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사회에는 이전 세대에 없던 계급 구분법이 존재한다. 전체 노동인구의 3분의 1씩을 대표하는 ‘정규직’ ‘비정규직’ ‘자영업자’라는 3가지 계급이 그것이다. 상대적 약자인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은 혹시나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도에 휩쓸릴까 눈을 부릅떠야 할 처지다. 허술한 복지 체계와 극심한 고용불안은 한국 경제의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인에게 일터와 쉼터를 박탈당한 ‘잡리스’(Jobless)와 ‘홈리스’(Homeless)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자영업 3차 대란’을 경계하는 노란 신호등 앞에서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6년 한국의 전체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중은 33.6%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으뜸이다. 자영업 초과잉 사회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김병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센터장은 비밀을 푸는 열쇳말로 ‘농민’을 지목한다. 선진국의 농업인구가 통상 경제활동인구의 4% 수준인 데 비해, 1980년 한국은 국민의 4분의 1이 농촌에 살면서 농업을 주 생계 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60~70년대 진행된 산업화로 이미 대규모 이농이 이뤄진 상태였지만, 농업 종사자 수는 여전히 자영업자의 갑절이었다. 쌀값은 중요한 경제 이슈였고, 농민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였다. 민주화 세력이 노동자와 함께 농민을 사회 변혁의 주체로 인정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상황은 극적으로 변한다. 제조업의 성장 및 ‘세계화’와 맞물려, 농산물 수입개방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농업 포기 정책’이 농민들의 도시 유입을 추동했기 때문이다. 94년 국내 자영업 인구는 500만 명에 이르고, 농업 인구는 250만 명 밑으로 떨어진다. 97년에 닥친 외환위기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자영업자화를 불러 ‘초과잉 자영업 사회’를 만들어낸 주범이었다. 김 센터장은 한국 자영업자 수가 선진국 자영업 인구의 2배를 넘으면서도, 비전문적 분야에만 집중 분포된 원인을 기형적 산업·노동 구조에서 찾는다. 그리고 5년여 뒤인 2003년 닥친 신용카드 사태는 자영업 위기를 심화시켰다. LG카드를 비롯한 신용카드사들의 회사채가 부실로 이어져 거래가 중단되면서 자본시장이 혼란에 빠졌다. 2002년 말 101조원에 이르렀던 신용카드사의 현금서비스 이용한도는 2003년 9월 58조원대로 축소됐다. 같은 기간 263만 명이던 신용불량자 수는 350만 명으로 급증했다.
그리고 2008년. 한 해 동안 자영업 인구는 7만여 명 감소했다. 2007년 말부터 원자재 가격과 소비자물가가 동시에 오르면서 마진 압박을 받게 된 게 일차적 요인이었다. 무슨 뜻일까? KB국민은행연구소의 강경훈 연구원은 “경쟁이 심한 산업구조와 소비 감소 상황에서, 매출원가에 영향을 미치는 생산자물가의 증가분만큼 가격에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분석한다. 예컨대 세탁소가 한 골목에 몇 곳씩 있다 보니 전기요금·수도세가 오른 만큼 세탁비를 올리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결국 ‘자영업 대란’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열쇳말은 ‘과잉’이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국내 서비스업 생산지수(2005년을 100으로 해서 서비스업체의 영업수익 성장세를 보여주는 지표) 증가율은 2007년 3분기(7.2%)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추세를 보인다. 2008년 8월의 1.6% 증가율은 2005년 4월(0.4%)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국세청의 ‘국세통계연보’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폐업한 개인사업자는 모두 84만8062명에 이른다. 개인사업자 폐업 건수는 2003년 81만5738건에서 2004년 69만9292건으로 줄었다가 2005년(75만3994건), 2006년(75만7744건)엔 반등하는 양상이다. 다행히 지난해 9월부터 원자재 가격 하락과 환율 안정으로 물가상승률은 둔화됐다. 그러나 곧장 미국발 금융위기가 실물위기로 번지면서 자영업자들은 더 큰 시련을 만나게 됐다. 내수가 꽁꽁 막힌 터에,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따른 신규 자영업자들의 유입까지 코앞에 닥쳤다.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자영업 감축이 아니라 적절한 일자리 창출일 수도 있다.
