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나’란 주제로 강연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글쓰기가 일반화된 인터넷 환경 때문에 문학을 공부하는 국문과나 문창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가 가능해지면서부터다. 책 읽는 방법과 쓰는 법에 관련된 책들이 붐이었고, 다양한 작가들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시니컬함의 대명사, 기타노 다케시 식으로 말하면 ‘작가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니까, 꿈도 꾸지 마라’가 될 것이고, 반대편에 서 있는 노희경 작가 식으로 말하자면 ‘꿈꾸는 자, 작가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로 말하면, 누구나 글을 쓸 수는 있다고 본다. 단, 자신의 느낌을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은 방식으로 솔직히 이야기할 용기만 있다면.
13년간 무수히 많은 실패담의 주인공내 경우, 첫 시작은 한 권의 책이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 그 시절, 말랑말랑한 사랑을 꿈꾸는 여중생에게는 ‘할리퀸 문고’와 ‘파라북스’가 있었고, 같은 만화와 같은 명작소설이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쓴 탐욕스런 독서가 앞에선 ‘도서대여점’ 아줌마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터라, 그 시절 시드니 셸던과 스티븐 킹의 소설들은 남아나지 않았다. 책을 빨리 읽던 내 경우엔 하루에도 몇 권씩 소설을 읽었는데, 결국 소설을 직접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더 읽을 소설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책 얘길 늘어놓는 건, 결국 글쓰기의 욕망은 책 읽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쓴 첫 소설은 ‘바른손’ 노트에 볼펜 똥이 한 무더기씩 삐져나오는 파란색 모나미 볼펜으로 써내려간 연애소설이었다. 호르몬으로 충만한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연애의 상상은 풍성했고, 바른손 노트가 세 부분으로 뜯겨져나갈 만큼 내 소설은 인기 절정이었다. 내 친구들 중 내가 소설가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소녀가 없을 정도였다.
글쓰기의 전성기를 지난 이후, 나는 무수히 많은 실패담의 주인공이었다.
13년을 ‘주구장창’ 떨어진 신춘문예 때문에 꽤나 시니컬해진 20대엔, ‘행복이란 불행하지 않은 것’이란 정의를 내렸고, ‘돈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란 얘길 아무렇게나 늘어놓곤 했다. 실패가 주는 굳은살들이 내려앉을 때마다 나는 긍정이 아닌 부정이 가진 힘을 믿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잦은 실패로 생긴 생채기 때문에 아마도 가슴에 든 멍으로 나는 피기도 전에 꺾여버렸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난 상처를 달래주는 법을 배워야 했는데, 그것이 내겐 자조와 위악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성공’보단 인생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대한 태도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꼴찌에게 박수를’ 같은 정서적인 얘기가 아니라, 이건 아주 현실적인 측면의 얘기다.
카피라이터·에디터·기자로 ‘대신 인생’을 살다한 줄짜리 카피를 쓰던 광고회사 카피라이터에서 원고지 7매 책 리뷰를 쓰던 인터넷 서점의 에디터 시절을 거쳐, 30매짜리 인터뷰 기사를 쓰던 잡지사 기자를 하는 동안, 내내 ‘대신 인생’이란 말을 쓰곤 했다. 이런저런 회사를 다니며 쓰게 된 다양한 형태의 글들이 ‘소설을 쓰는 대신’이란 의미에서 그랬고, 실제 ‘소설가’를 만나 인터뷰하면서부터는 ‘소설가가 되는 대신’이란 뜻에서 그랬다. 에디터나 기자 출신의 작가가 많은 건, 아무래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취재원과 취재 경험을 통해 결국 ‘기사’이기 때문에 쓸 수 없었던, 소설만이 쓸 수 있는 ‘행간’ 너머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굴욕을 참는 법, 조직에서 버티는 법, 듣도 보도 못한 명목의 세금으로 뜯겨나가는 쥐꼬리 월급으로 사는 법 등등을 배우는 동안, 내 체질은 바뀌었다. 허공에 떠 있던 글들이 서서히 현실로 내려앉기 시작했고, 소설 속에 대화가 많이 등장했으며, 캐릭터들이 변했다. 나는 기적처럼 작가가 되었다.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등단하던 2006년, 아무도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기 때문에 을 썼다고 고백했던 소설가 은희경의 독백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의 독백이 문학적 ‘레토릭’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단 이후 3년간 단 한 번의 원고 청탁도 없었다는 소설가 L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수히 많은 문학상을 탄 K가 말했다.
