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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FTA 둘러싼 미·중·일 삼국지

한-미 FTA 통해 일본과 중국을 통제하려는 미국…
한국 협정 비준 통과 천천히 할수록 이익
등록 2011-11-11 21:22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10월 미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외교사에 유례없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만큼 미국이 한-미 FTA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다. 한겨레 김봉규

» 지난 10월 미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외교사에 유례없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만큼 미국이 한-미 FTA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다. 한겨레 김봉규



미국, 유럽연합(EU), 중국과 일본.
간단한 퀴즈를 하나 던져보자.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해 세계 4대 열강 사이의 공통점은 찾는다면? 답도 간단하다. 모두가 우리나라와 FTA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이미 한국과 FTA가 발효된 EU를 빼도, 미국 의회는 지난 10월 초 마침내 한-미 FTA 비준을 마쳤다. 지난 10월12일 미국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12년 만에 처음으로 ‘국빈’ 대접을 받았다. 10월18일 한국을 찾은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일성은? “한국과 하루 빨리 FTA 하고 싶다.” 노다보다 정확히 9일 뒤인 10월26일 서울에 온 리커창 중국부총리의 요구도 같았다. “한-중 FTA 구축 촉진하자.”
어리둥절하다. 어느새 한국은 주변 열강들의 열렬한 구애를 받게 됐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정작 4곳 열강들끼리는 좀처럼 FTA를 맺으려고 움직이지 않는다. 열강들의 뜨거운 시선은 일방적으로 서울을 향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일까. 한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속셈이 모두 다르다.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한-미 FTA의 의미도 역설적으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반도를 어지럽게 휘감은 이해관계의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한 올씩 풀어보자.
편집자

파격의 연속이었다. 지난 10월 워싱턴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미국은 마치 온 나라가 부산하게 움직인 듯 했다. 한-미 외교사에 길이 남을 극진한 대접이었다. 먼저 미국 의회가 움직였다. 상·하원은 관례를 깨고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토론을 동시에 진행했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위한 백악관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워싱턴의 한식당 우래옥에서 식사하는 때에 맞춰, 미 상원은 한-미 FTA의 이행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사실은 식당에 앉은 오바마 대통령의 블랙베리 휴대전화로 중계가 됐다. 불고기와 채소구이, 새우튀김 등 한식이 차려진 만찬장에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드라마틱한 효과는 극대화됐다. 10월13일(현지시각) 이 대통령의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는 40차례의 박수와 5차례의 기립박수가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 집권 이후 미 의회에서 연설한 외국 정상 가운데 가장 많은 박수를 받았다는 것이 청와대의 전언이었다.

MB를 극진히 환대한 이유

미국 국방부도 손님 접대를 확실히 했다. 이 대통령은 펜타곤에서 미군 수뇌부 전체가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을 받았다. 외국 정상으로서는 처음 받은 대접이었다. 오바마 대통령도 몸소 움직였다.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은 이 대통령의 디트로이트 방문 일정까지 동행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워싱턴 외부까지 외국 정상과 동행한 것도 파격이었다. 두 대통령은 지난 10월14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의 GM 공장을 함께 시찰하고, 직원들 앞에 나란히 서서 연설했다. 국내의 한 일간지에서는 이를 두고 ‘두 정상의 우정 쌓기’라고 묘사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 재임 시절에 그 유명한 ‘캠프 데이비스’에도 변변히 초대받지 못했던 전임 대통령들의 선례를 생각하면 확실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 1997년 금융위기의 격랑을 겪은 아시아 국가들은 지역 내부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후 한·중·일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단위의 금융 안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 5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에서 만난 한·중·일 3국의 재무장관들. 가운데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연합

» 1997년 금융위기의 격랑을 겪은 아시아 국가들은 지역 내부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후 한·중·일 정부는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지역 단위의 금융 안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지난 5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에서 만난 한·중·일 3국의 재무장관들. 가운데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연합

