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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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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지마, 죽지마, 함께 걷자

영하 15℃ 강추위에 장기투쟁장 순례하는 ‘희망뚜벅이’ 동행 취재…
해고자에서 주부, 직장인까지 함께 걸으며 봄을 부르다
등록 2012-02-08 15:50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2월1일 오후 ‘희망뚜벅이’들이 경기도 과천을 거쳐 안양역 부근에 당도했다. 이날 기온은 영하 15℃까지 내려갔다.

» 지난 2월1일 오후 ‘희망뚜벅이’들이 경기도 과천을 거쳐 안양역 부근에 당도했다. 이날 기온은 영하 15℃까지 내려갔다.

속절없었다. 목도리를 두르고, 털 달린 잠바에 내복까지 입었지만 칼바람은 자꾸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휴대전화는 영하 15℃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체감온도는 더 낮은 것 같았다. 속수무책인 얼굴은 벌겋게 귀싸대기를 맞은 듯 얼얼했다. 세상이 얼어버린 지난 2월1일, 시린 추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은 진짜 고난

재능교육에서 쌍용자동차까지 서울·경기 지역의 장기투쟁장을 순례하는 ‘희망뚜벅이’들. 기실 그들의 여정은 1월28~29일 1박2일 주말 동안 서울시청과 대학로에서 열린 재능교육 복직 투쟁 1500일맞이 ‘희망난장’에서 비롯되었다. 찬바람 불던 토요일 밤, 300여 명의 시민이 모인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교육 지부장은 최근 암으로 숨진 동료 이지현씨를 그리며 “다시는 울지 않겠다. 널 기억하는 힘으로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술과 담배도 안 한 이지현씨는 46살 나이에 한숨 많던 세상을 등졌다.

난장 다음날인 1월30일, 희망뚜벅이들은 바로 그 자리 재능교육 본사 앞에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을 위해 12박13일의 먼 길에 올랐다. 코오롱, 대우자판, 콜트·콜텍, 쌍용자동차, KEC, 풍산마이크로텍, 한국쓰리엠 등 정리해고 노동자, 재능교육의 특수고용직 노동자,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해고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노동자, 세종호텔과 유성기업 등 현재 농성 중인 노동자가 시민과 함께 ‘희망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파업 중인 세종호텔에서 첫날을 묵은 이들은 이튿날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삼성 본사 앞에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노동자들과 선전전을 한 뒤 양재동으로 넘어왔다. 중간에 경찰과 실랑이도 있었다. “얼지마, 죽지마, 함께 살자”라고 적힌 희망뚜벅이 조끼를 벗고 가면 길을 터주겠다는 경찰의 요구를 뚜벅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별적으로 한남대교를 걸어 도하했다.

이들의 사흘째 일정은 2월1일 오전 9시, 서울 양재동 KEC홀딩스 본사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지난 1월13일 KEC는 166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겠다고 대구고용노동청 구미지청에 신고했습니다. 회사가 어려우니 100억원의 임금삭감안을 받아들이든지, 나가라는 것입니다. 어렵다는 회사가 올 초 109명의 인원을 대규모로 승진시키며 연봉을 올려줬습니다. 결국 노조를 파괴하고 현행 3조3교대를 2조2교대로 바꿀 속셈인 것입니다.” 양태근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 지회장 직무대행의 말이다. KEC는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해 삼성, LG, 도시바 등에 납품하는 회사다. 해고는 2월14일로 예정돼 있다. 누군가의 진짜 고난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정오에 맞춰 일행은 경기도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 당도했다. 환영사와 함께 최일배 전 코오롱 노조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2005년 5월21일 78명이 코오롱에서 정리해고됐습니다. 해고자 50명이 모여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벌인 지 7년째입니다.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 중앙노동위원회, 법원 어느 곳도 우리 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남은 17명이 대리운전, 통닭집, 일용직 노가다를 하면서도 계속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더 이상 우리의 복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리해고의 사회적 병폐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입니다.” 장갑 낀 손들의 둔중한 박수가 터져나왔다. 해고의 시간 7년은 가늠되거나 만져지지 않았다. 뒤로 멀리 정부과천청사가 보였다. 정부는 언 몸으로 서 있는 노동자들에게 폴리스라인과 교통경찰, 정보과 형사 따위를 보내주었다.