“3년? 난 5년 동안 한 번도 안 왔는데 뭘.”
시인이 소설가가 되거나, 소설가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일에는 현실적인 ‘청탁의 논리’라는 것도 들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것 같은 작가들 중 이 지난한 무명의 시절을 견디지 않은 작가는 별로 없었다.
나로 말하면, 등단과 함께 시작한 일간지 연재가 꽤 인기를 끈 까닭에 ‘소설’보다는 ‘칼럼’ 청탁이 더 많았다. 심지어 문학 계간지에서조차 소설 대신 ‘드라마 분석기’ 같은 칼럼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말을 말자. 일간지 칼럼 뒤에는 늘 ‘소설가 백영옥’이라는 크레디트가 붙었지만 내 소설을 찾아서 읽고 싶다는 독자의 전자우편에도 나는 답장을 쓸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던 은 주어지는 지면이 없던 신인이 쓴 절박한 소설이다. 소설가이긴 하나, 소설책이 한 권도 나오지 않았던 칼럼니스트가 쓴 소설이기도 하다. 12월이면 줄줄이 이어지는 신춘문예병으로터의 해방, 각종 장편 공모전으로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신인작가들의 탈출기, 그러므로 1억원 고료의 화려함이 아니라 작가로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수많은 신인들이 도전하는 높은 산 같은 것 말이다.
딱히 문학상에 대한 전략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작가로서 내가 가진 절박함은 쓰고 싶었던 것들을 폭발하듯 써내려가게 했다. 그것은 읽고 싶었지만 아무도 쓰지 않던 이야기였고, 새벽 3시 마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던 직장인 시절의 내가 읽고 싶었던 조금은 달콤하고 씁쓸한 얘기들이었다. 서른셋의 내게 필요했던 게 허리 통증을 줄여주는 옥돌 매트와 새벽의 외로움을 달래줄 맥주 한 캔이었던 것처럼.
어떤 자음과 모음이든 응원하리세상에 쓰레기가 없다고 믿는 건, 그런 것마저 썩어서 새로운 글쓰기의 퇴비가 되리란 믿음 때문이다. 지금도 누군가 쓰고 있을 미완성의 소설들, 독감만큼 독한 마감을 끝내고 침대에 누워 조금씩 쓰던 소설, 재즈바를 운영하며 탁자에 앉아 써내려갔던 어느 가게 주인의 첫 소설처럼 그것이 어떤 사람의 얘기라 할지라도, 나는 응원하겠다. 결국 한 권의 책을 쓴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자음과 모음을 한 글자씩 써내려가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엄청난 노동 집약적인 행위이므로.
행동하지 않으면 실패는 없다. 하지만 성공도 없다. 비행기가 날지 않으면 사고 따위 일어날 리 없다. 하지만 날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비행기이겠는가.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
백영옥 소설가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중립인 척 최상목의 ‘여야 합의’…“특검도 수사도 하지 말잔 소리”
박종준 전 경호처장 긴급체포 없이 귀가…경찰, 구속영장 검토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임시공휴일 27일 아닌 31일로” 정원오 구청장 제안에 누리꾼 갑론을박
경호처 2·3인자가 김건희 라인…‘윤석열 요새’는 건재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윤석열 수배 전단 “술 고주망태, 자주 쓰는 말은 반국가세력”
최상목의 윤석열 체포 ‘지연 작전’…‘특검 합의’ 내세워 국힘 편들기
국민·기초연금 1월부터 2.3% 인상…물가상승률 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