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시작됐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까지 20개월가량 남았지만, 손학규 민주당 대표의 경기 성남 분당을 4·27보궐선거 출마 선언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동남권 신공항 추진 발언으로 대선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데 정치인과 정치평론가, 그리고 정치권을 취재하는 언론인 사이에 이견이 없다.
흔히 ‘정치는 타이밍’이라고 한다. 어느 시점에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 그 정치인의 운신 폭이 넓어지거나 좁아진다.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은 개그계에서만 통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치권은 단 한 번의 선택과 결단으로 명암이 엇갈리는 이가 많은 세계다. 유권자인 시민의 관심과 지지는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손학규 대표와 박근혜 전 대표의 선택과 결단은 가시권에 들어온 대선을 염두에 둔 선 굵은 움직임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손 대표는 주도적으로 승부수를 던진 측면이 강한 반면, 박 전 대표는 상황에 떠밀려 수세적으로 뭔가를 내놓아야 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왼쪽)·손학규 민주당 대표(오른쪽). 연합 이상학·임헌정
대선 전초전이 된 분당을 보궐선거
지난 3월30일 국회 민주당 대표실에서 열린 손학규 대표의 출마 기자회견장은 규모만 작았지 대선 출정식 분위기였다. ‘분당’이라는 단어보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더 많은 그의 짧은 출마선언문은 “대한민국은 변해야 한다,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제 신념에 대해 분당구민들의 동의를 얻고자 합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을 분당구민들이 선택해주길 바랍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분당을 유권자의 선택에 자신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 있다는 점을 에둘러 강조한 셈이다. 손 대표의 출마로, 2012년 총선과 대선 전 마지막 전국단위 선거 정도의 의미를 가졌던 4·27 재보선은 단박에 대선 전초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강세 지역이어서 상대적으로 승패에 대한 관심도가 크지 않던 분당을 선거구가 재보선의 핵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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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손 대표의 분당을 출마에 대해 “꽃놀이패”라고 표현했다. 노름판 용어인 이 말은 돈을 따게 되면 크게 따고 잃더라도 손해가 별로 없을 때 즐겨 쓴다. 고 박사는 예상되는 손 대표의 ‘손익계산서’를 이렇게 내놨다.
“손 대표가 이길 경우 수도권의 득표력이 검증되는 것이다. 민주당 대표로 선출되며 ‘잃어버린 600만 표를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이를 부분적으로 입증하게 되는 셈이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의 야권 내 대선후보 경쟁 구도에서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는 지지율도 탄력을 받아 치고 올라갈 수 있다. 반면에 지더라도 워낙 어려운 곳에서 당 대표가 몸을 던졌는데 책임을 묻기는 어려운 상황으로 갈 것이다.”
손 대표의 태도가 “재·보궐 선거에서 무한 책임을 지겠다”(3월10일) → “당을 위한 일이라면 내 몸을 사리지 않겠다”(3월15일) →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원칙으로 이달 말까지 결론을 내겠다”(3월25일)며 출마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지만, 기자회견을 통해 출마를 공식화하자 한나라당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집권세력 내 혼선을 이유로 정부의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직 사퇴 해프닝을 빚었고, 신정아씨 자서전 파문으로 빛이 바랜 정운찬 전 국무총리 카드에 대해 미련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결국 추가 공모 없이 기존 공천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로 후보를 결정하기로 해, 손 대표의 경쟁자는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로 사실상 굳어졌다. 손 대표 처지에서 보면 정 전 총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월한 후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홍준표 최고위원은 “손 대표가 출마할 경우를 고려해 (지더라도 부담이 적은) 비례대표 여성 의원의 출마를 주장했었다”며 “이제 판이 정권심판론으로 커지고 대선 전초전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야권 연대 압박 효과까지손 대표 입장에서 ‘꽃놀이패’라는 말은 뒤집으면 한나라당이 승리하더라도 별로 빛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분당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진다면 사정은 복잡해진다. 지난해 6·2 지방선거 이후 수도권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는 우여곡절 끝에 건졌지만, 서울은 25개 구청장 가운데 21개, 경기도에서는 기초단체 31곳 가운데 21곳을, 인천에서는 10곳 가운데 9곳을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 연대 후보에게 내줬다. 서울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강세 지역인 강남 3구(서초·강남·송파)와 중랑구만이 한나라당 몫으로 돌아갔다. 지방선거 결과가 내년 총선으로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총선 1년 전 ‘민심’의 바로미터로 볼 수 있는 분당을마저 내준다면 수도권에서 더 이상 한나라당의 안전지대는 없다는 말과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은 ‘미래 권력’을 놓고 내분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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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의 정치’를 내세워온 손 대표 쪽은 이런 손익계산서에 손을 내젓는다. 진심을 다해 승리할 후보를 찾았고, 그게 여의치 않자 시간에 쫓겨 손 대표가 직접 장수로 나서는 ‘희생’의 길을 택했다는 설명이다.