“우리의 싸움은 더 이상 우리의 복직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정리해고의 사회적 병폐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입니다.” _최일배 전 코오롱 노조위원장

“춥고 힘든 길 함께 걸으려 참가했다”

점심시간. 희망뚜벅이들은 보온비닐을 깔고 인도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과천은 건물이 없어 바람이 더 드셌다. 밥과 어묵국은 식어 있었다. 제육볶음, 오이소박이, 김치, 멸치, 크로켓, 달걀부침 등 반찬들이 실했다. 열어놓은 도시락 옆으로 밥을 먹으러 나온 코오롱 본사의 직원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저들의 밥과 이들의 밥은 다른 걸까.

한국쓰리엠 해고노동자 백승철씨와 마주 앉았다. 찬 국물을 마시며 그가 말했다. “회사가 경비용역을 때렸다는 누명을 씌워 경찰에 고소했어요. 그 이후 구속된 채 해고당했어요.” 받아적는 손가락이 시렸다. “900만원 벌금형을 받고 풀려난 뒤 지노위 결정으로 복직을 했더니 다음날로 징계위에 회부해 다시 해고됐어요.” 지난해 7월, 그렇게 그는 복직 하루 만에 다시 해고됐다. 밥을 먹으면서 들을 얘기가 아니었다. 그와 함께 쓰리엠에서 해고된 사람은 19명에 달한다. 해고당한 이후 입고 있던 작업복을 아직도 벗지 못한 그는, 같이 해고된 동료들과 화성 공장 앞에서 컨테이너를 갖다놓고 농성하다 희망뚜벅이에 합류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34살 노동자의 작업복이 추워 보였다. 그날 노동자들이 나눠준 유인물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세상은 비겁해. 나쁜 건 넌데… 아픈 건 나야….”

거리에서 점심을 먹은 희망뚜벅이들이 다시 길을 나섰다. 경기도 안양 비산사거리를 거쳐 안양역까지 이동하는 경로였다. 길을 걸으니 추위가 한결 덜했다. 눈 쌓인 고개를 넘어 인덕원사거리에 도착하자, 안양·율목생협 조합원들이 뜨거운 차와 빵을 가지고 연대하러 나와 있었다. 생협 조합원인 안양에 사는 주부 권현숙(49)씨는 “희망뚜벅이들이 안양에 온다고 해서 환영하러 나왔다”며 “애 키우느라 사회문제에 참여 못하다가 지난해 남편과 희망버스에 오르면서 다시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부들이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원래 결혼 전에는 이쪽(노조) 일을 했어요. 그리고 아들 둘이 있는데 비정규직 문제가 바로 얘네들의 문제잖아요. 정리해고도 저희 집 일이 될 수 있고요.”

희망뚜벅이를 마중 나와서 스스로 뚜벅이가 된 이들이 모두 운동권과 연이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경기도 의왕에 사는 전정화(45)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없던 그저 평범한 주부였다. 우연히 듣게 된 복지 관련 강연 이후 그의 삶은 큰 변화를 겪었다. “지난해 기준으로 보면 제가 여기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죠. 아줌마들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요? 호호.” 민중가요와 구호가 터져나오는 집회가 그녀에겐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행인들에게 상냥하게 유인물을 나눠주는 빨간 어그부츠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안양에서 직장 생활을 한다는 송아무개(34)씨는 “회사에 외근한다 말하고 함께했다”며 “그저 춥고 힘든 길을 잠깐이나마 같이 걷는다는 생각으로 왔다”고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 이런 분들이 이렇게 걷는 것이 당연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여겨지면 안 되잖아요.” 눈가에 더운 물기가 스쳤다.

온몸으로 봄을 부르는 사람들

해는 저물고, 행렬은 비산사거리를 지나 안양역으로 향했다. 역 광장에선 뚜벅이들을 환영할 문화제 준비로 분주했다.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뚜벅이들은 삼삼오오 웃고 재잘대는 입김으로 하앴다. 겨울의 한복판을 걸어 오늘 여기까지 왔구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모진 겨울을 뚫고 온몸으로 봄을 부르는 사람들. 봄을 먼저 만나고 싶은 이들은 함께 걸을 일이다. (후원 국민은행 024801-04-343823 황철우)

과천·안양=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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