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에 감염된 피가 유통되고 있다.” 2003년 방송 보도로 나라가 뒤집어졌다. 대한적십자사 혈액원 직원들 일부가 이런 사실을 제보해 공개된 것이다. 제보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혈액원은 이들을 비밀누설 혐의로 고소했다. 감사원이 특별감사를 통해 이들의 제보가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런데 이번엔 수사기관에서 풀려난 내부공익신고자들을 혈액원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부패방지위원회의 권고가 있은 뒤에야 혈액원은 징계위 회부를 철회했다. 감염된 혈액을 유통시킨 혈액원장 10여 명이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혈액 안전 대책도 개선됐다. ‘내부공익신고자 보호-책임자 처벌-제도 개선’이 어우러진 성공한 내부공익신고의 전범이다.
신고자 보상 조항 포함버스운전사 권태교씨는 2007년 버스회사의 요금 횡령을 언론에 알렸다. 지방자치단체의 지원금을 노리고 요금 수입을 빼돌린 것이었다. 이후 서울시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권씨는 민주노동당,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등의 도움으로 다른 버스회사에 재취업했다.
이지문 공익제보자와 함께하는 모임 부대표는 ‘성공한 내부공익신고’로 이 두 사건을 꼽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익신고 사건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한다. 무엇보다 의인을 따돌림하는 한국의 조직문화 탓에 내부공익신고자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책임자 처벌 없이 제도만 개선된 경우도 많다. 조주형 공군 대령은 2002년 차세대전투기(FX) 사업 전투기 선정 과정에서 미국 F15기를 선정해야 한다는 압력을 국방부 핵심 인사가 한다고 공익신고했다. 조 대령은 군사기밀 누설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군이 의혹을 전면 부인했으므로, 공군 및 국방부의 고위 간부 가운데 누구도 처벌·징계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국방부는 미국 보잉사와 F15 가격 협상에서 2억달러를 깎았다.
지난 3월11일은 성공한 공익신고가 늘어나길 바라는 시민들이 기억할 만한 날이다. ‘공익신고자보호법’(공익신고자법)이 이날 국회를 통과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5월 시행령을 입법 예고해 의견을 수렴했고, 이 법은 9월30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공익신고자가 불이익 조치를 받았을 때 국민권익위원회에 보호 조치 신청 △공익신고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한 자에게 보호 조치를 요구 △공익신고자의 인적사항을 공개·보도한 자에게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등이 주요 내용이다.
이 법이 2002년 만들어진 ‘부패방지 및 국민권익위원회의 설치와 운영에 관한 법률’(부패방지법)과 크게 다른 점은 민간 공익신고자를 보호한다는 사실이다. ‘부패방지법’은 부패 행위의 주체를 ‘공직자’와 ‘공공기관’으로 한정한다. 그러나 공익신고자법은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및 공정한 경쟁을 침해하는 행위’를 모두 ‘공익 침해 행위’로 삼고 이런 공익 침해 행위를 알린 신고자를 모두 보호한다. 박흥식 중앙대 교수는 공익신고자법에 대해 “민간부문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반칙 행위를 시민들이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시스템이 마련될 것”이라며 “이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시민 스스로 치유하는 ‘셀프힐링’(Self-healing) 시스템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지문 부대표도 “민간의 공익 침해 행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애초 정부안에 공익신고자에 대한 보상 조항이 빠져 있었으나, 시민단체와 우윤근 민주당 의원의 요구로 막판에 보상 조항이 포함된 것도 작지 않은 진전으로 이지문 부대표는 꼽았다.
보호 조처가 절실한 이유공익신고자법에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의 이익 및 공정한 경쟁을 침해하는 행위’를 제외한 민간기업의 위불법 경영행위와 관련한 내부공익신고자 보호조항이 없다. 그러나 이번 취재 결과, 민간기업의 내부공익신고자들에게도 특별한 보호 조처가 요구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연세대 독문과 교수들의 연구비 횡령을 공익신고한 김이섭 강사는 사건 이후 지금까지 연세대 독문과에서 강의를 배정받지 못하고 있다. 비리를 저지른 교수는 여전히 교수직에 있다. 연세대 홍보실은 “특별히 설명할 게 없다”며 입을 닫았다. KT 내부 비리를 밝힌 여상근씨와 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둘 다 현재 해직 상태다. 공공기관과 사기업의 중간 형태인 특수법인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감사 양시경씨도 부패방지위원회에 기대지 못하고 홀로 조사와 여러 건의 소송을 진행했다. 이지문 부대표는 “민간기업 비자금 조성, 분식회계, 탈세 등의 경우 다른 법률에 신고 규정이 있다는 이유로 공익신고자보호법의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흥식 교수는 교육·과학·연구·예술 분야로 공익신고 보호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7월6일 발표된 반부패네트워크의 공무원 설문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48%가 ‘2002년 부패방지법 제정 뒤 공직사회 부패가 줄었다’고 답했다. 공익신고자보호법의 목적은 이 긍정적 답변의 수치를 더 올리자는 데 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_top">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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