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장기침체 속 깊어가는 가정경제파탄…빚쟁이에 쫓기고 가족과 생이별, 위장이혼까지

안방에 들이닥친 빚쟁이 가위에 눌려 벌떡 일어났다. 며칠 전에는 목을 매 죽으려는데 아내와 아들 녀석들이 울부짖으며 말리는 꿈도 꿨다. 날마다 꿈에서 깨면 ‘오늘은 어디에서 벌이를 찾지’ 하는 고민에 빠진 지가 벌써 다섯달째.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차라리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도 보이면 쑥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빚을 빚으로 갚다 끝내는…
박갑동(40·가명)씨는 몇달 전까지만 해도 상장 대기업의 차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실직자에다, 금융기관으로부터 ‘신용불량자’라는 딱지를 받아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98년 6월 회사의 알선으로 종합금융사에서 3천만원 대출을 받아 우리사주를 산 것이, 생활이 망가지게 된 시발이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감원바람이 거세게 일던 시기이라 회사 재무구조개선을 위한 유상증자에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후 달마다 대출 원리금을 빼고 남은 월급으로는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적자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 적자를 마이너스통장, 카드대출 등으로 메워나가다가 한번에 만회하겠다는 생각으로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 빌린 돈으로, 그것도 신용거래까지 해가며 한 주식투자는 1년 동안 원금 2천만원을 다 까먹고 무려 1억5천만원의 추가손실을 냈다. 이럭저럭 쌓인 빚이 2억원을 넘었다. 월이자가 20%를 넘는 사채까지 끌어다 써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자 박씨는 결국 지난해 11월 사표를 냈다. 퇴직금 5천여만원과 집을 팔아 전세로 옮기며 마련한 돈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지금은 신용불량 기록 때문에 취업문을 두드려봤자 번번이 퇴짜를 맞고 있다. 앞길이 막막하지만 그래도 박씨는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보금자리나마 있다.
운수업을 하던 한아무개(42)씨는 지난 2월부터 아내(35)와 두 아들(초등학교 1학년, 3살짜리)을 서울 상도동에 있는 노숙자 쉼터로 보냈다. 그는 가계수표를 부도낸 죄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 도피중이다. 경찰 추적과 빚쟁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내와는 위장이혼(?)을 했다. 법적으로 이혼함으로써 가족이라도 보호하자는 판단에서였다. 딱한 일은 아내 김씨가 세 번째 아이를 가져 임신 5개월째라는 사실. 이런 형편에 셋째까지 낳는 건 여러모로 무리라는 생각에 아내에게 중절수술을 받으라고 했지만, ‘한번 생긴 생명을 어쩌겠느냐’는 어머니의 만류로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사채업자의 추적, 경찰의 수배망을 피해 일용직으로 전전하고 있는 한씨는 가끔씩 아내와 아이들을 보러 쉼터를 찾아가도 남들의 눈을 피해 만나야만 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때 반짝 활기를 보였던 경기가 장기 침체국면으로 빠져들면서 가계부실이 깊어지고 있다. 불황 초기에는 친척, 친지들에 기대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해오다 한계상황에 맞닥뜨려 길거리로 나앉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것도 가족이 모두 거리로 나앉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사울 상도동의 노숙자 쉼터에는 현재 50여명이 고단한 몸을 의탁하고 있다. 모두 가족단위로 대개 가정경제 파탄으로 집에서 쫓겨난 이들이다. 쉼터의 총평수는 60평을 밑돈다. 복도, 베란다 면적을 빼면 한 사람에 허용된 공간은 1평 안팎인 셈이다.
