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는 국경을 넘을 때 비자를 갖춰야 한다. 안 그러면 불법입국이다. 용케 들어왔어도 불법체류자가 된다. 법의 이름으로 쫓겨난다. 반면 자본은 ‘무비자 입국’이 허용된다. 오히려 각국 정부는 법의 이름으로 외국 자본의 입국을 종용한다.
자본의 생산성? 자본의 사보타주!
자본에 한없이 관대한 이면에는 ‘자본의 생산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 고용 확대와 산업 발전을 원한다면 자본에 차꼬를 채워선 안 된다는 믿음이다.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말했다. “학생운동 할 때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게 부끄럽다. 내가 현실을 몰랐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2003년 5월 미국 뉴욕을 방문해 말했다. “개방, 규제 완화, 민영화, 노동의 유연성 제고를 추진하겠다.” 자본 개방이 득이 된다는 믿음에는 개혁 정부와 보수 정부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애덤 스미스의 고전주의 시장이론이나 카를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이론 모두 “자본이 생산성을 갖는다는 허구”에 기초해 있다고 비판했다. 그가 보기에 자본은 오히려 생산성을 ‘훼방’(sabotage) 놓는다. “자본의 소유자는 이윤을 높이려고 산업생산을 한없이 증대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이윤이 보장될 만큼만 가동되도록 제한하는 ‘사보타주’를 한다.” 자본주의는 생산성의 극대화가 아니라 생산성의 제한에 기초하고 있고, 따라서 비효율적·비생산적이라고 베블런은 주장했다. 그는 ‘비생산적인 자본’의 횡포 때문에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오늘을 사는 학자 가운데도 비관론을 펼치는 이가 적지 않다. 철학·정치학·경제학을 전공한 존 그레이는 1980년대 대처주의의 중심적 이론가로 평가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미국이 주도하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 경제의 낙후성을 극복하는 데는 동의했으나, 모든 나라가 ‘미국 시장주의의 방식으로’ 개편되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는 부정했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오히려 세계의 무역 질서를 훼손했다고 본다.
세계 자유무역의 이론적 기초는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의 ‘비교우위론’에 있다. 각 국가마다 경제활동을 가장 생산적으로 수행하는 산업이 있고, 각자 그런 산업의 상품을 교환하면 서로 이득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리카도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은 고려하지 않았다. 자본은 어디까지나 각 나라의 경제체제 안에서 더 효율적인 부문으로 옮겨다닐 것이라고 리카도는 전제했다. 그레이는 신자유주의가 이 전제를 무너뜨렸다고 지적한다.
정치는 상업적으로, 소비는 정치적으로
그는 “모든 구속을 벗어난 자본은 하룻밤 사이에 (특정 국가의) 시장을 빠져나오지만, 실물경제에 최악의 영향을 미친 자본의 효과는 수세대에 걸쳐 후유증을 남긴다”고 비판한다. 비교우위를 유지할 국내 자본 자체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레이는 전 지구적 자유시장이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라고 진단한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머지않아 세계경제는 1930년대처럼 무역전쟁, 경제적 붕괴, 정치적 격변을 재연하면서 파산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레이가 예측한 대로 신자유주의가 총체적으로 실패해 스스로 붕괴한다 해도 남는 문제가 있다. 붕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당할 것이다. 미국 사회학자 베벌리 실버는 노동운동에서 해답을 찾는다. 많은 학자들은 자본의 세계화가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분석하지만, 실버의 판단은 조금 다르다. 그는 지난 한 세기에 걸친 전세계적 노동운동의 흥망성쇠를 검토한 뒤, “산업의 세계화는 새로운 거점에서 새로운 노동운동을 창출하고 강화한다”고 결론짓는다. 한 국가 차원에서는 노동운동이 쇠약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 차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노동운동이 탄생해 지구적 자본과 긴장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전반에는 섬유산업 노동자가, 20세기 후반에는 자동차산업 노동자가 세계 노동운동을 이끌었다고 실버는 평가한다. 자동차산업의 노동운동은 ‘공장 중심’이었다. 반면 섬유산업 노동운동은 ‘지역 중심’이었다. 실버는 “서비스 부문을 포함한 21세기 새로운 산업의 새로운 노동운동은 20세기 전반의 섬유산업 노동운동을 닮았다”고 평가한다. 공장 노동조합이 중심이 되기보다, 더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정치·시민 조직과 연합해 자본에 대항한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은 한국 노동운동의 미래지향에 많은 영감을 준다.
노동운동보다는 새로운 ‘시민운동’에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제 정치력을 발휘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은 1달러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슈퍼마켓에 있다”고 주장한다. 각국 정부는 이미 다국적기업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으므로,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대신 허츠는 ‘소비자 행동주의’를 주문한다. “기업도 정치도 대중의 지지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불매운동·규탄시위 등은 다국적기업에 대처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정치는 상업적으로 변했다. 대신 소비는 정치적으로 변하고 있다.”
영국 의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인 조지 몬비오는 소비자 시민운동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소비자 민주주의는 덜 효과적”이다. 그는 여전히 민주주의를 신뢰한다. 대신 이때의 민주주의는 한 나라 안에서 전개되어선 안 된다. “모든 것이 세계화되었다. 오직 민주주의만이 국민국가에 갇혀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몬비오의 대안은 과감하다. “민주주의 원리로 세계를 운용하자”고 주장한다. 그는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세계의회, 무역불평등을 조정하는 국제청산동맹, 가난한 나라를 돕는 공정무역기구 등 ‘민주적 국제 정부’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자본을 규제하고 투기를 종식시키는 일이 세계 모든 사람의 이익에 부합”한다면, 이를 강제할 민주주의 국제 기구를 통해 “인류 최초의 지구적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자는 것이다.
초법적 시장을 법적·사회적 산물로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더 급진적인 제안을 내놓는다. 그는 민주주의가 세계 차원에서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비롯한 ‘중앙집권적 프로젝트’를 접고, “다양한 중심을 갖는 분자적 혁명”을 이뤄야 한다고 제안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은 세계 곳곳에 그물망을 펼쳐두었다. 그물을 찢는 것은 어떤 중심이 아니라, 그물이 펼쳐진 곳곳에서 이뤄질 수 있다. 그는 “모든 사회세력의 다각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본다. 예술인·노동자·정치인·소비자 등 다양한 주체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서구의 여러 ‘행동주의자’들은 네그리의 제안에서 깊은 영감을 얻고 있다. 걸리는 족족 저항하고 항의하는 ‘지구적 차원의 원자 저항’이 지구적 차원의 자본에 대항하는 유력한 방도라고 믿고 있다. 한국 콜트·콜텍 노동자와 연대하려는 미국 가수 톰 모렐로의 실천도 이런 맥락에 있다.
그러나 여러 급진 이론이 내놓는 분석과 해법은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노동자에겐 너무 멀리 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필요하다. 존 그레이는 “풍부한 정책자원을 활용하면서 적절한 관리가 이뤄지는 경제” 또는 “시장을 (초법적 산물이 아닌) 법적·사회적 산물로 간주하고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폭넓게 보장하는 독일식 경제”를 ‘선진 경제’로 평가했다. 한국 정부도 이런 정도의 일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참고 문헌: (베벌리 실버, 그린비), (조지 몬비오, 창비), (안토니오 네그리·펠릭스 가타리, 갈무리), (한스 마르틴·하랄드 슈만, 영림카디널), (노리나 허츠, 푸른숲),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시대의창), (소스타인 베블런, 책세상), (존 그레이, 창)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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