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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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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귀찮게 하겠네”

외부에선 ‘왕조 세습’이라 하지만 북한 주민은 “귀찮다”는 반응…

북한 이탈 주민은 “안정적 체제 안 될 것” 전망
등록 2010-10-08 15:05 수정 2020-05-03 04:26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셋째아들 김정은을 인민군 대장 등 요직에 앉힌 사실에 대해 북한 주민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REUTERS/ JACKY CHEN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셋째아들 김정은을 인민군 대장 등 요직에 앉힌 사실에 대해 북한 주민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REUTERS/ JACKY CHEN

“너무 웃기지 않아요? 처음에는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돼 판단력이 떨어진 것 아닌가 싶었어요. 이제 스물일곱이나 여덟 된 어린아이에게 대장 칭호라니 말이 됩니까.”

9월28일 오후 과 만난 고위급 출신 탈북자는 혀를 찼다. 이날 새벽 등 북한 관영매체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셋째아들 김정은이 ‘인민군 대장’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을 전했다. 북한 매체가 김정은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어린 사람이 알면 뭘 알겠느냐”

북한의 후계 세습은 ‘오래된 미래’였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3대 세습이 아닌 다른 방식의 정권 교체를 생각하기가 오히려 더 어려웠다는 점에서 그렇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역사의 전환이었지만 막상 북한이 ‘김정은 시대’를 전격 예고하자 그는 씁쓸함을 나타냈다.

“김정일 위원장도 2008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전까지는 후계 세습에 대해 극도로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습니까. 주요 당 간부 모아놓고 ‘3대 세습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며 말도 못 꺼내게 했어요. 문제는 건강이었는데, 워낙 몸이 안 좋다 보니 작년 1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하면서 무리수를 두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체제 유지를 위해 ‘강짜’를 부리고 있는 거죠. 그래도 김정은의 나이가 조금만 더 많으면 나을 텐데 너무 애를 앉혀놨어요. 김정은 체제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렇게 안정적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국내외 언론과 탈북자 단체, 대북 소식지 등을 통해 소개된 북한 주민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계 세습이야 이미 어쩔 수 없는 북한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에 고위직에 오른 김정은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RFA)은 9월28일 당대표자회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북한 주민의 반응을 소개했다. 에 따르면, 이날 양강도 혜산시의 한 주민은 “하루 종일 모여라 헤쳐라 하는 바람에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며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 애꿎은 인민들만 고달팠다”고 말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 총비서 재추대와 김정은 대장 칭호 수여 등 굵직한 뉴스가 전해졌지만, 당이 경축 집회를 예고했다가 취소하는 등 오히려 귀찮기만 했다는 반응이었다.

은 또 함경북도 국경경비대 27여단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우리도 소문을 들어 김정은 대장의 나이가 20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우리보다 한참 어린 사람이 알면 뭘 알겠느냐”고 말했다. 북한 당대표자회가 나이 어린 김정은을 인민군 대장 및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앉힌 것을 놓고 “이건 완전히 추대 행사가 아니라 강압적 명령이네…”라며 냉소적 반응도 나온다고 소개했다.

대북 인터넷 라디오 도 당대표자회 직후 이뤄진 북한 주민과의 인터뷰를 소개하며 “28일 오후 직장 경비실에 7명이 모여 담배를 피우던 중 김정은이 대장으로 승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27세가 대장이 돼 후계자로 공식화됐다는 사실을 알면 다들 기가 막혀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은과 함께 갑작스레 인민군 대장 자리에 오른 김경희, 최룡해, 김경옥에 대한 시선도 따가웠다. 특히 거의 모든 남자가 군 경험을 갖고 있는 북한에서 군 경력이 전무한 김정일 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가 대장으로 임명된 사실은 적잖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북한에서 그동안 여성 장성은 5명이 전부였다. 계급도 대장보다 3단계 아래인 소장에 그쳤다. 인민군의 장성 계급은 대원수를 정점으로 ‘원수-차수-대장-상장-중장-소장’의 6단계로 구성된다. 인민군 소장은 한국군의 준장에 해당한다. 김경희의 대장 임명은 그만큼 파격이었다.

