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혹스럽다. 거리로 뛰쳐나가보지만, 돌아오는 건 초겨울 날씨만큼이나 싸늘한 시민들 시선이다. 한마디로 ‘싸우겠다는 결기가 안 보인다’는 것이다. 에 ‘민주당 말로는 원외투쟁, 마음은 예산심의’라는 기사가 실린 지난 11월25일, 민주당의 한 여성 중진의원은 “자괴감이 든다”고 했다. 민주당이 “몸은 몸대로 대주고, 욕은 혼자 먹고 있다”는 푸념이었다. 그러나 거리로 나선 시민단체와 촛불 시민들은 ‘몸 대주기’조차 망설이는 듯한 민주당의 소극성을 문제 삼는다.
여론 눈치 보며 시간 보내기
실제 지난 11월24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야5당-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연합집회’에는 민주당 의원 87명 가운데 21명만 참석했다. 저녁 촛불집회에서 자리를 지킨 건 정동영 최고위원뿐이었다. 이날 집회를 앞두고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김진표 원내대표의 ‘전원 소집령’이 내려진 상태였다. ‘보좌관 2명 이상 대동할 것’이란 지침까지 하달됐다. 지도부의 ‘영’(領)이 서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날치기 과정에서 보여준 민주당의 무기력한 모습을 두고는 ‘방임 의혹’을 넘어 ‘공모론’까지 제기됐다. 손학규 대표를 향해선 “한나라당에서 파견된 분 맞죠?”라고 비꼬는 소설가 공지영씨의 멘션이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서 확산됐다. 시민단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대중의 의구심은 민주당이 초반에 ‘반짝 투쟁’을 벌이다 원내로 등원하는 절차를 밟는 건 아니냐는 것이다. 벌써부터 당내 일각에선 예산안 심의 등 현안 처리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등원 불가피론이 나오는 상황이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원외투쟁의 동력이 안 모인다”고 했다. 총선을 앞두고 지역 예산을 따내는 데 정신이 팔린 의원들에게 공천권도 없는 현 지도부의 말이 힘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야권 통합과 전당대회 방식을 둘러싸고 가열되는 당내 분란도 지도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더 심각한 건 장외투쟁이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에 당내 구성원들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자체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각보다 압도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대통령 선거를 한 해 앞두고 벌어진 1996년 연말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때와는 사정이 다르다는 얘기다. 1996년 날치기 직후 가 봉급생활자 600명을 상대로 벌인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법 재개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84.6%나 됐다. 당시 국회의 의석 분포도 지금과 달랐다.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의석수는 79석에 불과했지만, 자민련(50석)과 통합민주당(15석)을 합친 야권 전체의 의석수는 144석으로 신한국당(139석)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당시 야당에는 김대중이라는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있었다. 일사불란한 조직 동원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수혜자는 안철수 원장이 되나
안팎의 상황을 고려할 때, 1996년 말과 같은 대규모 장외투쟁을 이끌 동력이 민주당과 야권에 없다는 게 정치권의 전반적인 견해다. 민주당이 당장은 시민들의 거리투쟁에 호응하는 모양새를 취하겠지만, 결국 예산안 등 현안 처리를 이유로 원내외 병행투쟁으로 가닥을 잡아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장외투쟁을 정국 주도권 회복의 계기로 활용하며, 이를 발판 삼아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일정한 양보를 얻어낸 뒤 총선을 통한 심판론으로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전략을 펴리라는 전망이다. 문제는 이런 ‘엉거주춤 스탠스’가 최근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을 지지했던 20~40대의 탈민주당 정서를 한층 강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수혜자는 물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일 가능성이 높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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