‘현재 사업을 유지하겠다’ 84.6%자영업자들 스스로 바라보는 현재의 경제 상황은 엄중하다. 소상공인진흥원이 지난해 11월 소상공인사업체 440곳을 조사한 결과, 응답 업체의 58.9%가 ‘최근 6개월간 매출이 감소했다’고 밝혔다. ‘거의 변동이 없다’와 ‘매출이 늘었다’는 응답 비율은 각각 31.9%와 9.3%였다. 업종별로는 특히 욕탕업(86.2%), 노래방(68.8%), PC방(60.0%), 세탁소(60.0%) 등 종사자들의 응답에서 매출이 줄었다는 비율이 높았다. 중식당, 의류 판매, 부동산중개소 업종만 불황의 그늘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매출 감소 이유로는 ‘물가 상승으로 고객의 씀씀이 감소’를 꼽은 응답이 26.9%로 가장 높았다. 다음으로 ‘내수 경기 위축’(21.4%), ‘소형 업체와의 경쟁 심화’(19.7%), ‘판매 부진’(16.4%) 등의 차례였다.
이들 소상공인에게 지난 6개월간의 사업운영 실태를 물었더니, ‘현상 유지’라는 응답이 60.5%로 가장 높았다. ‘흑자’와 ‘적자’라는 응답은 각각 22.9%와 16.6%였다. ‘적자 상태’라는 응답이 많았던 업종은 욕탕업(31.0%), 이용업(24.2%), 제과점(23.7%) 등이었고, ‘흑자’라는 비율이 높은 업종은 제과점(34.2%), 숙박업(28.6%), PC방(26.7%) 등의 차례였다.
조사대상 업체들은 향후 사업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체 응답자의 55.4%가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변동 없을 것’과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각각 32.0%와 12.6%였다. 부정적 시각은 노래방(75.0%), 이용업(70.6%), 슈퍼마켓(66.1%) 등에서 두드러졌다. 흥미로운 것은 소상공인 사업체들이 미래를 비관하면서도 ‘현재 사업을 유지하겠다’는 응답(84.6%)이 사업을 접거나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의견을 압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자영업에서 퇴출되면 갈 곳이 없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경제’라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에너지는 돈의 흐름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개인사업자들의 ‘돈줄’이 말라가는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낸다. 2008년 6월 말 현재 예금은행 개인사업자 대출은 135조원으로 전체 기업대출 478조6천억원의 28.2%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권의 개인사업자 대출은 2005년 2분기부터 증가하기 시작해 2007년 말까지 매년 증가세가 확대됐다. 이는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은행들이 개인사업자들을 상대로 한 대출 실적 쌓기에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2004~2005년 개인사업자 대출 순증가액은 5조8천억원인 데 비해, 2006~2007년엔 32조8천억원이나 됐다. 그러나 2008년 상반기 들어 상황은 다시 반전됐다. 중소 건설사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과 환율 급등 등으로 대출 공급이 크게 줄어들었다. 개인사업자 대출의 연체율이 2008년 상승세로 돌아선 것도 심상치 않다. 예금은행의 1개월 이상 연체율은 2007년 4분기 0.6%를 기록했지만, 2008년 1·2분기엔 0.7%로 상승했다.
자영업자여, 조직하라그렇다면 자영업 파국을 막기 위해 지금 급한 조처는 무엇일까? 일단 금융시장의 유동성 경색에 따라 좁아진 돈의 수도관을 뚫어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LG경제연구원의 오문석 상무는 “자영업은 규모가 작고 경기에 워낙 민감하기 때문에 특별한 처방을 내리기 힘들다. 그렇다고 방치하면 소비 침체와 신용불량자 양산 같은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내수를 살리는 게 핵심이겠지만, 일단은 소상공인과 신규 창업자에 대한 대출 길을 열어주는 금융 지원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진보적 싱크탱크들은 지금이 도시 자영업 문제의 근본적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제안한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의 홍헌호 연구위원은 “600만 자영업자가 과잉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이들을 다른 일자리로 흡수시킬 것인지가 중요하다”며 “정부가 감세정책을 포기한다면 매년 20조원이 확보되는데, 그 돈으로 북유럽에서처럼 복지 분야의 사회적 일자리 100만 개를 만들 수 있다”고 밝혔다.
김병권 새사연 센터장은 “자영업 문제를 풀기 위한 선차적 과제는 결사”라고 말한다. 자영업 계층이 집단화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동안 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이나 대형마트 건립반대 운동 등이 있긴 했지만, 600만명이라는 규모에 걸맞게 자영업 계층이 집단화·주체화되지 못했다고 그는 설명한다. 김 센터장은 자영업의 결사가 생겨야 정부에 적극적인 정책을 요구할 수 있고, 자영업 계층의 집합적 요구를 수렴할 수 있으며, 정부 정책이 효율적으로 시행될 통로와 매개가 마련된다고 강조한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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