 18년’에 있다

등록 2012-07-11 15:25 수정 2020-05-03 04:26

부모는 선택할 수 없고, 자식은 다른 독립체다. 아버지가 독재자이므로 딸도 당연히 독재적 정치인이리라고 생각하는 건 부당하다.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큰딸 이미 마르코스는 주지사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아버지가 자행한 계엄령과 인권침해를 옹호한다.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도 아버지를 옹호하는 극우파지만 대선 출마는 생각지 않는 시의원이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 에다 무솔리니는 시종 정치에 무심했고 심지어 1945년 파시즘 패망 뒤 자신을 감시하던 공산주의자 빨치산과 사랑에 빠졌다. 모두 독재자의 딸이지만, 제각각 결이 다르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대선 출마 선언일을 확정했다.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정치인 박근혜’로 변신한 지 15년이 됐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늘 안개에 싸여 있다. 그는 과묵하다. 리더십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덕목이다. 이 조심스럽게 박 전 위원장의 리더십 분석을 시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묵함을 뚫고 실체에 접근하려고, 그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를 찾고자 했다. 1979년 10·26 이후 1997년 정치 입문까지 직접 쓴 자서전과 에세이 6권을 참고했다. 자연인 박근혜와 예비 정치인 박근혜가 뒤섞여 있던 시절이다. 그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 알려지지 않은 ‘잃어버린 18년’이다. 그때의 글과 말에서 정치를 직접 언급한 대목을 발굴했다. 그것을 1997년 이후 정치인 박근혜의 말과 행동에 비춰봤다. ‘박정희의 딸이므로 당연히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경계했다. 그렇게 4개의 키워드를 찾았다. 그 열쇠들이 정치인 박근혜를 덮은 신비주의의 뚜껑을 열어주길 기대하며_편집자.



“늘 서늘하다. 그럼 안 된다. 뜨거울 땐 뜨겁고 찰 땐 차야 한다. 특히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다가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박 전 위원장은 누구하고나 등거리다.”-윤여준

■ 배신감 혹은 경계심

박근혜 전 위원장의 두꺼운 마음 껍질 안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배신감이다. 10·26 뒤 공화당 정치인들이 유신을 비판하는 모습을 본 게 배신감의 뿌리다. “배신하는 사람의 벌은 다른 것보다 자기 마음 안에 무너뜨려서는 안 되는 성을 스스로 허물어뜨렸다는 점, 그래서 한 번 배신을 함으로써 배신을 하지 않으려는 저항감이 점점 약해진다는 점, 그럼으로써 두 번째, 세 번째 배신이 수월해진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1981년 9월30일치 일기)

박근혜 전 위원장이 직접 쓴 저서들. 2007년 발간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제외한 책들은 모두 절판됐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직접 쓴 저서들. 2007년 발간된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를 제외한 책들은 모두 절판됐다.

“한 번 배신하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수월해져”

박근혜 전 위원장은 1952년 2월2일생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뒤 9일장을 치르고 그해 11월 초 청와대를 떠났다. 5·16 쿠데타 전 살던 서울 신당동 집으로 돌아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뒤 잠시 ‘서울의 봄’이 왔다. 그러다 1980년 전두환의 집권으로 정치공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짧았던 서울의 봄 당시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논쟁이 벌어졌다. 옛 공화당 인사들도 비판에 동참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종필 전 국무총리다. 그럴 만했다. 혁명공약 초안을 만들고 쿠데타의 동선을 직접 짠 영민한 청년 장교를 박정희 전 대통령은 몹시 경계했다. 1969년 김종필 전 총리가 3선 개헌에 반대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김종필 전 총리는 더 이상 혈육이 아니라 정치적 경쟁자였다. 김 전 총리가 3선 개헌 찬성으로 돌아선 뒤에도 1970년대 내내 중앙정보부가 김 전 총리의 자택을 감시하고 도청했다. 다만 어떤 공화당 인사들은 전두환 밑에서 살아남으려고 유신을 욕했다. 29살 딸에게 이 모든 논쟁은 모욕으로 다가왔다.

