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내 집에 살다시피 하며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는 ‘또 하나의 가족’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몰래 챙긴 정보를 이용해 집안의 대소사에 은밀하게 관여한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것이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일의 일단이 드러났다. 언론계와 법조계 인사들을 스카우트해 정보력을 키워온 삼성은, 방송사 가운데 삼성에 비판의 날을 세워온 문화방송을 가족처럼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최근 문화방송이 내부의 민감한 정보 누출에 대한 감사를 벌였더니, 그 끝에 삼성이 있었다.
두 달 여 동안 감사를 벌인 문화방송은, 뉴스시스템을 관리해온 A씨가 2007년 회사를 떠나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기자 B씨(삼성경제연구소 근무)에게 정보를 유출한 정황을 포착했다.프로그램 내용 올리자 삼성에서 전화
문화방송 감사실은 지난 8월부터 직원들을 상대로 감사를 벌였다.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언론사의 속성상 보안이 생명인데, 언제부턴가 지속적으로 정보가 샜기 때문이다. 그것도 뉴스 제작과 보도에 이용되는 ‘뉴스시스템’(취재 내용·기사·뉴스 큐시트·편집회의 결과 등을 공유하는 내부 정보망)에 올려진 핵심 정보였다.
이런 식이다. 삼성을 취재하고 삼성을 보도하기로 결정하면 삼성 임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구체적인 보도 시간과 보도 내용까지, 뉴스시스템을 보지 않고서는 알기 힘든 내용도 있었다고 문화방송 관계자는 전했다.
문화방송의 한 직원은 “몇 달 전 삼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제작진이 방송 내용을 내부 정보망에 올린 뒤 삼성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어떤 내용인지 대충 들었는데 비판 수위를 낮춰달라’는 내용이어서 담당 데스크가 황당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말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단순한 의심에서 ‘범인 색출’로 경계의 수준을 높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지난 8월8일 개각을 앞두고 보도국 기자들이 인선 예상 명단을 취재해 뉴스시스템에 올린 내용이 증권가 정보지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실렸다. 기자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보도국장은 감사실에 진상 파악을 요구했다.
“퇴사한 뒤 얼마 동안 (문화방송 재직 때 쓰다가) 살아 있는 아이디로 가끔 뉴스시스템에 접속했다. 12년 동안이나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동료들 소식이 궁금해 경조사 위주로 봤고, 회사가 돌아가는 내용도 봤지만 곧 닫혀서(해당 아이디로 접속이 안 됨을 뜻함) 그 뒤론 못 봤다.” -B씨두 달 여 동안 감사를 벌인 문화방송은, 내부 정보망 담당자인 A씨가 2007년 회사를 떠나 삼성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기자 B씨(삼성경제연구소 근무)에게 정보를 유출한 정황을 포착했다. 취재에 응한 다수의 문화방송 직원들의 말을 종합하면, A씨가 뉴스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아이디를 B씨에게 전달했고 삼성 쪽에서 그 아이디로 접속한 흔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또 A씨가 지난해 여름 문화방송의 내부정보를 정리해 B씨에게 보낸 전자우편이 감사 과정에서 적발된 것으로 전해졌다.
문화방송은 이런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10월28일 인사위원회를 열어 A씨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조만간 다시 회의를 열어 최종 징계 수준을 결정할 방침이다. 문화방송 노조 관계자는 “해임을 전제로 한 대기발령이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A씨는 감사실 조사에서 결백을 주장하면서 검찰 수사를 요청했다고 한다.
접속은 했으나 보지는 않았다?
