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정치’에서 중도는 어떤 의미일까?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은 또 어떻게 비칠까? 한나라당과 민주당에서 줄곧 중도개혁을 주장해온 남경필(한나라당)·김부겸(민주당) 의원이 이런 고민을 들고 마주 앉았다. 중도란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는 정의를 비롯해 한국 정치가 중도로 수렴돼야 한다는 총론에선 ‘중도발 정계 개편’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싶을 만큼 두 사람의 견해가 일치했다.
지난 9월23일 대담이 진행된 국회 의원회관 남경필 의원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한나라당 소장파’ 깃발 아래 한솥밥을 먹었던 이력을 증명하듯 편안한 웃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 인준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강조한 뒤 처음 단행한 인사를 놓고 이들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정 후보자 인준과 고위 공직자 도덕성 논란의 해법에선 각자 방점을 달리 찍었다.
김부겸 의원(이하 김)= 민주당은 정운찬 총리 후보자를 순순히 통과시켜주기는 어렵다는 분위기다.
남경필 의원(이하 남)= 그래도 정 후보자는 인준해야 하지 않을까. 국민이 열받는 건 두 가지 때문이다. 국민에게 법 지키라면서 어떻게 높은 사람은 안 지키나, 한나라당이 야당 땐 (인사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더니 왜 정권을 잡고 나선 안 그러나. 논문 중복 게재나 위장 전입이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때가 있었는데, (야당 땐) 그런 이유로 낙마시켰다. (하지만 공직 후보자의) 능력이 있다면 문제가 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된 사람들은 야당 시절 잣대로 보면 다 ‘아웃’시켜야 한다. (그럴 수 없으니) 대통령이나 당대표가 나서서 한나라당이 과거에 지나치게 엄격하게 (검증)했던 일에 유감을 표시하고, 관행적으로 했던 일이니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단 그런 일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합의가 이뤄진 2002년(위장 전입으로 장상·장대환 총리 후보자의 인준이 잇달아 부결됨) 이후 있었던 일은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
김= 유감 표명은 필요하다. 국민 대다수는 위장 전입 같은 약삭빠른 선택을 하고 싶어도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그땐 다 그랬다고 하는데, 진보·보수를 떠나 돈과 정보가 남들보다 많은 일부만 그런 거다. 대다수 국민이 느끼는 좌절과 상처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난 적어도 정도가 지나쳤다고 생각되는 한두 명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국민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선 공직 후보자를 무대에 올리기 전에 상대적으로 많이 검증했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서 도덕적 하자 문제가 제기된 이명박 대통령은 그만큼 공직자가 고된 (도덕적) 통과의례를 거쳐 임명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중도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적당한 가운데가 아니라, 성장을 하더라도 최소한 민주주의와 민생은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시민들이 불복종운동이라도 벌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웃음)
남= 도덕성 문제가 이명박 정부에서만 두드러진 게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똑같이 있었다. 김 의원 말대로 돈과 정보가 많은 사람이 남들보다 발빠르게 움직이는 건 이념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경우 도덕성 문제에서 자유로우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만델라식 해법(과거사를 규명하되 법적·도덕적 책임은 사면해 화합을 모색하는 방식)을 내놓아야 한다. 과거 관행적으로 있었던 위법 행위의 솔직한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고, 나라를 운영하려면 (위법 행위자도 넓게 써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아야 한다.
줄기차게 중도개혁을 고민한 두 사람의 해석이 이렇게 다른 걸 보면, 한국 정치에서 중도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생각이 다른 게 아닐까? 하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중도의 가치와 지향점에 대한 인식은 물론, 4대강 사업·대북정책 등 현안과 중도실용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지적도 일치했다.
김= 중도는 세상살이의 근본 태도와 가치의 집합으로, 공존·상생·공동번영을 하겠다는 태도와 정책이다. 중도가 추구하는 큰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파이가 돌아가는 지속 가능한 성장이다. 특히 한국 정치에서 중도는 지난 60년 동안 시달린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받는다. 그래서 이 대통령도 당당하게 중도실용을 하겠다고 대선에 나선 것 아닌가.
남= 중도는 아직 정치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세력화하려면 가치가 정립되고 그에 따른 정책이 나와야 한다. 김 의원이 성장과 분배의 통합을 중도의 가치라고 했는데 이에 동의한다. 덧붙여 내가 추구하는 건 자유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미네르바를 구속하고, 마스크법·사이버모욕죄를 도입해 표현의 자유와 창의력을 위축시키려 한 일은 다시는 시도돼선 안 된다. (중도 정치세력이 내놓아야 할) 정책은 모두가 불안한 시대에 그 불안을 국가가 해결해줄 사회 안전망, 경제를 역동성 있게 성장시킬 방법, 남북 문제를 포함한 외교안보 전략 이렇게 크게 세 가지다.
김= 중도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가 같이 가야 한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은 정책을 권위주의가 아닌 민주주의 방식으로 실현하는 게 중도다. 누구는 진보엔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묻고, 보수엔 뒤처진 사람을 어떻게 할지를 따져묻는 게 중도라고 하더라.
남= 정치공학적으로 보면, 40%에 이르는 중도층, 즉 ‘산토끼’를 잡으려고 중도 정책을 표방하는 거다. 폴 크루그먼의 를 보면, 미국이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도 분배 불균형이 가장 줄었던 황금기가 루스벨트 이후 레이건까지 40년이다. 민주당은 그대로 가되 공화당이 중도로 올 땐 갈등이 줄고 경제가 잘 운영되면서 양극화도 줄어든 반면, 부시 때처럼 공화당이 극단적인 우파로 가면 갈등과 양극화가 심해졌다. 각 정당이 중도로 수렴하는 게 성장과 분배 문제를 해결할 환경을 만든다는, 즉 정치가 경제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 앞으로 (한국에) ‘중도’라는 이름의 정당이 생긴다면 각 당의 정책 방향은 더욱 중도로 갈 거다.