가계대출 급증, 부채 부담 능력 급락

40대 초반의 김아무개씨 부부도 올해 4월 이 쉼터의 식구가 됐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히 학교도 나오지 못한 이 부부는 설상가상으로 몸마저 성치 않다. 남편은 특정한 병명없이 핏기가 없고 늘 골골하는 허약 체질. 그런 중에도 가끔씩 강남고속터미널 같은데 나가 지게꾼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은 간질증세 때문에 다니던 식당을 그만둬야 했으며 지금은 쉼터에서 소개해주는 공공근로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노숙자 문제는 전반적인 가계부실의 한 단면일 뿐이다. 노숙의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파산 직전에 이른 개인이나 금융기관 전산망에 ‘신용불량자’로 등재된 이들까지 감안하면 가정경제 파탄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로 떠오른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불러온 97년 말의 외환위기는 기업부실에서 요인이 싹텄다. 그런데 지난해부터는 가계부실이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행에서 최근 집계한 국내 가계부채 규모는 지난해 말 현재 330조원. 가구당 평균 2300만원가량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조세연구원에 따르면 가구당 연평균 소득(도시가계 기준)이 2700만원이므로, 보유자산이 줄어들지 않으면 2300만원의 빚을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가계빚이 늘어나는 속도이다. 98년부터 2000년까지 기업부문 부채는 10.3% 증가에 그친 반면 가계부채는 22.1%나 증가했다. 특히 금융기관의 가계대출이 지난 98년에는 감소세를 보였다가 99년에는 15.1%, 지난해에는 24.8%로 급증하는 추세이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국내 가계의 소득에 비춰본 부채부담 능력을 조사해봤다. 조사결과, 지난해 우리나라 전체 가계부문의 이자지급비용은 39조9200억원이었다. 가구당 269만원에 이르는 셈이다. 가계의 가처분소득(세금과 공과금 등을 빼고 소비나 저축을 할 수 있는 소득)에서 이자지급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80년 3.6%에서 90년 6.1%로 오른 데 이어 지난해에는 11.5%로 치솟았다. 이에 반해 빚을 갚을 능력은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가계의 소득이나 자산가치가 빚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증가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이다. 게다가 LG경제연구원의 송태정 책임연구원은 “경기침체로 인한 기업의 경영악화는 근로자들의 임금하락뿐 아니라 고용조정, 부도 증가로 이어져 ‘종합적인 측면’에서 가계부실이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송 연구원은 “불황의 골이 더 깊어지더라도 기존의 가계부채 잔액과 대출금에 대한 금리는 크게 변하지 않는 반면에 소득은 상대적으로 더 큰 폭으로 줄어들면서 이자상환 부담이 더욱 빠른 속도로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가계가 빌린 돈이 소비나 투자로 연결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이후에는 소비가 급격히 위축되는 가운데 가계부채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는 빚을 갚기 위해 더 빚을 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송태정 연구원은 “IMF 이전에는 ‘과소비형 부채증가’가 문제였는데 이제는 ‘과부채형 소비부진’을 우려해야 할 상황”이라며 “즉 가계부채 증가가 소비를 위축시켜 경기침체를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계부실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을 해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부채증가 소득감소’는 ‘대출금 연체’로 이어지고 이는 금융기관의 대출 자산을 부실화시키고 나아가 금융시장 전반의 불안정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는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신용카드 빚을 둘러싸고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굶기 전까지는 카드 대출 말아라

최아무개(47)씨는 일반인들에겐 아직 낯설기 짝이 없는 ‘소비자 파산’을 앞두고 있다. 카드 빚을 졌다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 법원에 개인 파산 신청을 한 것. 아직 결정이 내려지진 않았지만, 파산 선고가 내려지면 빚 멍에에서 헤어날 수 있는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된다. 그 대신에 각종 권리도 박탈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본래 승합차 영업을 해오던 최씨는 외환위기 이후 벌이가 시원치 않자, 승합차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오토바이를 사서 택배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택배업도 신통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택배업도 포기하고 택시회사에 취직하려 했는데, 이 또한 뜻같지 않았다. 