한 번쯤 물어볼 만하다. 미국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미국 쪽의 경제지표를 보면 답이 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11월2일 올해 미국 경제가 1.6~1.7%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 1월 성장률 전망치는 3.4~3.9%였지만, 연준은 지난 6월 2.7~2.9%로 한 차례 조정한 뒤 다시 이를 낮춘 것이었다. 미국 경제에 낀 먹구름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의미다. 높은 실업률도 고질적인 골칫거리다. 연준은 올해 실업률이 9%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경제문제의 핵심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내수시장이다.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으니 기업이 살아날 리 만무했다.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미국이 바라보는 곳은 다름 아닌 해외시장이다. 오바마 정부도 암울한 미국 경제를 살리는 방편으로 임기 중에 수출을 2배로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그렇지만 막상 미국 정부도 뚜렷한 답이 없어서 머리만 긁적이는 상황이다. 미국은 2007년 이후 단 한 건의 FTA도 체결하지 못했다. 한-미 FTA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미국에 몇 안 되는 지푸라기 가운데 하나다. 미국 정부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의 수출이 110억달러 늘고, 일자리도 7만 개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이런 경제 상황도 이 대통령이 받은 이례적인 환대의 이유를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2007년 4월에 타결된 한-미 협상안을 놓고 4년 동안 뜸을 들인 곳은 다름 아닌 미국 의회였다. 미국 의회가 서둘러 FTA 비준에 나선 배경을 뜯어보면, 두 가지 요소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한-유럽연합(EU) FTA이고, 둘째는 아시아 지역주의다.

먼저, 지난 7월1일 발효된 한-EU FTA가 미국에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지난 8월 작성한 보고서에서 한-EU FTA로 예상되는 경제효과를 자세히 분석한 뒤 이렇게 지적했다. “한-미 FTA 이전에 한-EU FTA가 발효돼, 유럽 기업, 특히 서비스와 자동차 분야에서 미국 기업과 경쟁하는 업체들이 한국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누리게 됐다는 의견이 있다. …이 점은 미국 의회가 한-미 FTA를 다루는 속도와 태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보고서가 나오고 두 달 뒤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4년 넘게 계속된 이견을 서둘러 수습하고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최태욱 한림대 교수(국제정치경제학)는 “미국과 유럽은 자본주의의 표준을 놓고 오랜 경쟁관계에 있다. 특히 미국은 FTA를 통해 자신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를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로 삼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의 ‘FTA 실적’은 최근 몇 년 사이 매우 부진했다. 여기에 미국의 초조함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미 FTA는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미국에 몇 안 되는 지푸라기 가운데 하나다. 미국 정부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미국의 수출이 110억달러 늘고, 일자리도 7만 개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주의에 불안한 미국

아시아의 지역주의도 미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변수다. 1997년 금융위기를 겪으며 달러의 위력을 실감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 단위의 자구적인 장치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7년 일본이 내놓은 방안이 아시아통화기금(AMF)이었지만, 이는 곧 좌절됐다. 미국이 이를 미국 패권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하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AMF가 변형된 형태로 다시 제기된 것이 이른바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였다. CMI란 2000년 타이의 치앙마이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재무장관 회의에서 체결된 통화교환 협정을 말한다. 미국은 CMI를 ‘진압’하는 데는 실패했다. 중국이 CMI를 지지하고 나선 탓이 컸다. 이렇게 시작된 CMI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2010년 3월에는 회원국들이 분담한 기금 액수를 1200억달러로 늘리기도 했다. 올해 초 영국의 경제일간지 는 “2008년 이후 핫머니 유입으로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다시 발생하지 않은 것에는 CMI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했다. CMI의 안착을 지켜보며 손톱을 물어뜯은 쪽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미국 통상정책의 오랜 ‘멘토’ 가운데 한 명인 미국기업연구소(AEI)의 클로드 바필드 박사는 지난해 1월 동아시아포럼 누리집에 올린 글에서 “최근 몇 년 사이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ASEAN+3’ 같은 형식으로 등장하는 배타적 지역주의는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 지역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이런 위기의식에서 태동한 것이 이른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Trans Pacific Partnership)이다.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이름이다. FTA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미국이 오랜 숙고 끝에 내민 카드다. TPP란 싱가포르·뉴질랜드·칠레·브루나이가 2006년에 체결한 통상 협정이다. 미국은 2009년 11월 TPP 참여를 선언했다. ‘파트너십’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FTA보다 더 강력한 경제통합 협정이다. 예를 들어 관세 인하를 요구해 농수산물을 포함한 모든 품목에 대해 즉시 혹은 10년 내 관세 철폐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사실상 FTA 정책을 포기하고 이 협정에 비중을 두는 모양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에도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오는 12월 하와이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8개 태평양 연안 국가들과 TPP 초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바필드 박사는 TPP를 일컬어 “통상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애매한 태도를 취하던 오바마 대통령이 마침내 열정을 담아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라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오랜 이해 관계를 반영할 수 있는 한 방안”이라고 했다.

