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건강 불평등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나라는 영국이었다. 특히 영국 정부가 진행한 건강활동구역(Health Action Zone) 사업은 지역 간 건강 불평등 해소에 초점을 둔 선구적인 사업으로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영국 정부는 지난 1998년부터 영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 뒤, 26개 지역을 건강활동구역으로 정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런던 중심의 ‘수도권’에서 떨어진 중부와 북부의 가난한 지역들이 주된 대상이었다. 박지성 선수의 소속팀이 있는 잉글랜드 중서부의 맨체스터도 이웃한 샐퍼드·트래퍼드와 함께 건강활동구역으로 지정됐다. 이 지역에 사는 주민 88만여 명이 모두 사업의 대상이 됐다.
2011년 한국은 1998년 영국보다 느리다
» 영국 중부 도시 셰필드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 한 명이 환자의 산소포화도를 점검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90년대 후반 이후 셰필드와 같이 낙후한 잉글랜드 중·북부 지역 26곳을 선정해 지역 주민의 건강을 개선하기 위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REUTERS/ DARREN STAPLES
주민들은 재정 지원을 통해 보건 서비스를 받거나 보건 교육을 받았다. 2000년 3월 영국 〈BBC〉 뉴스를 보면, 맨체스터에서는 전국 평균에 견줘 두 배 수준인 이 지역의 10대 혼전 임신 비율을 낮추기 위해 16살 이상 청소년에게 사후피임약을 나눠주는 사업을 건강활동구역 사업 재원을 써서 벌였다. 이처럼 사업 목표는 지역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정했다. 예를 들어 영국 중서부 지역 도시인 울버햄프턴은 “65살 심혈관질환 사망에 가장 열악한 5개 소지역의 인구 10만 명당 사망률을 절반으로 줄인다”는 목적을 정했다.
영국 정부는 2004년 건강활동구역 시범 사업을 종료한 뒤 ‘선두그룹’(Spearhead Group) 사업으로 이름을 바꾸어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사업 목표는 좀더 광범위해졌고, 주요 항목마다 지역사회의 불평등 해결 문제도 항상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75살 미만 인구의 심장질환, 뇌졸중 및 관련 질환 사망률을 2010년까지 최소한 40% 줄인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동시에 건강과 박탈지표가 가장 열악한 하위 20%의 지역과 전체 지역 평균 사이의 사망률 격차를 최소한 40%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를 끼워넣는 식이다. 영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지역 간 건강 불평등의 해소를 10년 넘게 벌여온 가장 선구적인 사례였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2011년의 한국은 아직 1998년의 영국보다 한참 과거에 머물고 있다. 우리나라 보건 정책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이하 종합계획)을 보면, 우리나라 정부의 지역 간 건강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2002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된 종합계획 가운데 2002년판을 보면 건강 불평등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2005년에 발표된 종합계획에서는 ‘건강 형평성 제고’가 ‘국민의 건강수명 연장’과 함께 보건정책의 양대 목표로 단숨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는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각론이 부실했다. 건강 형평성 제고에 관한 내용은 24개 세부 과제 가운데 가장 마지막 한 과제에 포함됐을 뿐이다. 게다가 24번째 과제에서도 소득계층별 건강 차이를 부분적으로 해소한다는 목표는 있지만, 지역 간 불평등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은 “소득·사회계층 등 개인 차원의 건강 불평등 지표와 함께 지역 간 건강 격차에 대한 지표를 포함시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좀더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용두사미로 끝난 첫 연구작업정부가 마냥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2005년에 발표된 종합계획 219쪽에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정부는 “건강 형평성 제고를 위한 정책 개발의 기초가 되는 조사·연구를 활성화하고 지원을 실시하겠다”며 “한국판 블랙리포트를 발간하겠다”고 밝혔다. 블랙리포트란 1980년 영국에서 발간된 선구적인 보고서다. 1977년 당시 노동당 정권의 의뢰를 받아 3년 만에 제작된 보고서는 사회계층과 지역에 따른 사망률의 차이를 짚으면서 건강 불평등 문제를 제기했다. 보고서는 즉시 영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소개한 건강활동구역 같은 사업도 블랙리포트의 결과물이었다. 우리나라의 종합계획은 ‘한국판 블랙리포트’를 위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해마다 1억원의 예산을 쓴다고 기록했다.
