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3년이 지나면 환경보호, 노동자 인권 등 사회책임에 관한 ‘ISO 26000’ 표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기업은 수출이 힘들어질 것이다.”
기업의 사회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 관한 국제적 권위자인 마틴 노이라이터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 교수는 지난 1월25일 과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기업이 가격과 품질 경쟁력뿐만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했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며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내려면 사회책임을 더 잘 이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솔직히 국제사회에서의 일반적 인식은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이라며 “무노조 경영을 고수하는 삼성은 머지않은 장래에 불매운동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노이라이터 교수는 지난해 11월 확정 발표된 ISO 26000의 개발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비엔나대학 외에도 미국 보스턴대학과 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고, 전세계 12개국에 지사가 있는 사회책임 컨설팅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지난 1월 말 방한해 한국품질보증원(대표 송준일)과 서강대 법학연구소가 주최한 강연과 국제 세미나에 참석했다.
-과거에도 기업의 사회책임 개념이 없었던 게 아닌데, ISO 26000 출범이 기업들에 주는 새로운 의미는.
=기업들에 사회책임을 실행하는 수단과 방법을 제공해준다. 이제까지는 기업들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사회책임을 실행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었다. 이제 하나의 통일된 국제규격이 마련된 것이다.
-ISO 26000은 인증 대신 검증체제를 채택함으로써 구속력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앞으로 구속력이 더 강한 국제규격이나 국제법으로 발전할 필요성은 없는가.=검증이라고 해서 약한 표준이 아니다. 인증체제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기업이 실행하지도 않으면서 돈을 주고 인증을 받을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검증은 ISO 26000과 관련된 기업의 사회책임 보고서가 사실대로 정확히 작성됐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기업은 조직 지배구조, 인권, 노동관행, 환경, 공정운영 관행, 소비자, 지역사회 관여와 발전 등 7가지 핵심 주제와 관련해 이행한 사항을 모두 밝혀야 한다. 만약 자기가 잘한 것만 공개하고 잘하지 못한 것은 숨긴다면 검증은 실패한다. ISO 26000은 3년마다 재검토를 할 계획이다. 필요하다면 이행 관련 조항을 더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을 할 것이다. ISO 26000은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규범이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 나라가 자기 상황에 맞춰 자발적으로 법이나 제도로 채택하는 것은 자유다.
|
=오스트리아, 덴마크, 포르투갈, 브라질, 멕시코 등은 지난해 11월 ISO 26000이 확정 발표된 뒤 관련 내용을 국내법과 제도로 채택했다.
-구체적인 도입 내용을 소개해달라.=오스트리아 사회복지부의 경우 구매를 할 때는 입찰업체의 가격이나 품질뿐만 아니라 사회책임이나 환경에 관한 ISO 26000 기준 충족 여부를 함께 평가해 점수로 반영한다. 따라서 가격과 품질이 우수해도 ISO 26000 이행이 미흡하면 정부에 납품할 수 없다. 유럽연합은 오는 6월부터 상장기업들에 기존 회계보고서와 비회계보고서(사회책임보고서)를 합쳐 발간하도록 의무화할 계획이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유럽 국가의 소비자를 대상으로2009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제품을 선택하는 첫 번째 우선순위가 가격이 아니라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로 바뀐 것이다” -대한상의가 지난해 한국을 대표하는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ISO 26000에 자신 있게 대응책을 갖췄다는 응답은 5%도 안 됐다. ISO 26000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앞으로 수출이 어려워진다는 말도 있는데, 어떻게 전망하는지.
=인도는 ISO 26000 개발을 줄곧 반대했다. ISO 26000이 만들어지면 유럽에서 자국 물건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미 폴크스바겐 등 대다수 유럽 대기업들은 납품업체로부터 부품을 구매할 때 ISO 26000 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그렇게 할 것이다.