건강검진 결과 ‘결핵 종양’이 찍혀나온다는 이유로 취업을 거부당한 것이다. 이때부터 최씨는 줄곧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사업·취직 실패 이후 최씨에게 남은 건 4100만원에 이르는 빚뿐이었다. 본인 부주의 탓도 있었지만, 각 금융기관들의 확대지향적 영업(카드 발급) 행태에 말려 무려 5개의 카드를 발급받고 한순간 연체(고작 1주일)를 하게 됐다. 그 한순간이 신용불량자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런 신용불량자가 지난 3월 말 현재 무려 301만명. 이 가운데 최씨처럼 빚내서 빚갚는 악순환의 고리에 얽히면서 부채 규모는 점점 커져갔고, 급기야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사람은 파산신청을 할 수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소비자파산 신청자는 올해 1분기에만 66명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 24명에 비해 2배를 웃도는 수준이다. 지난해 11월 14명에서 12월 3명으로 줄었던 파산 신청자가 올해 1월 13명, 2월 18명, 3월 35명으로 급증세를 보이는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파산 상태로 내몰린 이들은 대부분 신용카드 대출이 화근이다. 지난해 신용카드사들의 매출실적은 200조원을 훨씬 웃돌아 전년도의 2배를 넘어섰다. 신용카드를 통한 자금조달은 은행 대출에 비해 2배가량 비싸 가계의 부담을 크게 늘리고, 결국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토양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계부실 심화의 구조적 요인은 정책당국이 차단해야 일이지만, 개개인의 잘못된 소비관행이나 부주의 탓에 빚어지는 가계부실도 적지 않다. 가톨릭대 김경자 교수(소비자주거학)는 “신용문제와 관련해 상담을 받다보면 문제의 반은 소비자 자신의 욕심이나 무지·부주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급하니까 일단 (카드 빚이라도 내)쓰고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이한 판단으로 화를 키우는 경우를 왕왕 본다”고 말한다. 그는 “반드시 재산총액이 부채총액을 웃도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빚을 갚는 데 들어가는 비용(주택융자에 드는 비용 제외)이 월수입의 30% 이상이면 빨간불이 켜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상명대 양세정 교수(소비자주거학)도 “경제위기로 한 차례 큰 어려움을 겪은 뒤 소비자들에게 면역성과 함께 불감증까지 생긴 것 같다”며 “고정적인 수입규모로 봐서 무리이다 싶을 정도의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사례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쌀 떨어지기 전에는 신용카드 대출을 받지 않는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융기관 행태도 바뀌어야
그렇지만 개인들의 노력만으로 모자란다. 금융기관들의 행태 또한 바뀌어야 마땅하다. 요즘 가계대출이 급증하는 데에는, 대출수요 증가요인도 있지만 금융기관들이 기업대출에 견줘 안정성과 수익성(이자)이 낫다는 이유로 개인들을 상대로 너도나도 밀어내기식 대출확대전략을 펼친 탓도 있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급하지도 않은 가계대출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신용카드사들의 경우 자격을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카드발급을 남발함으로써 소비자는 물론, 카드사 자신의 부실을 키우는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지난해 카드매출 실적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신용카드 빚을 둘러싸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작용들은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어떤 배경에서 비롯됐든, 가계부문의 전반적인 부실은 해당 개인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 충정로에 있는 노숙자 쉼터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는 이아무개(46)씨는 작지만, 소박한 꿈이 있다. 예전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사는 것이다. 이씨는 을지로 부근에서 사진제판업을 해오다 컴퓨터화 추세에 밀려 문을 닫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사채를 얻어쓴 게 적지 않아 줄곧 쫓겨다니는 신세가 됐다. 아내는 초등학교 2학년, 6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피신해 있다고 한다.
이씨는 쉼터와 연결돼 있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당 5만5천∼6만원(소개비 포함)짜리 건설 일용직 자리를 얻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씨는 “그래도 날이 풀려 일감이 많아져 다행”이라며 “많지는 않지만, 얼마간 저축도 하고 있다”고 웃었다. 이씨의 소박한 꿈이 이뤄질 때는 언제쯤일까.
박순빈 기자 sbpark@hani.co.kr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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