“유신 시절에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앉았던 정치인들 중에는 유신을 죄악시하는 요즘의 풍토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때 반대를 했다. 내가 그때 무슨 힘이 있어 반대를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발뺌을 하는 경우가 쉽게 목격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저는 자신이 진실로 나쁜 체제라고 생각했다면 왜 그때 그 자리를 물러나지는 않았었는가를 묻고 싶어요. …그렇게 판단력이 시대에 따라 변질되고 흐린 사람은 앞으로 다시는 공직을 맡으면 안 될 것입니다.”( 1989년 1월호)

배신감은 오래 지속된다. “(김종필 전 총리, 박준규 전 민정당 당의장,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왜 옹호를 않고 있느냐? 그러니까 유신만 해도 아버지 살아 계실 땐 유신을 해야 우리가 산다! 이렇게 외치고 다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유신에 대해서 옹호를 안 한다, 그 얘기는 거꾸로 말을 하면 그러면 그 당시에도 유신을 외치고 다녔던 것이, 자기 소신이 정말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높은 자리를 할 수 있으니까….”(1989년 5월19일 MBC 인터뷰)

2007년 박 전 위원장은 이미 10년차 정치인이었다. 배신감은 그해 쓴 자서전에서도 다시 표현된다. “당시(10·26 이후)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조차 싸늘하게 변해가는 현실은 나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온갖 비화가 봇물 터지듯 신문과 잡지를 장식했다. 비화를 증언한다면서 L씨, K씨, P씨 등의 익명을 쓰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람들은 뚜렷한 신념 없이도 권력을 좇아 이쪽과 저쪽을 쉽게 오갔다.” 놀랍게도 10년차 정치인은 그 책에서 29살 때 썼던 일기 구절을 그대로 다시 쓴다.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상대의 믿음과 신의를 한 번 배신하고 나면 그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며,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제바달다’의 모반 부분을 읽었는데 역시 불타 같은 분도 이런 고통을 당했구나 싶어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했고, 인간 세상은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이런 시련을 주는구나 싶기도 했다.”-1991년 8월21일치 일기

곁을 지키는 2인자가 없는 이유

배신감은 특유의 용인술로 이어졌다. 그는 곁을 잘 주지 않는다. 2004년 이후 지금까지 중단 없이 곁을 지키는 2인자가 없다. 2004년 총선 때 박근혜 전 위원장과 함께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도 배신감과 용인술의 연관성을 지적했다. “외형적인 노력은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여전히 그 문제를 안고 있다. 청와대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 아닌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겨낸 정신력은 무서운 것이다. 지금 위치까지 본인 노력으로 왔다. 그 과정을 생각하면 (심리적) 갑옷을 겹겹이 껴입었을 것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거다. 그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제 대중정치인이 되었으니 갑옷을 확 벗어던져야 하는데 아직도 그걸 못하고 있다.”

심리적 갑옷이 ‘대통령 박근혜’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물었다. “이런 게 용인술 등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친다. (대통령이 되면) 지금 보여지는 모습이 강화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앞으로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진전할 것이다. 그런데 박 전 위원장이 최근 보여주는 모습은 그런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다. 리더십의 비민주적 측면을 자꾸 보게 된다. 다분히 권위주의적 모습을 보이지 않나. 폐쇄적이고 수직적이다. 누구와도 터놓고 소통을 안 한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는 이야기다. 늘 서늘하다. 그럼 안 된다. 뜨거울 땐 뜨겁고 찰 땐 차야 한다. 특히 지도자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다가가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박 전 위원장은 누구하고나 등거리다. 박 전 위원장의 특징이다.” 단, 박 전 위원장이 심리적 갑옷을 벗는 순간 무서운 정치인이 되리라고 윤 전 장관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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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1992년 5월21일치 일기
■ 메시아 혹은 성녀

측근의 ‘자기 정치’를 용인하지 않는 박근혜 전 위원장이기에 주요 국면에서의 선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박 전 위원장은 고독한 단독자다. 그는 정치적 자산과 부채를 주변과 나누는 법이 없었다. 그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2004년 이후로 박 전 위원장은 언제나 보수의 메시아였다. 과거 그가 쓴 글에 ‘소명’ ‘운명’ ‘열반’ ‘해탈’ 등의 개념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청와대 시절부터 그는 종교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천주교 교단이 운영하는 성심여고와 서강대를 나왔다. ‘율리아나’라는 세례명도 있다. ‘사이비 종교인’ 논란이 아직까지 제기되지만, 청와대 퍼스트레이디 시절부터 최태민 목사와 각별한 친분을 나눴다. 최태민은 5차례 결혼했고,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며 승려·교장·목사로 행세했다. 최 목사의 사위인 정윤회씨는 비교적 최근인 지난 대선 후보 경선 때도 박 전 위원장의 최측근으로서 비공식 캠프 조직을 이끌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율리아나, 그리고 선덕화

어머니인 육영수씨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박 전 위원장도 천주교·개신교와 함께 불가의 교리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2005년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서 신라의 선덕여왕과 같은 ‘선덕화’(善德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박 전 위원장은 청와대를 떠난 뒤 각종 종교서적을 탐독했다. 그는 1982년 5월31일치 일기에 “열반이란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라고 한다”고 적었다.

