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용품의 대명사가 ‘3M’이라면, 선거 필승전략의 대명사는 ‘4M’이다. ‘메신저(Messenger), 메시지(Message), 미디어(Media), 머니(Money)’의 4M이다. 매력적인 후보(메신저)와 가슴 뛰는 구호(메시지)는 선거를 뜨겁게 만든다. 돈과 미디어는 선거의 판세를 결정한다.
정치 컨설턴트인 김윤재 미국변호사(법무법인 자하연)는 “미국 민주당이 새로운 변화와 진보를 통해 다시 집권에 성공한 것이 아니다”라며 “오바마라는 매력적인 후보가 ‘변화’라는 구호에 공감을 이끌어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 변호사는 미국 민주당 선거에 수차례 참여한 경험이 있다. 김 변호사는 “4M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오바마 당선자는 전혀 새로운 지도자”라고 했다.
오바마 당선자와 친분이 있는 김동석 한인유권자센터 소장은 “오바마의 흡인력은 엄청나다”고 표현했다. 김 소장은 “(민주당 경선 상대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돈을 가져가야 웃었다. 오바마는 달랐다. 누구라도 다가갈 수 있었다. 오바마는 그들을 끌어당겼다”고 했다. 감동한 이들이 몰려들었다. 10대 한인 청소년들도 아빠·엄마 신용카드로 몰래 오바마 캠프에 50달러, 100달러씩 보냈다고 한다. 오바마를 통해 변화를 봤기 때문이다. ‘뭔가가 바뀌는구나’ 하는. 이 정도면 ‘매력’을 넘어 ‘마력’ 수준이다.
김 소장이 버락 오바마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7월. 보스턴의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장이었다. 오바마는 여기에서 스타가 됐다. 김 소장이 오바마를 다시 만난 것은 2006년. 때마침 뉴저지를 방문하게 된 오바마 쪽에서 “한국계 미국인들에 대해 알고 싶다”며 김 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2년 전 보스턴에서 건넨 이름 없는 한인의 명함도 그는 소중한 자산으로 간직했던 것이다.
2004년 보스턴 전당대회를 취재했던 박성래 한국방송 기자도 오바마에게 한눈에 반했다. 박 기자는 그 뒤 오바마에 몰두했다. 최근에는 책(,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까지 냈다. 박 기자는 “전당대회 연설 당시 모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감동적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오바마는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진보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그 변화의 필요성을 모두가 공감하게 만든 것이 오바마의 능력이었다”고 강조했다.
2M 메시지: ‘변화’와 ‘우리’박 기자의 말대로 그의 메시지는 ‘변화’였다. 하지만 승리의 비결은 ‘우리’였다. 오바마의 선거구호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Change We can Believe in). 지지자들은 늘 “그래, 우리가 할 수 있어!”(Yes, We can!)라고 외쳤다. 늘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
2004년 전당대회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 글을 읽지 못하는 어린이가 있다면, 비록 그 아이가 제 자식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제 문제입니다. 어딘가에 살고 있는 노인이 약값을 내지 못해 약값과 집세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그분이 제 조부모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 삶은 더욱 가난해집니다. 어느 아랍계 미국인 가족이 변호사도 선임하지 못한 채로 올바른 절차 없이 체포된다면, 그 사건은 제 인권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이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은 ‘당신’(You)에서 ‘우리’(We)로 거듭났다.
오바마는 퇴색하고 있던 민주당의 ‘오픈프라이머리’(국민참여경선)의 정신을 되살렸다. 1968년 시카고, 대선을 앞둔 미국 민주당의 중진들은 일반 당원 투표 대신 대의원 투표를 선택했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젊은 당원들 때문이었다.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유진 매카시 대신에 허버트 험프리에게 대의원표를 몰아줬다. 전당대회장 밖에서 항의하던 젊은 반전시위대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피를 흘렸다. 이른바 ‘피의 전당대회’다. 민주당은 이날 이후 일반 당원들이 직접 대통령 후보를 뽑는 오픈프라이머리 제도를 채택했다. 오바마는 미국 유권자의 28% 수준이던 민주당 당원을 획기적으로 늘렸다. 40%에 이르던 무당파들이 ‘오바마’를 연호하며 민주당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덕분에 오바마는 민주당의 실질적 ‘오너’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물리칠 수 있었다.