문화방송은 이 대목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회사에서 벌어진 비리라도 자체적으로 조사하기에는 통신비밀보호법 등의 제약이 있다. 명확하게 진상을 규명하려면 검찰 수사를 의뢰해야 하는데, 문화방송과 검찰의 최근 관계를 고려하면 빈대를 잡으려다 집을 태울 수도 있다. 검찰이 정보 누출 수사를 빌미로 문화방송의 서버와 컴퓨터를 압수수색하면 더 민감한 정보들이 유출돼 정치적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다. 광우병 보도와 관련해 〈PD수첩〉을 수사할 때의 검찰을 떠올리면 이런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검찰은 문화방송 압수수색을 시도했으며, 수사와 무관하게 한 작가의 사적인 전자우편 내용까지 언론에 공개했다. 이번 사건의 전말에 밝은 노조 쪽 인사는 “A씨,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이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은 사건 당사자들을 직접 취재했다. A씨는 10월29일 전화 통화에서 “(자신의 일을 보도할 경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감사를 받은 사실, 징계 등과 관련한 질문에 일절 답변을 하지 않았다. 문화방송 감사 결과 정보 누출에 연루된 것으로 파악된 삼성경제연구소 B씨는 내부 정보망 접속과 A씨 접촉 사실을 일부 인정했다. 그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퇴사한 뒤 얼마 동안 (문화방송 재직 때 쓰다가) 살아 있는 아이디로 가끔 뉴스시스템에 접속했다. 12년 동안이나 회사를 다녔기 때문에 동료들 소식이 궁금해 경조사 위주로 봤고, 회사가 돌아가는 내용도 봤지만 곧 닫혀서(해당 아이디로 접속이 안 됨을 뜻함) 그 뒤론 못 봤다”고 말했다. ‘뉴스시스템에 접속했지만 기사나 기타 정보는 안 봤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연구소에 있는 내가 굳이 내용을 볼 만한 것도 아니고…”라고 답했다. 문화방송의 감사 결과에 관해 묻자, 그는 “A씨에게 뉴스시스템에 접속이 가능한 아이디를 받은 적이 없고, 1년 전쯤 취직할 곳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이메일로 한 차례 받은 것 말고는 그와 거의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사상 최악의 정보 누출 사건
그러면 문화방송 감사실은 생사람을 잡고 있는 것일까? 기자 출신의 B씨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무엇을 ‘연구·조정’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사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가 소속된 연구조정실은 일반 기업체의 기획·홍보·인사·총무 기능이 복합된 곳이다. 이 때문에 어느 부서보다 모기업인 삼성그룹과의 교류가 많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인사는 “일반 기업이 자회사에 ‘오더’를 할 때 기획실을 통하는 것처럼 삼성 전략기획실의 ‘오더’는 연구조정실로 내려온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A씨를 통해 어떤 정보가 누출됐는지, 그 정보가 B씨에게 전달됐는지, 전달됐다면 어떻게 활용됐는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은 없다. 하지만 B씨 직무의 특성상 취득한 정보가 있을 때는 이를 윗선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가능성은 문화방송 기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B씨는 삼성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친정’ 식구들을 꾸준히 만나면서 챙겼다고 한다. 보도국의 한 기자는 “B씨는 우리 기자에게 필요한 삼성 쪽 취재원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술자리도 연결해주곤 했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기자로 근무하다 삼성경제연구소로 간 뒤, 문화방송 기자 등을 상대로 삼성그룹 전반과 관련한 홍보·언론대응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문화방송 사상 최악의 정보 누출 사건으로 기록될 법한 이번 사건은 일견 간단해 보이면서도, 한쪽이 이명박 정부와 갈등을 빚어온 문화방송이고 다른 한쪽이 문화방송 출신의 삼성 직원이라는 점에서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띤다. A씨와 B씨 사이의 실선은 어렴풋이 드러났지만, 검찰 수사 없이 그 사이에 오간 자세한 내용까지 밝히기는 힘들다. 또 B씨에게 은밀한 정보가 전달됐다면 그 정보가 유통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라인은 점선이다.
이 때문에 문화방송 경영진과 노조 양쪽 모두 ‘진상 규명’을 강조한다. 한정우 문화방송 정책홍보부장은 “현재 징계 절차를 밟고 있지만 정보 유출 경위 등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를 더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근행 문화방송 노조위원장은 “삼성에 대해 명확한 조치를 하라고 회사에 요구했다. 상황을 보면서 (드러난 감사 내용을) 은폐하거나 어정쩡하게 넘어가려고 한다면 강하게 대응할 계획”이라면서 “진상을 정확히 조사해 관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 장치를 마련하라고 회사 쪽에 요구했다”고 말했다.
보도국 기자들 “참담하다” 반응보도국 기자들 사이에선 이번 일을 두고 “참담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회사의 논조나 지침과 별개로 내부자와 전직 기자가 대기업에 정보를 넘겨주는 것은 언론사에서 가장 중요한 구성원끼리의 신뢰조차 가질 수 없게 하는 것으로 치명적인 일이다”라는 우려부터 “삼성이 정보 빼내기를 시켜놓고 꼬리 자르기 식으로 ‘희생양’을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뒤숭숭한 분위기다.
최상재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대기업이 부당하게 언론사의 정보를 취득해 압력을 가하는 행위는 도덕적 파탄 수준을 넘어서는 일”이라며 “재벌이 언론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고 회유하는 수단을 마구 휘두르고 있다는 점을 직시하고 언론인의 도덕적 가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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