박 전 위원장에게 ‘성녀’의 이미지를 부여하려는 시도의 뿌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의 일기에서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나 석가모니와 동일시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리스도는 종교 박해 때문에 오히려 사방으로 그 종교가 전파되었다고 한다. 현실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자꾸 활동의 폭을 넓혀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1989년 11월5일) 1991년 8월21일치 일기에는 “어제 저녁에는 ‘제바달다’의 모반 부분을 읽었는데 역시 불타 같은 분도 이런 고통을 당했구나 싶어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했고, 인간 세상은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이런 시련을 주는구나 싶기도 했다”는 내용이 있다. 제바달다는 석가의 사촌동생인 동시에 제자였지만 세를 규합해 석가에 대항했다. 석가를 살해하려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인터넷판은 4월20일 “박근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부모를 모두 잃고 결혼과 출산도 포기한 채 나라에 모든 것을 바친 성녀처럼 본다”고 보도했다. ‘성녀’는 스스로에게 성스러움을 부여했다. 그 활동은 ‘하늘이 내린 소명’에 따른 것으로 인식된다. 1995년 발간된 수필집 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고의 삶은 하늘의 뜻으로 살고 하늘의 사업에 참여하여 그 일을 하면서 사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 중에 오로지 하늘의 사업만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영원할 수 있다”는 등의 대목이 등장한다. 1990년 9월2일치 일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권력은 칼이다. 권력이 클수록 그 칼은 더욱 예리하다. 깊은 철학을 지니고 수양을 많이 한 사람, 하늘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자기의 큰 권세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인간’들의 논란에 꿈쩍하지 않다

하늘의 가호를 받으며, 하늘의 사업을 행하는 자에게 자유로운 소통과 수평적 토론은 끼어들 틈이 없다. 인간들이 제기하는 ‘경선룰’ 논란에도 그는 꿈쩍하지 않는다. 성녀의 메시지는 ‘발신번호 표시 불가’ 전화를 타고 내려온다. 측근들조차 박 전 위원장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벽을 느끼는 이유다. 반면 긍정적인 평가도 공존한다. 박 전 위원장의 이런 인식이 ‘선공후사’라는 덕목으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윤여준 전 장관은 “박근혜표 선공후사는 분명한 장점”이라며 “다만 그 ‘공’이 민주적 공공성이 아니라 국가주의적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통 혹은 인내

박근혜 전 위원장은 ‘인내’의 화신이기도 하다. 2007년 2월 박 전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박 전 위원장과 수행단, 기자들은 공항에 도착해 입국심사에 필요한 검색을 받았다. 그런데 박 전 위원장이 검색대를 지날 때 경보가 울렸다. 소지품을 제거하고 다시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위원장은 수차례 검색을 반복했고, 끝내 별도의 공간에서 수색까지 받았다고 한다. 한 측근의 설명이다. “수행단에선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한국의 유력 정치인을 저렇게 푸대접해도 되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박 전 위원장은 불평 한마디 없이 모든 검색 절차를 마쳤다. 결국 머리핀 하나 때문이었다는 게 드러났다. 그래도 ‘그게 룰인데 지켜야지요’라고 하더라.”

“고통은 진리를 향해 들어가는 문”

주요 선거 때마다 박 전 위원장은 전국을 누비며 불패의 신화를 써왔다. 이동 중에 쪽잠을 자거나,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본인 혼자만 있는 경우라면 몰라도 주변에 참모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늘 꼿꼿했다”고 했다. 계속되는 악수로 손에 통증이 오면 붕대를 감았다. 그래도 안 되면 왼손을 내밀었다. 붕대를 감은 손은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2007년 경선 패배를 수용한 뒤 4년을 ‘여당 속의 야당’으로 견뎠다. 10·26 사태 뒤 정치권에 진입하기까지 18년 동안 박 전 위원장의 내면을 휘감았던 ‘고통’은 그의 남다른 ‘인내심’을 설명할 수 있는 실마리다.