TPP가 강 건너, 아니 바다 건너 불일까. 아니다. 미국의 보수적 싱크탱크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산하 태평양포럼이 지난 8월에 내놓은 ‘한-미 FTA는 전략적인 필수사항’이라는 보고서의 내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만약 미국이 한국같이 가까운 동맹국과의 FTA 비준에 실패한다면, 통상 문제에서 미국의 신뢰도가 잠식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신뢰 하락은 TPP 협상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고, 다시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해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는 미국이 배제된 아시아의 통상 질서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바라보는 미국인의 환대 이면에는 이런 불안이 어른거리고 있다. 한-미 FTA 비준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새로운 패권전략의 밑그림을 그리는 미국의 첫 작품인 셈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오랫동안 FTA 업무를 본 김양희 대구대 교수(경제학)는 “한-미 FTA는 미국 아시아 전략의 핵심인 TPP라는 큰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이런 위기의식에서 태동한 것이 이른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Trans Pacific Partnership)이다. FTA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는 미국이 오랜 숙고 끝에 내민 카드다. TPP란 싱가포르·뉴질랜드·칠레·브루나이가 2006년 체결한 통상 협정이다. 미국은 2009년 11월 TPP 참가를 선언했다. ‘파트너십’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사실 FTA보다 더 강력한 경제통합 협정이다.

일본만 원하지 않는 한·중·일 FTA

최근 20년 사이 아시아 지역의 무역 통계는 미국의 초조함을 읽을 수 있는 근거다. 한국무역협회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표1 참조), 미국의 수입시장에서 중국을 제외한 ASEAN+2 국가들의 상품 비중은 2000년 27.0%에서 2010년 16.6%로 줄었다. 같은 기간 세계의 수입시장에서는 ASEAN+2의 상품 비중이 20.2%에서 17.7%로 소폭 줄었을 뿐이다. 과거 미국으로 향하던 아시아의 수출품 행선지가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나라와 일본의 수출 통계를 보면 힌트가 보인다(표2·3 참조). 우리나라의 대미 수출 비중은 2002년 20.2%였지만 2010년에는 10.7%로 반토막이 났다. 같은 기간, 대중국 수출 비중은 14.6%에서 25.1%로 폭증했다. 미국행 수출 비중이 줄어든 만큼 거의 정확히 중국행 수출액이 늘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대미 수출 비중이 2002년 28.5%에서 2010년에는 15.4%로 줄어든 반면에 중국행 수출 비중은 9.6%에서 19.4%로 늘었다. 조현준 건국대 교수(경제학)는 “동아시아의 역외시장 수출 주도형 성장모델이 그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아시아 시장의 ‘조연’들인 ASEAN 국가들의 1993~2009년 수출입 시장 비중을 보면, 아시아 경제의 패권 흐름이 좀더 극적으로 드러난다(표4 참조). 동남아 국가를 대상으로 한 교역량을 기준으로 볼 때, 미국과 일본의 비중은 반토막이 난 반면, 1993년에는 한국보다 교역량이 적던 중국이 어느덧 이 지역의 최대 교역 강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지역주의의 물적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아시아의 ‘주연급 배우’인 한·중·일 사이의 FTA는 급변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주목받는 실험 가운데 하나다. 한·중·일은 “전세계의 주요 교역국 가운데 인접국 간 FTA가 체결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2010년 외교통상부 )이기도 하다. 묘하게도 세 나라는 모두 ASEAN과 FTA를 체결했다. 따라서 세 나라가 FTA를 체결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ASEAN+3은 거대 경제통합 구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한·중·일 3국은 1999년 필리핀 마닐라 정상회담에서 경제협력을 위한 공동연구에 합의한 뒤, 2008년 한국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3개국의 국책연구기관들이 함께 연구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후 더 이상 협상이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 연구보고서는 한·중·일 FTA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한·중·일 모두 경제통합으로 타격을 받는 취약산업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일본의 농업과 중국의 자동차·기계 산업의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한다. 둘째, 3국 사이에는 아직도 과거사 문제 같은 비경제적 변수가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원인도 그럴듯하지만,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간단하다. 일본이 한·중·일 FTA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경제 패권을 이미 빼앗긴 일본의 고민은 깊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의 리더는 일본이었다. 아시아 ‘맹주’는 지역경제 정책에 소극적이었다. 1990년대 일본 통산성의 정책 1순위는 ‘일본도 여타 동아시아 국가도 모두 FTA를 추진하지 않는 것’이었고, 2순위는 ‘일본이 FTA를 추진하고 다른 동아시아 국가가 FTA를 추진하지 않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EU가 만들어졌을 때, 아시아가 유독 조용했던 이유다. 이는 미국의 이해와도 통했다. 1997년 금융위기는 일본의 이런 대외정책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AMF가 그와 같은 예였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이 부상하자 일본에서 정책의 선순위가 재조정됐다.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핵심은 ‘중국 견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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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뜸패 중국을 견제하라