김= 우리 당은 이 대통령의 중도실용을 사기라고 비판하는데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최근의 변화가 정책 운영 기조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그래야 야당도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대안을 내놓을 거다. 이 대통령의 중도실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어떤 사회적 변화를 불러올 건지 두고 볼 생각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의 철학이나 구상을 내면화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랫동안 기업에서 커왔고 서울시장을 거치다 보니, 국민 속에 자리잡은 민주적인 생활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또 정치는 ‘비효율’ 속에서도 조금씩 문제를 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인데, 이 대통령은 이를 ‘왜 여의도만 가면 이렇게 느려지냐’고 여긴다. 정말 중도실용으로 가려면 그런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남= 난 4대강 사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감세로 재정 적자가 늘어난 상황이다. 대규모 국책사업을 할 수가 없다. 20여조원을 써야 한다면 4대강 사업이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써야 한다. 부자 감세, 중산층 증세로 가서도 안 된다. 특히 대북 문제는 ‘비핵·개방·3천’(북한이 핵을 폐기하고 개방하면 북한 경제를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 3천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도록 돕겠다는 구상)이 아니라 개방과 비핵, 3천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김= 대북 문제는 이 대통령의 주장대로 못 푼다. 과감히 (비핵·개방·3천 구상을) 버려야 한다. 불과 몇 달 전 이 대통령은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제안했다. 그런데 한때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까지 했던 미국이 전직 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보냈다. 북한을 대결적 관점으로 보는 건 미래를 위한 정책이 아니다. 후세에 부담을 지우는 4대강 사업은 재검토해야 한다. 부동산 문제엔 적극적으로 개입해 자산 양극화를 줄여야 한다. 지난해 경제를 살리겠다고 푼 돈이 투자로 연결되지 않고 부동산을 떠돌고 있다. 이건 ‘시장 원리’가 아니다.
‘신중도’를 표방한 ‘뉴 민주당 플랜’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김 의원은 “정부의 중도실용은 패션이고, 뉴 민주당 플랜은 역사적 화두”라며 두 가지를 비교하는 것 자체에 불쾌감을 드러냈다. 반면 남 의원은 “진정성이 다르다”며 에둘러 정부의 중도실용 ‘주장’을 비판하면서도 두 중도의 경쟁을 강조했다.
김= 뉴 민주당 플랜은 민주화 투쟁과 집권 10년의 노선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에 나온 거다. 더 많은 기회, 더 높은 가치,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세 가지 가치를 내걸었다. 토론을 거쳐 살을 붙이면 민주당이 내세울 최고의 가치라고 본다. 물론 민주당의 우경화 우려엔 아픈 부분이 있다. 하지만 관념과 현실은 다르다. 나는 현실을 변화시킬 집요하고 성숙한 대안을 만들지 못하면 정치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민주당의 목표는 ‘반대 정당’이 아니라 선택하고 싶은 ‘대안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남= 뉴 민주당 플랜은 아쉬웠다. 야당이 약하면 여당은 부패하거나 나태해진다. 야당은 모든 걸 잃어버린 폐허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도약할 수 있는데, 민주당의 사정을 지켜보면 현실이 녹록지 않다. 공짜 점심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민주당이 반사이익을 본 것 같지만, 실은 당의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토론을 어렵게 만들었다. (뉴 민주당 플랜 논의가 잘 진전돼) 이명박표 중도와 민주당표 중도가 경쟁했으면 좋겠다.
김= 정부의 중도실용은 실제 정책과 국민과 소통하는 방법에 어떤 변화가 쌓이는지를 지켜봐야 판단할 수 있다. 아직은 ‘패션’이다. 반면 뉴 민주당 플랜은 해방 이후 60년 우리의 좌절과 성공 경험이 녹아 있다.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고민이고, 역사적 화두를 던진 거다. 그걸 쉽게 유행을 타는 것으로 본다면 불만이다.
남= 진정성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진정성은 예산 집행으로 나타난다. 20조원을 4대강이 아니라 비정규직 문제 해결, 사회적 일자리 만들기에 써야 중도실용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남경필 의원은 “중도세력 대선 후보를 만들겠다”고 했다. ‘한나라당 소장파’ 10여 년 활동의 반성이었다. 김 의원은 “존경한다”고 화답했다. 목소리에선 ‘동지의식’이 느껴졌다.
남= 당에 아무런 기반이 없던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표방해 한나라당 후보가 되고 대통령에 당선된 덴 우리(소장파)의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절반의 성공이다. 우리 스스로 세력화하거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성한다. 이젠 ‘친이’ ‘친박’ 지겹다. 우리가 대통령을 내겠다. ‘우리’는 중도의 가치와 정책을 만드는 데 동의한 사람 모두다(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우리’의 범위를 두고 “야권 정치인도 환영한다”고 했다). 새로운 세력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다. 아까 말한 자유와 책임이라는 중도의 가치, 그에 걸맞은 정책을 만들어내겠다. 우리 모두에게 중도 세력의 대선 후보가 될 기회가 있고, 후보가 결정되면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김= 남 의원이 고독한 결심을 털어놓았다. 존경한다.
정리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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