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이 200조원을 넘었다. 지난해 대한민국 정부 예산(195조원)보다 많다. 그 핵심은 삼성전자. 지난해 매출이 118조원에 이른 초거대 글로벌 기업이다. 지난해 영업이익만 해도 5조7천억원에 이른다. 임직원은 20만 명을 넘는다. 임원만 800명을 넘는다. 삼성전자 임원 조직도는 A4용지로 5~6장을 넘어간다. 고위 임원만 한 장에 축약해도 A3용지 크기다.
최고고객경영자, 고객은 글로벌 기업들현재의 조직도는 이윤우 대표이사 부회장을 정점으로 그려져 있다. 그 아래 이윤우 디바이스솔루션 부문 사장과 최지성 디지털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부문 사장이 투톱으로 그려져 있다. 디바이스솔루션 부문은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이 통합된 조직이다.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 부문은 휴대전화와 전자제품 부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는 이 조직도의 밖에 그려져 있다. 별도의 섬처럼. 정치권 용어로 설명하면, 무임소 장관인 셈이다. 이재용 전무는 상당 기간을 외국에서 보낸다. 주거점은 중국 상하이다. 인도와 러시아, 브라질 등 신흥국가들을 주로 방문한다. 앞으로 최대의 시장으로 부상할 이들 신흥국가에서 인맥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이재용 전무는 지난해 4월까지 최고고객경영자(CCO·Chief Customer Officer)란 직함을 달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고객은 개인이 아니다. 마이크로소프트나 인텔, 델컴퓨터 등의 글로벌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의 최고경영진들과 인맥을 쌓기에 제일 좋은 직함이다. CCO라는 직함이 사라진 지금에도 해외에서의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친인 이건희 전 회장도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다. 이건희 전 회장은 일본의 대기업 회장들과 인맥 쌓기에 주력했다. 일본 기업들과 반도체, 자동차, 선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전 회장의 인맥 덕분이라는 말을 삼성에서는 자주 한다.
이재용 전무는 국내에 머물 때는 주기적으로 각 계열사 사장·임원단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업무보고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무의 일정에 따라 식사 시간이 정해진다. 이 자리에는 이재용 전무와 계열사 사장·임원단, 그리고 이 전무의 비서가 참석한다. 이 때문에 20명씩 넘게 식사를 하게 된다. 계열사의 경영 상황 보고는 A4용지 한 장에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불가피한 경우는 2장까지 가지만, 그 이상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재용 전무는 이 자리에서 계열사들의 경영 상황을 보고받고 관심사에 대해 물어본다고 한다. 지시사항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듣기’에 주력하는 셈이다. 이재용 전무가 질문한 사항에 대해 만족스런 답변이 나오지 않으면 반드시 재보고가 이뤄져야 한다. 이재용 전무가 부장급 실무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일도 있다고 한다.
등산을 겸한 업무보고를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계열사 사장·임원단과 서울 청계산을 함께 오르고 산 아래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다”고 전했다. 이 전무의 소탈한 면을 보여주는 일화인 셈이다.
삼성그룹은 갑작스럽게 악화된 경제 상황에 맞춰 지난해 후반부터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이재용 체제’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16일 발표된 삼성그룹의 사장단 인사가 그 결과였다.
이재용 체제의 삼두마차로 최주현 삼성에버랜드 사장과 최도석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 그리고 이수창 삼성생명 사장이 꼽힌다. 이재용 전무 → 삼성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카드 → 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형 소유구조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이 세 회사다.
최주현 사장은 구조본 감사팀장 출신이고, 최도석 사장은 재무팀장 출신이다. 이수창 사장도 재무팀 출신이다. 이재용 체제 역시 이건희 전 회장대에 마련된 구조본 출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에서는 이윤우 부회장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지만, 가장 큰 힘은 최지성 사장에게 쏠려 있다.
이재용 체제는 ‘구조본’이 없는 체제이기도 하다. 이건희 전 회장 시절 삼성의 상징은 구조본이었다. 구조본은 삼성그룹의 재무·감사·인사·홍보를 모두 관장하는 삼성의 두뇌였다.
전 회장대에 마련된 구조본 출신이 주축삼성에서는 구조본의 필요성을 삼각편대론으로 설명하곤 했다. 한 축에는 이건희 전 회장이, 한 축에는 구조본이, 한 축에는 각 계열사가 균형을 맞춰 삼성을 이끈다는 설명이었다. 이 전 회장이 장기(계획)를 구상하고, 구조본이 중기를 이끌어가고, 계열사들이 단기를 실행한다는 말도 했다. 구조본 해체 뒤 그 역할은 사장단 협의회가 대신한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주재하는 이 회의에는 각 계열사 사장들이 모두 참여해 그룹의 주요 현안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이 때문에 사장단 협의회를 지원하는 업무지원실을 새로운 실세로 보는 이들도 있다. 업무지원실장은 구조본 재무팀 출신인 김종중 부사장이 맡고 있다. 사장단 협의회 아래에 삼성그룹의 홍보를 총괄하는 삼성브랜드관리위원회와 투자를 조정하는 투자조정위원회가 있다.
이재용 전무는 형식적으로 사장단 협의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식사와 등산을 겸한 계열사 사장단과의 만남이 비공식 채널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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