익명을 요구한 손 대표의 한 측근은 “이해득실을 따져 막판까지 출마 여부를 두고 고심한 것은 정말 아니다”라며 “삼고초려를 해가면서 경쟁력 있는 후보 영입을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무산됐고, 예고한 시점에 임박해 ‘대표인 내가 희생하는 게 맞다’고 결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측근은 “분당을에서 이기는 것도 쉽지 않고, 이길 경우 지지율이 오른다는 전망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며 “평소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를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해온 손 대표가 분당을 출마를 결심한 것은 (야권 연대의 대상인) 다른 야당들을 향해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행간에 숨어 있는 손 대표의 메시지는 ‘나는 다 던졌다. 우리 대범해지자. 1년 보궐 임기의 의석 한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내년 총선과 대선을 보자’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측근들 사이에서는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라는 자조적 표현으로 부정적 전망 기류가 강했는데, 이제는 손 대표의 출마를 야권의 다른 대선주자와의 ‘그릇’을 비교하거나 야권 연대를 압박하는 카드로 활용할 만큼 여유가 생겼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왼쪽),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은 해와 달처럼 같은 하늘에서 함께 빛나기는 어려운 존재들이다. 어느 하나가 뜨면 어느 하나는 질 운명이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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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면에서 야당 대선주자들과 큰 차이를 보이며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도 지난 3월31일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 발언을 쏟아내며 대선주자로서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박 전 대표는 전날 정부의 신공항 백지화 발표에 대해 “국민과의 약속을 어겨 유감스럽다”며 “지금 당장 경제성이 없더라도 동남권 신공항은 필요한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 입장에서도 계속 추진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평소 ‘신뢰의 정치’를 내세워온 박 대표의 말 앞부분이 공약을 뒤집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라면, 후자는 유력 대선주자로서 자신의 공약을 내세운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예상을 뛰어넘는 강도 높은 것이어서 분분한 해석을 낳았다. 이 대통령과의 명확한 차별화를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영남 지역의 관심도가 높은 정책에 대한 단순한 견해 표명인가. 대구에서 열린 한 행사장에 참석하는 길에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동남권 신공항 재추진 의지’를 밝힌 대목의 손익계산서는 어떻게 될까.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신공항 건설이라는 정책에 관한 사안임에도 이번 발언은 정책적 차원이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볼 수밖에 없다”며, “박 전 대표가 의도적으로 차별화를 시도하거나 대립각을 세우려 했다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까지 밀려서 최대한 절제하면서 발언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영남은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될 경우 어차피 오는 표로 볼 수 있다. 신공항 재추진 발언으로 확장성이 늘어난다고 보기는 힘들다. 세종시 문제와는 달라 수도권 민심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결단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이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줄 경우엔 얻는 건 적으면서 많이 잃을 수 있다.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도 이 대통령을 직접 비판하지 않거나 성난 민심에 불을 댕길 수 있는 자극적인 언사를 피한 것을 보면 아직 차별화에 나선 것은 아니다.” 김종배씨의 분석이다.
일단은 청와대와 봉합 모드박 전 대표의 발언 직후 청와대와 박 전 대표 쪽은 물밑 접촉을 통해 확전을 자제하며 봉합 모드로 들어갔다. 이 대통령은 유력한 ‘미래 권력’과 다퉈 얻을 게 없고, 박 전 대표 쪽도 임기가 2년 가까이 남은 ‘현재 권력’과의 전면전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모양새로는 세종시 원안 고수로 충청권 민심을 확보한 데 이어 동남권 신공항 계속 추진 공약으로 영남권 민심을 다진 박 전 대표의 판정승이지만, 싸움은 이긴 쪽에도 상처를 남기게 마련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4월1일 신공항 백지화 결정에 대해 사과하며 박 전 대표의 발언에 대해서는 “지역구인 고향에 내려가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입장도 이해한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약속 파기를 비판하며 자신을 ‘신뢰의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자, 이 대통령은 비교적 전국적으로 고른 지지를 받는 예비 국가 지도자를 대구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격하시킨 셈이다. 이 대통령이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한때 유력 대선주자군에 포함됐던 정몽준 의원이 대신 했는지도 모른다. 정 의원은 4월1일 보도자료를 내어 “신공항 문제에 대한 박근혜 전 대표의 언급은 무책임하고 위선적인 태도”라며 “원칙과 신뢰를 말하면서도 표를 의식해서 국익이라는 가장 큰 원칙을 외면했다”고 비판했다.
실제 박 대표의 신공항 발언은, 영남 민심을 강화하면서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쌓는 긍정적 효과가 있는 반면, 당장은 국가의 균형발전보다는 지역 숙원사업 성격이 강한 정책에 지나치게 매몰됐다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 양날의 칼이다. 또 정부가 백지화 발표를 할 때까지 여당의 핵심 인사로서 무슨 역할을 했느냐는 비판도 따라온다.
이재오 등 여전히 분주한 친이계
문제는 현재 권력인 이명박 대통령 쪽과 유력한 미래 권력인 박근혜 전 대표 쪽의 갈등과 충돌의 횟수가 잦아지고 강도가 거세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지난해 8월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청와대 회동 이후 “이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차기 구도와 관련해 개입하지 않는다”는 신사협정을 맺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 대통령이 인위적으로 ‘박근혜 대항마’를 키우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석됐지만, 친이계를 들여다보면 분위기가 다르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여전히 전체 대선 구도를 흔들 수 있는 개헌론을 지피고 있고, 최근까지 정운찬 전 총리를 분당을에 출마시키려고 분주하게 뛰었다는 후문이다.
또 친이계 정치인들은 과거의 사례를 들어 대세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박 전 대표도, 2002년과 2007년 대세론의 주인공이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와 이인제 의원처럼 되지 말란 법은 없다는 것이다. 친이계의 한 의원은 “사석에서는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소문으로 돌던 ‘박근혜 파일’ 얘기도 부쩍 많이 한다”고 귀띔했다.
2011년 3월 말, 공교롭게도 하루 시차를 두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선주자가 출발선을 박차고 나섰다. 여권과 야권의 잠재적 대선주자들의 발걸음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2012년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대선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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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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