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맞다. 세계적 경제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제 금융기구 개혁, 글로벌 금융안정망 구축, 지속 가능한 균형성장이 선행돼야 한다. 대다수 전문가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정확한 방향 제시라 할 수 있다. 이런 개혁이 성공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이뤄지기만 한다면 세계는 경제위기의 악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세계경제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에 앞서, 위기에 대한 면밀하고도 솔직한 진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빠졌다. 미겔 데스코토 전 유엔총회 의장의 표현을 빌린다면 ‘정치적 책임의 부재’다. 예컨대 어떤 제도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제도가 만들어질 때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엄청난 실패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 사람이라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미겔 데스코토 전 의장은 “현재의 세계경제 행정 체제는 민주주의의 이 두 가지 근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했다.
가해자가 사건 조사 담당하는 꼴2008년 9월 미국의 5대 투자은행 가운데 하나인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시작으로 ‘시장근본주의’라는 신고전파 경제철학이 무너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확인한 지금, 그렇다면 과연 누가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는 지나치게 낙천적이거나 국민을 속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사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10월 말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있는 (도서출판 동녘)에서 일단 미국 재무성이나 국제통화기금(IMF)은 구원투수가 될 수 없다고 봤다. 폭행 사건의 가해자가 사건 조사를 담당한다면 여기서 나올 결과는 뻔하다는 이야기다.
이명박 대통령이 ‘선진국의 관문’쯤으로 여기는 G20 정상회의에 대한 평가도 비슷했다. 몇몇 신흥국가의 참여를 추가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G7(G8)보다 낫지만 어차피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를 배제하고 있다. 스티글리츠가 논의의 효율성만큼 중요하게 여긴 가치가 바로 ‘정치적 정당성’이었다. 그는 “G20이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75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대표성이나 정치적 정당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며 “20개국의 모임은 결국 나머지 172개 나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과 몇몇 선진국이 자국 경제를 잘못 운용해 발생한 문제로 인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개발도상국에 또다시 소수 기득권 그룹의 특권을 인정하라고 한다면, 그건 경제나 정치 이전에 도덕의 문제다.
환율전쟁 등 세계 각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시기에, 그것도 G20 정상회의라는 국가적 행사를 앞두고 너무 원론적 주장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길이 복잡하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당장 이번 G20 서울 정상회의가 핵심 의제로 제시한 IMF 쿼터(지분) 개혁 문제만 봐도 그렇다. 지금 G20이 논의하는 방향은 IMF의 지배구조가 좀더 대표성을 띨 수 있도록 ‘선진국 지분 가운데 5%를 다른 국가에 넘겨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누구의 지분을 내놓을 것인가 하는 대목에서 암초를 만났다.
애초 논의대로라면 유럽이 지분을 내놓을 판이지만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유럽에서는 미국으로 화살을 돌리고 있다. 미국의 거부권 축소부터 이뤄져야 한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서로 밥그릇을 빼앗기지 않으려 버티면 1박2일간 서울 정상회의에서도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설령 합의가 이뤄진다 해도 결과는 유럽이나 미국의 IMF 지분 일부를 중국이나 한국 등 G20에 참여하는 신흥국에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 개발도상국 등 채무국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방향과는 거리가 멀다.
달러화 독재부터 바꿔야
IMF를 개혁해야 한다는 데에서 G20과 스티글리츠의 생각은 같았지만, G20은 결코 ‘그들만의 리그’에 개도국이나 최빈국을 끼워줄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이런 식의 개혁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개도국들의 과소 대표성은 국제기구들이 구조적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정당성과 적합성을 획득하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 금융기구 내에서 개도국의 목소리를 강화하고 대표성을 확대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로 다루어야 한다.”
IMF 개혁을 위한 스티글리츠의 제안은 두 가지다. 저소득 국가의 지분 및 투표권을 확대하자는 것과 미국의 거부권 행사를 없애자는 것이다. IMF에서 미국의 투표권은 16.74%다. IMF가 정책을 의결하려면 85%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미국이 반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스티글리츠는 “세계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제도적 장치의 개혁이 임의로 선출된(G20이든 G7·G8이든)
그룹에 의해 결정되면 절대로 안 된다”며
“이번 위기의 대응 기구는 지구상의 192개국 모두의 대표를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는 이명박 정부가 G20 정상회의와 관련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글로벌 금융안전망과 환율 갈등에 대해서도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글로벌 금융안전망이란 일시적인 유동성의 쏠림 현상으로 경제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구조를 말한다. 정부는 특히 글로벌 금융안전망의 경우 ‘서울 이니셔티브’라 부르며 논의를 주도해보겠다고 나서고 있다. 몇몇 IMF 대출제도 개선안 도입이 서울 이니셔티브의 주요 내용이다.
이마저도 독일 등의 반대로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지만, 만약 독일을 설득해 가까스로 제도 개선안을 만들어낸다 해도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IMF가 그동안 제도가 불투명하고 기준이 없어서 개도국의 원성을 산 것은 아니었다. 한국어판을 번역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박형준 연구원은 “IMF 등 기존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만들어진 국제 금융기구가 애초 의도했던 개도국의 개발 활성화와 균형 유지의 역할을 외면한 채 경기순응성 정책만 고집한 결과가 지금의 글로벌 불균형을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환율 문제도 마찬가지다. 박 연구원은 “미국 달러화가 기축통화로 통용되는 지금의 세계 통화체제는 필연적으로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며 “통화체제의 개혁 없이 위기의 재발을 막고 건실한 성장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IMF는 이미 유일한 글로벌 통화라 할 수 있는 특별인출권(SDR)을 발행하고 있다. SDR가 있으면 만에 하나 국제수지가 나빠지더라도 이를 활용해 무담보로 외환을 인출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제도를 만들어놓고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 개도국이 필요로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IMF를 지배하는 미국에 이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키를 쥐느냐’그래서 스티글리츠는 글로벌 금융안전망이든 환율이든 문제의 싹을 뿌리부터 잘라내려면 달러화라는 일국의 돈이 기축통화로 통용되는 비정상적 현실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방법은 달러 대신 IMF의 SDR를 준비통화로 하는 시스템을 새롭게 도입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IMF 대신 ‘글로벌 준비은행’ 같은 기구를 만들어 새로운 세계통화를 발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기존 국제 금융기구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 등 선진국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지금의 전 지구적 경제위기를 돌파하려면 문제는 결국 제도를 ‘어떻게’ 바꾸느냐 이전에 ‘누가’ 가라앉는 배의 키를 쥐느냐 하는 부분이다. 스티글리츠는 “세계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제도적 장치의 개혁이 임의로 선출된(G20이든 G7·G8이든) 그룹에 의해 결정되면 절대로 안 된다”며 “이번 위기의 대응 기구는 지구상의 192개국 모두의 대표를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국제기구는 지금으로선 유엔이 유일하다. 그래서 스티글리츠는 G20이 아니라 ‘G192’를 말하고 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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