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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으로 국가 책임 끝?

딸을 잃은 뒤 범죄피해자가족모임에서 ‘사형수’를 만나 용서를 배운 김기은씨
등록 2009-03-13 11:47 수정 2020-05-03 04:25

“오늘 두 분께서 오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새삼 알게 되었고, (중략) 두 어르신과 같이 선하신 분들이 증오와 절망의 눈물을 더 이상 흘리는 일이 없도록 해드려야지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과 절망의 바다에 또 다른 누군가가 빠지지 않도록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막아드리고 싶습니다.”

김기은씨

김기은씨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날들

한 사형수가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을 만난 뒤 쓴 편지다. 2007년 12월21일,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을 선고받은 4명의 사형수와 2명의 피해자 가족이 만났다. 김기은(62·여)씨에게 그 만남은 4년 전 딸을 잃은 고통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김씨는 2005년 10월1일 스물아홉이던 딸을 잃었다. 딸은 결혼을 전제로 6년째 사귀던 남자친구의 손에 살해당했다. 어쩌면 사위가 됐을지도 모르는 범인은 딸을 칼로 찔러 살해한 뒤 14층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엄마랑 얘기할 때도 그냥 하는 법이 없어요. 팔짱을 끼고, 끌어안고, 너무나 살갑던 딸이었는데….” 김씨는 딸의 얼굴이 지금도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나뿐이던 딸이 숨지고 김씨는 한동안 분노와 절망 속에서 살았다. 딸의 장례를 치르는 도중에도 범인의 장례식장을 뒤졌다. 그의 빈소를 찾지 못해 경찰에게 소리 질렀다. “그놈 어딨냐. 그놈은 안 죽은 거냐. 그놈 잡아내라. 그놈 죽여달라.” 울면서 소리쳤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날들이었죠. 남편과 둘이 고개를 푹 숙이고 집 앞 둑방길을 걸어다니다 집에 와서 말없이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는 게 일이었어요.” 부부간 대화도 거의 없었다.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하루하루 생살이 뜯겨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김씨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부에서 하는 범죄피해자가족모임을 알게 됐다. 그곳에서 또 다른 피해자 가족들을 만났다. “위로하고, 위로받으면서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됐어요. 분노보다는 잊는 것이, 그래도 잊혀지지 않을 때는 용서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했어요.”

김씨는 조금씩 ‘용서’를 생각하게 됐고, 사형수와의 만남을 결심하게 됐다.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들일지 무서웠어요. 그런데 하염없이 울고 또 울더라고요. 용서해달라는 말조차 못해요. 우리가 자신들을 만나서 아파하지 않기를 바라며 9일 동안 기도만 했다더군요.” 김씨는 그 만남 뒤 사형을 반대하게 됐다. “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들이 있잖아요. 그 부모도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어요. 사형은 사형수 가족에게 또 한 번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차 피해 최소화하는 법률 제정해야

김씨는 “국가가 이미 잡은 범죄자를 죽이는 것보다 범죄로 인해 상처받은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하고 보호할 건지에 더 신경을 써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범죄피해자가족모임에서 만난 가족들은 살인·방화 등으로 피붙이와 재산은 물론 자신감까지 잃고 삶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도 깨진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이 자꾸 엇나가고 어두워져 걱정하는 엄마들도 있고, 아이를 잃고 다툼만 하다 이혼에까지 이르는 부부도 많다. “이런 가족들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상담해주고, 기간을 정해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것이 절실해요. 사형수를 죽인다고 죽은 내 딸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범죄피해자가족모임을 관장하는 이영우 신부는 “사형은 국가가 ‘피해자 인권’을 빙자해 가장 손쉽게 국가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일 뿐”이라며 “사형수를 죽이고 나서 ‘법질서를 확립했다’고 보도자료를 내는 것”은 쉽고도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 신부는 “2006년부터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전국에 생기긴 했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고 지원도 형식적일 뿐”이라며 “치유·상담·경제적 지원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관련 기금을 확보하고, 피해자 가족들이 경찰 수사과정 등에서 입는 2차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법률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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