북한 내부에서는 ‘새롭지 않은 뉴스’

탈북 지식인 단체인 NK지식인연대의 김대성 정보팀장은 “김정은에 대해서는 북한이 최근 몇 년간 우상화 작업을 진행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큰 충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대신 김경희, 최룡해, 김경옥 등 민간인이 인민군 대장 자리에 오른 사실과 특히 그 가운데 여성인 김경희가 갑작스레 등장한 대목은 아직 가부장적 사고가 남은 북한 사회에서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등 탈북자가 주축이 돼 운영하는 대북 매체와 대북 소식지의 특성상 이들이 접촉하는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평양보다는 접경지역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계층으로는 중하층 서민에 편중돼 있다는 사실은 감안해야 한다. 북한 체제에 비판적인 반응을 주로 수집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들을 빼면 그나마 북한에 자체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매체나 단체는 거의 없다.

북한 주민의 반응을 전하는 대북 소식지와 탈북자 단체의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김정은 체제의 출현을 우호적으로 지켜보는 북한 주민의 반응이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3대 세습에 대한 북한 사회의 평가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일각에서 예상하는 것처럼
김정은 체제의 출현에 대한 북한 주민의
냉소적 반응이 불만으로 이어지고,
이런 불만이 다시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 불안 요소로
확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각에서 예상하는 것처럼 김정은 체제의 출현에 대한 북한 주민의 냉소적 반응이 불만으로 이어지고, 이런 불만이 다시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 불안 요소로 확대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한 권력의 주민통제가 워낙 심해 불만의 동력이 생길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는 관계자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북한의 후계 세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다 당 간부와 군부를 중심으로 김정은 후계 구도에 대한 전망도 꾸준히 흘러나왔다. ‘새롭지 않은 뉴스’인 셈이다. 북한 전문 매체인 의 유관희 기자는 “한국 등 외부 세계에서는 북한의 3대 세습을 가리켜 ‘왕권 세습’ 등으로 비판하지만 양강도 혜산이나 함경북도 주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다지 예민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며 “주민에게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반응은 ‘아, 이제 또 (우상화 작업 등을 이유로) 귀찮게 하겠네’라는 정도”라고 말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한 이후 북한 스스로도 주민의 민심을 얻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대표적 장면이 지난해 4월 평양에서 진행된 ‘축포야회’였다. 쉽게 말하면 거대한 불꽃놀이였다. 안보당국 관계자는 “김일성종합군사대학에서 포병학 등 군사학을 공부한 김정은의 치적으로 내세우기 위해 축포야회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화폐개혁, 후계자 승계에 역풍돼

‘김정은 띄우기’를 통해 민심을 얻고자 했던 정책 목표와 결과가 어긋난 사건은 또 있다. 지난해 12월 단행한 화폐개혁이었다. 고위급 출신 탈북자는 “화폐개혁을 통해 신흥 부유층의 재산을 서민에게 분배하겠다는 의도는 나름대로 좋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며 “화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행해 이를 김정은의 치적으로 삼겠다는 의도였지만 오히려 북한 주민 사이에서는 ‘어린애가 후계자가 되더니 문제만 생긴다’며 역풍이 불었다”고 말했다.

결과가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북한도 이처럼 김정은 후계 승계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려면 민심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대표자회 직전인 8월 말 어려운 식량 사정에도 불구하고 평양시에 1개월치 특별 식량과 월급을 나눠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NK지식인연대에 따르면, 이때 배급한 식량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겉밀과 옥수수, 베트남쌀 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식량 사정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과, 이런 잡곡이라도 배급해 민심을 잡아야 하는 북한 정권의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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