2009년 일본 경제산업성에서 내놓은 를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지역통합 부문에서 ASEAN과 일본 사이 FTA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정작 한·중·일 FTA 혹은 ASEAN+3에 대한 내용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정부의 한 관료는 “일본이 한·중·일 FTA의 공동연구에 참여한 이유는 한-중 FTA 체결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가 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통합을 위한 공동연구였다기보다는 통합을 막으려는 공동연구에 가까웠다는 의미다. 김양희 교수는 “일본은 중국의 경제적 자장 안으로 흡수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한·중·일 FTA 혹은 ASEAN+3에 매우 소극적이다.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제통합의 판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라는 ‘형님’을 끌어들여서 뒤에 숨거나, 혹은 오스트레일리아나 인도까지 끌어들인 ASEAN+6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가 국회 비준을 받으면, 한국은 곧 TPP에도 거의 확실하게 가입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을 다시 자극할 것이다.” 미국의 우파만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12월에 낸 연구보고서에서 “일본은 한국에 뒤진 FTA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다자간 FTA인 TPP를 서두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런 맥락에서 일본이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눈독을 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11월2일 일본 일간지 은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오는 11월11일 기자회견을 열어 TPP 협상 참가를 공식 발표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TPP는 일본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다시 한번 맞아떨어진 지점이다. 미국 CSIS 태평양포럼 보고서는 “경제적으로 튼튼한 일본은 미국의 아시아 전략에서 핵심이다. 그런데 현재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일본은 포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TPP를 통해 일본이 이런 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얻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분석에서 다시 한-미 FTA가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가 국회 비준을 받으면, 한국은 곧 TPP에도 거의 확실하게 가입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본을 다시 자극할 것이다. 미국의 우파만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난해 12월에 낸 연구보고서에서 “일본은 한국에 뒤진 FTA를 일거에 만회하기 위해 다자간 FTA인 TPP를 서두를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미국에 한-미 FTA는 ‘1석3조’, 즉 일본과 중국, 한국을 두루 향한 돌멩이다. 아시아에서 약화하고 있는 영향력을 재강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의 일환으로,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견인하며 아시아 전역에 미국의 힘을 강력하게 투사할 디딤돌로 삼겠다는 것이다. 중국 쪽에서 “(한-미 FTA는 미국한테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미 FTA를 둘러싼 각국의 수싸움은 동북아 질서는 물론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전략적 고빗길이다. 한국의 선택이 신중하고도 지혜로워야 하는 까닭이다.

중국의 속내는 어떨까. 중국의 생각을 읽기 전에 간단히 중국이 처한 처지를 복기해보자. 세계무역기구(WTO) 등의 통계를 보면, 중국은 2000년대 후반을 지나며 수출 총액, 제조업 생산액, 첨단기술 제품 수출액 등에서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제조업 생산액만 보면 중국은 2010년 전세계의 19.8%를 점유해 미국(19.4%)을 제쳤다. 국제 시장예측기관인 IHS글로벌인사이트의 통계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은 한국과 일본, ASEAN 등에 최대 교역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중국에 이웃 나라는 오히려 점점 ‘소국’으로 전락하고 있다. 중국의 전체 수출입에서 일본의 비중은 2005~2010년 13.0%에서 10.0%로 줄었고, 한국의 비중도 7.9%에서 7.1%로 줄었다.

비상하는 경제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경제학자인 위페이웨이는 2005년 논문에서 중국을 카드게임의 ‘으뜸패’(카드게임에서 이기는 데 가장 유리한 카드)에 견줬다. 즉, 지역통합의 조합에서 중국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나라가 됐다는 뜻이다. 조현준 교수는 “중국 중심의 경제권 내지 무역블록이 커질수록 이에 불참하는 데 따른 불이익도 커지므로 중국 중심의 지배 블록이 더 확대될 수 있다. 중국은 장기적으로 자국 중심의 유라시아 경제권을 만들고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유럽의 EU와 함께 세계경제를 삼분하는 이른바 ‘삼족정립’(三足鼎立)을 구상하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동아시아주의 vs 아시아·태평양주의