-한국 기업들도 사회책임 이행이 필수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예를 들어 자선활동(Philanthropy)을 통해 사회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포장한다든가, 사회책임보다 이윤 창출이 먼저라는 인식이 적지 않다.=모두 잘못된 오해들이다. 기업의 사회책임은 돈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사회책임은 기업이 이익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관한 것이고, 자선활동은 남은 이익을 가지고 하는 일로, 전혀 다르다. 고객이 제품을 선택하는 세 가지 우선순위는 가격과 품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같은 유럽 국가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2009년에 실시한 조사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제품을 선택하는 첫 번째 우선순위가 가격이 아니라 제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로 바뀐 것이다.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 수준에 대한 해외 평판은 어떤지. 또 글로벌 시장이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 이행에 미칠 영향은.=솔직히 말하면, 일반적인 인식은 한국 기업들의 사회책임 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값싼 제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궁극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가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중국은 지금까지 가격이 싼 제품을 생산해 성장해왔다. 그래서 ISO 26000 개발을 5년 동안이나 반대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지난해 마지막 단계에서 찬성으로 돌아섰다. 중국의 관리에게 그 이유를 물어봤더니, 정부 정책이 바뀌었다고 답하더라. 저비용 경제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고효율 경제와 사회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도 가격 경쟁력뿐만 아니라 품질 경쟁력을 중시하는데.=이제 단순한 품질만으로는 안 된다. 환경보호, 노동조건, 노동자 권리를 준수하며 어떻게 제품을 만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에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자는 ‘공정무역’ 제품을 예로 들어보자. 원산지 사람들에게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는 대가로 환경보호 등 ISO 26000 내용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베를린의 경우 공정무역 오렌지가 다른 제품보다 20% 더 비싸지만, 대다수 소비자는 공정무역 오렌지를 사먹는다. 스위스에서는 아예 가게에서 공정무역 오렌지만 거래된다. 유럽의 소비자는 이제 단순히 제품만 사는 것이 아니라 제품 속의 선한 의도까지 산다. 한국 기업들이 지금처럼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환경보호와 사회책임 이행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국 세계시장을 잃게 될 것이다. 반대로 한국 기업들이 사회책임을 준수하며 제품을 생산한다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사회책임을 다하고 만든 제품은 소비자가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지불하고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삼성 등 한국 대기업의 무노조 경영 때문에 유럽의 비영리기구, 시민단체, 노조에 의한 불매운동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실성이 얼마나 되는지.=가능성이 아주 높다. 흡연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5년 전에는 모든 장소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식당 등 거의 모든 곳이 금연을 한다.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5년 뒤에는 노조 인정 여부가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하는 기준의 하나가 될 것이다. 유럽에서는 소비자가 기업에 사회책임 이행을 요구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은 불법행위로 형사처벌을 받아 경영에서 물러났다가, 사면·복권을 받은 뒤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일이 종종 있다. 기업의 사회책임 관점에서 어떻게 보는지.=삼성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 자기설명책임, 투명성, 윤리적 행동, 법치주의 존중 등과 같은 ISO 26000의 7대 원칙에 어긋난다. 이런 기업은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투자자 유치도 어려워질 것이다. 또 공격적 기업 인수·합병 시도를 통해 오너십이 흔들릴 수 있다.
=부품업체들에 비용 절감만 요구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소니 같은 현명한 기업들은 비용 절감 요구 대신 부품업체와의 공존 전략을 쓴다. 장기적 신뢰관계를 구축함으로써 부품업체의 더 많은 투자와 혁신을 유도해, 자신의 경쟁력도 높이고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쥐어짜면 혁신을 위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사회책임이 기업의 경영 전략인 시대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정작 한국은 사회책임에 소극적인 재벌이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 예외적인가.
=간단히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소비자가 제품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가격, 품질, 사회책임 이행 순서인 사회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사회책임 이행이 제품 구입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책임에 소극적인 기업이 성공할 수 없다.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기업은 지금 당장은 좋은 실적을 거둘지 몰라도, 조만간 하향곡선을 그릴 가능성이 높다. 기업의 사회책임을 강조하는 사회가 될수록, 그런 기업은 이익이 늘어날 수 없다. 영국의 패션소매업체인 막스앤드스펜서의 예를 보자. 이 회사는 10여 년 전 한국과 중국 기업에 밀려 파산 위기를 맞았다. 새 경영진은 새로운 차별화 전략으로 사회책임을 선택했다. 이 회사의 유일한 경영 전략은 사회책임이다. 2005년부터 실적이 개선돼 결국 재기에 성공했다. (막스앤드스펜서는 전 제품의 10%가량은 공정무역으로 거래한 면(綿)을 사용하고, 매장 내 190여 개 카페에서는 제3세계 원두커피 생산자에게 공정한 임금을 주고 수입한 공정무역 커피만 제공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책임 평가에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견해가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해관계자들이 대기업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게 어려운 현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이해관계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시민사회의 역량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회책임과 관련한 국제적 이니셔티브들은 글로벌리포팅이니셔티브(GRI), 유엔글로벌콤팩트(UNGC), 국제노동기구(ILO),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이드라인 등 다양하다. 이들과 ISO 26000의 관계는.=ISO 26000 개발 과정에서 이들과 협약이나 약정을 맺고 협력했다. 사회책임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한다면, GRI, UNGC, ILO. OECD 가이드라인 등은 이들 집을 구성하는 수많은 벽돌이고, ISO는 이들을 모두 포괄하는 지붕과 같다. ISO 26000이 포괄 범위가 가장 넓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UNGC와 OECD 가이드라인은 결국 사라지고, 사회책임 보고와 관련해 특화된 역할을 하는 GRI 정도만 살아남을 것이다. 지난해 11월 ISO 26000이 확정 발표된 뒤 한 달간 규정집이 전세계적으로 3만1500부가 팔렸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내란대행’ 한덕수 석달 전 본심 인터뷰 “윤석열은 대인, 계엄령은 괴담”
“백령도 통째 날아갈 뻔…권력 지키려 목숨을 수단처럼 쓰다니”
새 해운대구청 터 팠더니 쏟아져 나온 이것…누구 소행인가?
한덕수, ‘200표 미만’ 탄핵안 가결땐 버틸 수도…국회, 권한쟁의 소송내야
한덕수의 궤변…대법·헌재 문제없다는데 “여야 합의 필요” 억지
헌재, 탄핵심판 일단 ‘6인 체제’ 출발…윤은 여전히 보이콧
국힘 김상욱·김예지·조경태·한지아, 헌법재판관 선출안 표결 참여
분노한 시민들 “헌법 재판관 임명 보류 한덕수 퇴진하라” 긴급 집회
‘오징어 게임2’ 시즌1과 비슷한 듯 다르다…관전 포인트는?
[단독] 문상호 “계엄요원 38명 명단 일방 통보받아 황당” 선발 관여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