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보육·가족 정책과 관련해 각국 정부의 정책을 대표하는 3개의 모델이 있다. 미국 모델, 프랑스 모델, 스웨덴 모델이다.
미국은 출산·보육을 철저히 개인과 가족에게 맡긴다. 시장에서 관련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한다. 아동 양육과 관련한 유급휴가가 아예 없다. 출산휴가로 12주의 무급 휴가가 주어질 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아동 보육 지원 예산 규모는 0.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다. 꼴찌는 한국(0.1%)이다. 중산층은 시장에서 질 좋은 보육 서비스를 구매하지만, 그 이하 계층은 저렴하지만 질이 나쁜 보육 서비스를 구매하거나 가족 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양육 방식은 선택, 비용 지원은 필수
미국 중산층 가정의 경우 2001년에 태어난 아이를 17살이 될 때까지 키우는 데 21만1370달러(약 2억4300만원)가 소요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양육을 위해 직업을 포기하는 어머니의 기회비용(직업 중단에 따른 임금 손실 등)까지 더하면 그 액수는 82만3736달러(약 9억4700만원)로 늘어난다. 유엔이 추계한 미국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2.09명으로 유럽 평균보다 높지만, 상당 부분은 이민자 가족에 의한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출산율을 자랑한다. 2009년 기준으로 합계출산율이 2명이다. 프랑스 정부는 시설이 아니라 비용을 지원한다. 양육 방식에 대한 부모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면서 그 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방식이다. 이때의 다양한 양육 방식에는 △공적 보육시설 △민간 보육시설 △가정 직접 양육 △가정 보모 고용 등이 포함된다. 중산층은 공적 보육시설을 주로 이용하고, 상류층은 보모 고용 또는 민간 보육시설을 선호한다. 빈곤층은 가정에서 직접 아이를 기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계층적 특성에 맞춰 프랑스는 다양한 지원금 제도를 갖추고 있다. 1984년 도입한 ‘아동양육수당’은 빈곤층을 대상으로 삼았다. 다만 수당을 받는 동안에는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없다.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이 제도를 도입할 당시에는 ‘실업률 저하’의 효과도 노렸다. 구직을 원하지만 실직 상태인 여성을 가정으로 돌려보내 실업률을 낮추겠다는 의도였다. 중산층이 주로 이용하는 공적 보육시설의 경우, 3~6살 아동은 비용 전액을, 3살 미만은 비용의 50%를 국가가 지원한다. 프랑스의 3~6살 아동의 88% 정도가 공적 보육시설을 이용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정부는 GDP의 4.6% 정도를 가족 관련 지출로 쓴다. 이 가운데 ‘공공보육’ 분야에 47%, ‘개인보육’ 분야에 38% 정도를 나눠 쓰고 있다.
그러나 출산·육아·가족 분야의 진정한 최고봉은 스웨덴이다. 스웨덴의 정책은 ‘국가의 책임 아래’ 부모가 함께 일하면서 아이를 기르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둔다. 노동시장에서 이탈해도 괜찮고, 민간 보육시설을 이용해도 괜찮고, 가정에서 길러도 괜찮다는 프랑스 모델과는 정책 철학이 다르다.
프랑스가 출산율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면, 스웨덴은 출산율 상승과 함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까지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2000년대 이후 스웨덴의 합계출산율은 1.9명에 육박하고, 여성 취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인 80%에 이른다. 그 토대를 이루는 정책의 두 축은 최소 16개월에 이르는 ‘유급육아휴가’와 중앙·지방 정부가 보장하는 ‘공적 보육시설’이다.
좌우파 교차 집권하며 복지는 더 강화
이와 관련한 스웨덴 좌파와 우파의 정책 대립은 흥미롭다. 1994년 기민당을 필두로 하는 우파 정권은 ‘아동양육수당’을 처음 도입했다. ‘프랑스 모델’을 차용한 것이다. 같은 해 9월, 사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곧바로 아동양육수당을 폐기했다. 그러나 지난 2008년 집권한 우파 세력은 과거의 것과 비슷한 ‘가정양육수당’을 다시 만들었다. 스웨덴 우파의 핵심인 기민당은 2007년 정책제안서에서 “정치는 가족으로부터 자기 결정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스웨덴 좌파는 이런 제도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가로막고 ‘전통적 성역할’의 함정에 밀어넣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1990년대 이후 스웨덴의 여러 복지제도에 일부 수정이 가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의 교차 집권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복지제도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한국의 좌파가 스웨덴 우파보다 ‘우경적’이라는 것은 출산·육아 제도에서 다시 한번 입증된다.
한국은 1991년 산전후 휴가(출산휴가)와 육아휴직제도를 처음 도입했지만, 오랫동안 유명무실했다. 2005년 합계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한 것을 전후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관련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2002년 처음으로 가구 자산 조사에 기초해 저소득층에 대한 보육료 지원정책이 시작됐다. 2005년엔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2007년엔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른바 ‘민주정부 10년’ 동안 여성 비정규직 급증 등을 포함해 노동 여건이 전반적으로 악화됐다. 이 때문에 관련 제도의 실효성이 낮은 상태다. 2007년 기준으로 임신 직장 여성의 산전후 휴가 사용률은 36.3%다. 이 통계에는 산전후 휴가 제도를 적용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여성이 빠져 있으므로, 전체 여성 노동자의 실제 출산휴가 사용률은 훨씬 더 낮다. 육아휴직의 경우, 월 정액으로 50만원을 정부가 지급하는데, 이는 2006년 통상임금의 26.7%에 불과하다. 상당액의 저축이 없는 한, 정부 보조금만 믿고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2007년 여성가족부 통계를 보면, 전체 보육시설 가운데 국공립 시설은 4.8%에 그친 반면, 민간 시설은 85.2%에 이른다. 민간 보육시설은 비용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현재 보육비 지원은 최저생계비의 120% 이하를 버는 가구에만 전액을 지원하고, 대다수 중하층에겐 별다른 지원이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0~5살 아동 가운데 국공립이건 민간이건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경우는 30%에 그치고 있다. 나머지 70%는 가정에서 어머니나 할아버지·할머니 등이 돌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2008년 49%에 그쳤다. 출산율은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현 정부는 여성의 몸 통제 방식 회귀”한국여성단체연합 이구경숙 사무처장은 “이명박 정부는 양성평등 차원에서 ‘일·가족 양립 정책’에 접근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낙태를 금지해 출산율을 높이겠다거나 10대 미혼모에게 10만원의 지원금을 주겠다는 정책 등이 대표적이다. 출산·양육 정책에서 한국은 오랫동안 ‘미국 모델’을 따랐고, 몇몇 분야에서 ‘프랑스 모델’을 향해 겨우 한 걸음 내디뎠으나, 그마저 주춤거리고 있다. ‘스웨덴 모델’은 여전히 먼 나라의 이야기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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