“보고서를 정책 당국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한낯 두꺼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건강 불평등의 해결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내지는 정책적 의지의 문제였다.” -윤태호 부산대 교수(예방의학)이 사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이 소개한 ‘건강 불평등 완화를 위한 건강증진 전략 및 사업개발’ 보고서였다. 5억원의 예산으로 41명의 전문 연구진이 만 3년 동안 만든 보고서는 2009년 11월 제출됐지만 바로 창고로 직행했다. 그사이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건강 불평등이나 형평성 문제는 이번 정권과 ‘코드’가 맞지 않았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한 연구자는 “보고서가 무척 아까웠지만, 정부 용역 사업이다 보니 연구자들이 따로 발표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용역 보고서는 정책에 참고하는 목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건강 형평성 사업의 첫발은 이렇게 ‘용두사미’로 마무리됐다. 보고서는 지역 간 건강 형평성 문제와 관련해 △영국의 건강활동구역을 본뜬 ‘건강집중지역사업’ △환경영향평가와 유사한 개념인 건강영향평가제도 도입 등을 제안했지만 모두 무시됐다. 윤태호 부산대 교수(예방의학)는 “보고서를 정책 당국자가 수용하지 않는다면 한낯 두꺼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다. 건강 불평등의 해결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내지는 정책적 의지의 문제였다”고 말했다. 의지가 없는 정권을 만난 보고서는 윤 교수의 말대로 그냥 ‘종이 다발’로 오래 썩고 있었다.
응급의료에서만 형평성 제고에 겨우 눈떠정작 정부에서는 건강 형평성 사업의 일부로 분류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지역 간 건강 형평성을 개선할 수 있는 사업은 있다. 응급의료 분야의 일부 사업들이다. 이 부분에서는 정부가 최근 들어 지역 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대책을 조금씩 내놓고 있다. 지방의 응급현장 상황이 심각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김윤 서울대 교수(의료관리학)가 2006년에 내놓은 ‘응급의료 기본계획 수립 및 응급의료 운영체계’ 보고서는 조금 오래됐지만 충격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전국 32개 응급의료기관의 외상환자 의료 기록을 분석한 결과 울산에서는 사망 예측 환자 가운데 78.9%를 살린 반면, 전남은 사망 예측 환자 외에도 59.0%가 더 죽는 것으로 나타났다. 풀어서 설명하면, 흔히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외상환자 100명이 마침 울산에 있었다면 그 가운데 21명만 사망하는 반면, 전남에서는 100명이 모두 사망하고 여기에 상대적으로 외상이 가벼운 환자 59명까지 더 사망해서 159명이 세상을 뜬다는 말이다. 응급의료 서비스의 질적 수준은 지역에 따라 그만큼 편차가 크게 벌어졌다는 의미다.
전국 245개 시·군·구 가운데 응급의료기관이 없는 곳만 2007년 기준으로 43곳이었다. 정부는 2012년 말까지 3년 동안 887억원을 들여 43곳 모두에 응급의료기관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도서·산간 지역을 대상으로 헬기와 선박을 이용한 이송 체계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지역별 건강 불평등의 문제에서 예방과 진단, 일상적 치료 단계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정부가 마지막 ‘응급’ 단계에 대해서야 겨우 실눈을 뜬 셈이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체포 방해’ 김성훈·이광우 구속영장 기각
‘헌재에 쫄딱 속았수다’…윤석열 파면 지연에 매일매일 광화문
유흥식 추기경 “헌재 더 이상 지체 말라…정의에는 중립이 없다”
연세·고려·경북대 의대생 21일 복귀 마감에 “상당수 등록 중”
김성훈 구속영장 기각, 비화폰 수사 ‘암초’…“범죄혐의 다툼 여지”
“결국 김건희” “경호처가 사병이야?” 누리꾼 반발한 까닭
검찰, 이영애·김건희 친분 주장한 전 열린공감TV 대표 약식기소
야 5당, 한덕수 헌재 선고 앞 “최상목 탄핵” 이유 있었네
캐나다, 자국민 4명 사형집행에 “중국 강력 규탄”
윤석열 30년 검찰동기 이성윤 “윤, 얼굴서 자신감 떨어져 ‘현타’ 온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