중국의 지역통합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이른바 ‘베이징 컨센서스’와 ‘ASEAN+3’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중국의 대외정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인 ‘워싱턴 컨센서스’와 대비된다. 한국의 기획재정부는 2009년에 낸 ‘베이징 컨센서스의 개념과 영향 분석’이라는 자료에서 “베이징 컨센서스는 각 국가와의 평화로운 대외관계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타국의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을 추구하는 자결주의를 지지한다”고 풀이했다. 미국 쪽의 공격적인 시장정책 전략과는 외견상으로는 일단 차이가 커 보인다. 이에 따라 중국이 외국과 맺은 FTA는 상대방 국가의 사정에 따라 다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즉 ASEAN·칠레·파키스탄 등과는 서비스 협상을 유보한 낮은 수준의 FTA를 맺은 반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는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 폭넓은 수준의 FTA를 체결했다. 지난해 5월 한국을 찾은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한국 기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과 중국이 FTA를 체결하려면 쉬운 것부터 추진하는 게 좋다”며 공산품·제조업 분야 등 상대적으로 예민하지 않는 분야를 중심으로 하는 점진적 접근방법을 제시했다. 주장환 한신대 교수(중국지역학)는 "중국은 정치가 힘들면 경제나 사회 그리고 문화 영역에서의 교류와 협력을 확대하자는 주장과 노선을 추진해왔다. 이는 ‘시간은 중국 편이다’라는 낙관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중국은 아시아의 지역통합에 대해 ‘ASEAN+3’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이 제시하는 TPP나 일본이 바라는 ‘ASEAN+6’과 분명히 선이 그어지는 대목이다. 2007년 서울을 찾은 장윤링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소장의 말은 중국의 의뭉스러운 속내가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난 몇 안 되는 예다. “놀라운 일은 일본이 ASEAN+3 FTA 대신 ASEAN+6 FTA를 공식 제안한 것이다. 일본은 처음부터 동아시아의 FTA에 인도·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ASEAN+3을 포기하고 ASEAN+6 쪽으로 간다면 방향성과 추진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우선 ASEAN+3을 시작한 뒤, 미래의 동아시아 정상회의 회원국에 개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미국도 중국과의 경합 가능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CSIS 태평양포럼 보고서는 “미국은 21세기 아시아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될지를 두고 중국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다”고 간략히 평했다. 조현준 교수는 이를 두고 중국이 추구하는 자국 중심의 ‘동아시아주의’와 미국이 추구하는 ‘아시아·태평양주의’ 사이에 상충하는 지점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미 FTA는 두 이념의 교집합 한가운데에 있다. 실제로 중국은 한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가입할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듯하다. 중국 사정에 밝은 한 학자는 “중국 관료들이 최근 만난 자리에서 한-미 FTA에 이어 한국의 TPP 서명 전망에 대해 구체적인 질문을 던졌다”고 말했다.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격동의 와중에 한국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할까.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기 쉽지 않다. 다만 지나친 ‘미국 편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교수(국사학)는 “중국 견제론에 대한 편향이 지나치다 못해 미국 쪽에 편중되며 외교관계의 균형을 잃은 듯한 모습이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양희 교수는 “정부의 협상 과정을 통상 관료들이 주도해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변수를 고려하지 않는 듯해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훨씬 더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 수 있는 이른바 ‘꽃놀이패’를 쥐고 있었는데, 한-미 FTA를 성급히 추진한 나머지 좋은 패를 활용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에 한-미 FTA는 아시아에서 약화하고 있는 영향력을 재강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의 일환이다. 중국을 견제하고 일본을 견인하며 아시아 전역에 미국의 힘을 강력하게 투사할 디딤돌로 삼겠다는 것이다. 중국 쪽에서 “(한-미 FTA는 미국한테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한-미 FTA를 둘러싼 각국의 수싸움은 동북아 질서는 물론 남북의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과정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칠 전략적 고빗길이다.

비준 촉구서한의 어리석음

위키리크스가 최근 공개한 미 외교 전문을 보면, 2008년 이상득 당시 국회부의장이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를 만나 나눈 대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뼛속까지 친미·친일이니 그의 시각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 대통령은 친중국 성향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한편 미국 방문 기간에 융숭한 환대를 받고 돌아온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0월27일 국회의원 전원에게 한-미 FTA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를 두고 은 “이 대통령이 지난 4년 동안 국회에 특정 현안의 처리를 위해 이번처럼 공을 들인 경우가 없어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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