3M 미디어: 인터넷과 책미국의 블로거들은 오바마를 ‘첫 인터넷 대통령’으로 부른다. 조지워싱턴대학 정치연구소의 줄리 저머니 소장은 “오바마가 인터넷 덕분에 당선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없었다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대선에서는 ‘뉴미디어’가 판세를 갈랐다. 라디오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존 F. 케네디는 1960년 텔레비전 토론으로 리처드 닉슨을 꺾었다. 오바마는 인터넷을 타고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상자기사 참조).
인터넷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는 적수도 되지 못했다. 대선 당일(현지시각 11월4일) 미국판 ‘싸이월드’인 페이스북(Facebook.com)의 오바마 지지자는 누적 258만6274명. 매케인 지지자(62만3468명)는 그 4분의 1도 되지 못했다.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 오바마 채널은 누적 조회 수 9876만 회를 기록했다. 매케인 채널 조회 수는 역시 4분의 1 수준(2514만 회)이었다(그래픽 참조).
오바마는 지난해 페이스북의 공동 창업자인 크리스 휴스(24)를 선거캠프에 영입했다. 휴스는 ‘마이보’(MyB0)라는 애칭으로 불린 공식 선거사이트(MyBarackObama.com)를 만들었다. 마이보의 회원은 100만 명. 마이보의 기본 원칙은 ‘현실화’와 ‘지역화’. 오바마는 마이보를 자신과 지지자가 아닌, 지지자들끼리 만나는 곳으로 만들었다. 지지자들은 마이보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고, 지역에서 만났다. 현지에 맞는 선거전략을 스스로 짰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선 전날, 마이보 회원들이 주변에 건 전화는 100만 통이 넘었다.
오바마는 자서전을 통해 인터넷 열풍의 토대를 만들었다. (사람소리 펴냄)의 저자 문성호씨는 “오바마는 2004년 전당대회 연설을 마치고 곧바로 자서전을 펴내 전당대회의 감동을 책으로 바로 연결시켰다”고 지적했다. 문씨는 “오바마는 2005년부터 전국 순회 유료 저자 사인회를 열면서, 자신의 전자우편과 주소를 알려주는 이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았다”며 “이렇게 모은 전자우편들은 그의 인터넷 운동의 토대가 됐다”고 분석했다. 오바마는 뉴미디어의 상징인 인터넷과 올드미디어의 상징인 책을 결합시켜 대통령의 기반을 만든 셈이다.
인터넷은 ‘화수분’(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이었다. 오바마는 역대 최고인 6억5천만달러 규모의 대선자금을 모았다. 300만 명의 미국 누리꾼들이 냈다. 95%가 200달러 이하였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캠프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만들었던 이상호씨는 “오바마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첫 화면이 기부금을 요청하는 코너인데, 5달러(5천원)부터 기부가 가능했다”며 “아무리 작은 정성도 놓치지 않겠다는 치열함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한국에서도 건전한 국민참여와 건전한 정치를 위해 이런 소액모금은 대선 전부터 가능하게 개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액모금을 통한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토머스 패터슨 하버드대 교수는 저서 에서 “저소득층은 고소득층보다 투표할 가능성이 47%나 낮다. 선거에서 얻는 이득이 적기 때문이다. 저소득층은 자신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그만큼 잃는다. 더 가난해진다. 더 투표를 하지 않는다”며 빈곤과 낮은 투표율의 악순환을 분석했다. ‘유권자 실종’ 현상이다. 패터슨 교수는 이를 2000년대 공화당 연전연승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누가 선거자금이 많으냐’로 승패가 갈리는 ‘금권정치’ 때문에 공화당이 유리할 수밖에 없고,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는 ‘합법적 독재’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미국인들은 몰락하는 미국 경제를 살려달라는 애절한 심정으로 버락 오바마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몰락한 민주주의도 되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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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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