박 전 위원장이 최측근에게만 털어놓은,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있다. 10·26 직후 박 전 위원장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리적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온몸에 갑자기 반점이 돋아났다. 의사들에게 보였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박 전 위원장을 오랫동안 보좌한 한 측근은 “육신이 무너지는 듯한 상실감이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이라며 “박근혜 전 위원장이 무슨 고생을 하고 살았느냐는 말을 들으면 헛웃음이 난다”고 했다.

박 전 위원장은 1981년 6월10일치 일기에서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의 속성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반점은 사라졌지만 마음의 고통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자매지간은 불화했고, 남동생은 한때 마약 등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부였던 아버지의 존재가 부정당했다. 그는 “고통은 진리를 향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썼다.

1992년 5월21일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그런 생은 다시 살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은 태어났기 때문에, 사명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산 것이다. 태어나서 삶을 누린다는 것에 이런 즐거움도 있구나 하고 느낀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5·16이 먼저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오느냐는 시점에 다행히 5·16이 먼저 와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 혁명도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고 본다.”-1989년 5월19일 MBC 대담

■아! 아버지

자신의 ‘고통’은 박근혜 전 위원장을 밀어올리는 원동력이었지만, ‘박정희 시대’가 낳은 수많은 다른 고통에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본인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일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청와대를 떠난 박 전 위원장이 정치에 입문한 1997년까지 18년 동안의 활동은 오롯이 아버지의 복권에 맞춰졌다. 그는 1988년 10월17일 일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은 국가를 자기와 동일시했으며 국가의 주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이라고 썼다.

“본의 아니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활동의 제약이 사라졌다. 여러 권의 책을 냈고 신문과 방송, 주간지와 여성지 등을 활발히 접촉했다. 1989년 5월19일 방송된 MBC 에서는 무려 2시간 동안 대담을 하며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물음은 집요했다. 박영선 민주통합당 의원이 기자 시절 질문지 작성에 참여했다.

대담에서 박 전 위원장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며 “5·16이 먼저냐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오느냐는 시점에 다행히 5·16이 먼저 와서 파멸 직전의 국가가 구출됐다”고 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일어난 5·16 혁명도 4·19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고 봅니다. 5·16이 있었기 때문에 4·19 때 희생된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4·19 이후 그 혼란의 와중에서 만약 우리나라가 공산당의 밥이 됐다면 그 희생이 무슨 가치가 있어요?”

박 전 위원장은 이에 앞선 1988년 12월호 인터뷰에선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옥고를 치르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고생을 한 분들”을 언급했다. “한 야당 의원이 회식 자리에서 아버지를 심하게 욕한 사실이 알려져, 기관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신병 처리를 하기 위해 이 일을 아버지께 보고하자 ‘그 사람들 보통 욕하는 것이 직업인데 왜 문초까지 하느냐. 모두 풀어주라’고 지시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 예를 보더라도 아버지 본뜻에 반해서 일어난 일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이런 일들로 인해 고생하신 분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89년에는 인터뷰를 위한 질문지를 만들었던 ‘기자 박영선’은 1994년과 2001년 기자와 취재원의 관계로 박근혜 전 위원장과 다시 마주 앉는다. 1994년 인터뷰는 당시 일반에 공개되지 않던 비원에서 이뤄졌다. 박 전 위원장 쪽이 장소를 섭외했다. 창덕궁의 후원인 비원은 조선시대 왕족이 노닐던 곳이다. 2001년 5월 인터뷰는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뤄졌다. 당시 박 전 위원장은 어머니인 육영수씨가 생전에 입던 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양친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한 논리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2007년에도 박근혜 전 위원장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라고 했다. “본의 아니게”로 시작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로 끝나는 원론적 언급도 20년 넘게 반복된다. 다소 격앙된 표현도 등장한다. “지도자를 국장으로 장사 지내고서 매도해온 10년의 세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화염병을 던지며 반항하고, 선배 알기를 개떡만도 못하게 생각하고 온통 도덕·질서·가치관 등을 뒤죽박죽으로 뒤집어놓은 오늘의 이 현실은 그동안의 역사의 왜곡으로 인한 기성세대의 자업자득이었다.”(1990년 5월15일)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박 전 위원장의 대선 후보 경선캠프에 유신을 찬양해온 박효종 서울대 교수가 참여한 건 우연이 아니다.

*참고 문헌: (재단법인 육영재단·1990), (남송문화사·1993), (한솔미디어·1995), (부일·1998), (부일·1998), (사람과사람·2000), (위즈덤하우스·2007), (나무와숲·2002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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